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3 회: 3권-33화 --> (103/268)

<-- 103 회: 3권-33화 -->

칼 볼터의 호의를 차준혁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면담주선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본과의 이번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해주신 전하께 답례를 할 수 있는 기회라 꼭 성사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한제국에서 이번에 상해에 무역상사를 개설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본국 정부가 무역을 전담하는 대한무역공사라는 회사를 설립하여서 이번에 상해각국조계에 건물을 매입해 사무실을 개설 했습니다.”

칼 볼터는 그동안 인천에 머물면서 무역을 하고 