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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던 박충식이 다시 부탁했다.
“영국으로서는 단지 일본이 발행한 전시국채를 더 이상 매입해 주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귀국으로서도 호전적인 일본보다 우리 대한제국과 손을 잡는 것이 훨씬 득이 많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또 생각을 하던 조던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귀국이 우리 영국에 무엇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통역을 하던 이현호가 속으로 소리쳤다.
‘됐다! 드디어 넘어왔다.’
그러나 박충식의 말은 계속되었다.
“솔직히 이번에 귀국이 일본을 도운 것은 일본을 부추겨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용병으로 고용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
박충식의 정확한 지적에 조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귀국이 우리 대한제국과 손을 잡는다면 우리는 러시아를 아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은 물론 귀국이 원한다면 군항(軍港)을 제공할 용의도 있습니다.”
조던의 안색이 갑자기 환해졌다.
“군항을 제공해 준다고 하셨습니까?”
조던의 물음에 박충식이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렇습니다. 물론 군항제공은 귀국이 일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해야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문제는 본국에서 결정할 사안이기에 본 공사가 즉답을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대한제국총리께서 이런 제안을 해주신 것 자체가 우리 영국으로선 아주 큰 소득입니다.”
“부디 귀국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해 주도록 공사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장시간의 단독면담이 끝이 났다.
조던이 돌아가자 박충식은 이현호에게 질문했다.
“아마도 영국이 거문도를 탐내겠지?”
“분명 그럴 것입니다.”
“저들이 거문도에 가보면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는지 크게 놀랄 거야.”
본토와 제주도의 중간에 있는 거문도는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다. 세 섬의 중간은 섬으로 둘러싸인 수심이 깊은 천혜의 항만요건을 갖고 있었다.
그런 조건이었기에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겠다는 핑계로 몇 년간 강점할 정도로 지정학적 요건 또한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삼족오군은 처음 노획한 전함을 제주해상에 정박시켜 두었었으나 보안 등 여러 문제로 장기정박지를 모색하던 중 영국이 거문도를 일시 점령했던 것을 상기하고 거문도를 탐색했다.
거문도에는 일본군이 세워둔 망루가 있었으나 회전날틀로 간단히 제압한 후 거문도를 탐색하자 천혜의 항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삼족오군은 노획한 양국함대 전부를 거문도로 이동시켰다. 그 후 상당한 피해를 입은 미카사 등의 함정수리를 위한 선박수리시설까지 일본인포로들을 동원해 건설하면서 거문도는 몇 개월 사이 군항으로 완전히 탈태환골 되어 박충식이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영국공사 조던은 이전과 다른 대한제국총리의 당당함에 크게 놀랐으나 박충식의 제안이 영국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압수되었던 무선 통신기가 다시 설치되자 조던은 그 자리에서 본국으로 긴급비밀전문을 날리게 된다.
조던의 비밀전문을 받아든 영국정부는 당연히 발칵 뒤집혀졌다.
본래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는 미·일·영 삼국이 협의해서 극동문제를 풀어 가자고 미·일 양국이 합의했었으나 이현호는 각국공사접견에서는 영국을 쏙 빼 놓고 양국만이 밀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대노한 영국총리 캠벨배너먼경은 일본과 미국공사를 다우닝가10번지 총리공관으로 불러들여 동맹국인 영국을 배제하고 양국이 밀약을 맺은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주재 미·일 공사들은 밀약내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미·일 양국 간 밀약은 사실로 굳어지면서 영국과 미국·일본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이에 놀란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부랴부랴 밀약당사자인 육군 장관 태프트를 런던에 급파하여 밀약상황을 설명하지만 이 밀약은 애초부터 당사자들이 정식으로 날인한 조약문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고 쪽지형식의 문건을 주고받은 것뿐이라서 영국이 배제되지 않았다는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같은 섬나라인 일본이 예상 밖으로 러시아와 선전하며 아시아의 맹주로 커가는 것을 가뜩이나 불편하게 생각하던 영국은 이 기회를 곧바로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한다.
영국은 아시아에서 미국과의 공조를 철회하고 런던의 투자자들에게 일본국채를 절대 매입하지 못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리면서 영일동맹파기와 함께 일본에 대한 지원중단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면서 완전히 발을 빼버렸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곤란해진 것은 영국과 맹방인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전통 맹방인 영국과 미국은 시간이 지나면 오해가 풀릴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이미 영국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 일본은 1902년 채결한 영일동맹이 파기되면서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한다. 일본은 국채발행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끊어지면서 당장 전비충당이 발등의 불이 된다.
대본영은 부랴부랴 어전회의를 열고 명치일왕의 봉칙명령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전쟁헌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외채를 도입하기 위해 막대한 이자율의 대외국가공채를 추가로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이러한 난리를 뒤로한 채 배정자는 10여 명의 협상단을 이끌고 일본을 떠난 지 열흘 만에 상해에 도착했다. 배정자가 탄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상해일본군사령관 마쓰시마 기요시 대좌가 선상까지 직접 올라가 배정자를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다코 양. 상해주둔군사령관 마쓰시마 기요시 대좌입니다.”
마쓰시마 대좌는 배정자가 일본최고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고 협상단단장의 신분이라서 10여 년의 나이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말을 높이며 그녀를 깍듯이 예우했다.
마쓰시마가 말을 높이자 배정자는 더 공손해졌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령관각하.”
마쓰시마 대좌가 배정자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안부를 물었다.
“배를 타고 오시는데 많이 불편했나 봅니다.”
“멀미 때문에 조금 고생은 했지만 조국을 위하는 일을 수행하는데 이정도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만 했습니다.”
배정자의 말이 대견한지 마쓰시마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워 천황폐하께 큰 상훈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조국을 위해 당연한 일을 했는데 천황폐하께서 어여삐 봐주셨을 뿐입니다.”
“며칠 전 대본영에서 사다코 양의 일을 최우선으로 도와주라는 긴급전문을 받았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본관에게 주저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임무를 맡고 왔는지는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대본영이 하달한 전문에 사다코 양이 도착하기 전 미리 외국상선을 수배해 두라고 해서 그동안 각국과 미리 접촉해 놓고 있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마쓰시마의 손길을 따라 시설을 돌린 배정자의 눈에 독일깃발이 내걸린 대형 상선들이 들어왔다.
“마침 조선에 다녀온 대형 상선 10척이 빈 배로 상해로 들어와 있어서 우리가 먼저 접촉을 해 두었습니다.”
“10척이나 되는 독일 상선이 무엇 때문에 조선에 다녀왔습니까?”
“공작기계를 비롯한 각종 장비들을 독일이 조선에 수출한 것입니다.”
“조선에서 공작기계를 수입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작기계 같은 것들은 수입 금지품목으로 지정하여 수입을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전까지는 그랬었는데 지난 5월 제철소건설과 함께 대본영이 특별허가해서 이번에 조선이 대대적으로 수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쓰시마 사령관이 차준혁이 지난 5월 독일과 협상한 내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배정자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절영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공교롭게 이번에 조선반도가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대본영의 전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는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조선반도는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나면 언제라도 다시 도모한다 해도 별 문제없을 것입니다. 사다코 양께서는 그 걱정은 마시고 독일과 협상을 먼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각하의 말씀대로 독일 상선과 먼저 임대협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상해해관으로 가시지요. 부관에게 저 배의 선주를 미리 수소문 해놓으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마쓰시마 사령관의 안내를 받으며 배정자는 하선하여 입국신고를 위해 상해해관(上海海關)으로 갔다.
상해항의 입출항을 관리하는 상해해관은 1685년(강희24년)부터 업무를 보기 시작한 역사 깊은 세관이다. 배정자가 상해해관에 도착하자 마쓰시마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그의 부관이 독일 상선관계자들과 미리 기다리고 있어서 곧바로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고 덩치가 큰 독일인이 배정자에게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창양행(世昌洋行)공동대표 칼 볼터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대일본제국을 대표한 이토 마사코입니다.”
배정자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라 이토(伊藤)란 성을 쓰지 않고 다야마(田山)란 성을 쓰고 있었으나 상해로 오기 전 이토 히로부미가 특별히 허락하여 이토란 성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칼 볼터는 이번에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기계 등 대한제국수입 업무를 대행한 인천의 세창양행공동대표로 인천에서 화물을 모두 하역한 후 상선을 이끌고 상해에 들어와 있었다.
“일본정부에서 우리 상선을 임차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주전선으로 수송할 물자가 너무 많아 부득이 외국상선을 임차하기 위해 본국정부를 대리하여 제가 상해에 온 것입니다. 상해 항에 정박해 있는 귀국상선의 임차가 가능하겠습니까?”
칼 볼터는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다행히 본국에 있는 상선선사와 우리 세창양행이 상선임대에 관한 업무대행계약을 채결하고 있어서 상선임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협상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칼 볼터가 마치 싸움을 앞둔 싸움꾼 같이 상인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대답했다.
“우리 세창양행은 언제라도 협상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자 임대협상이 바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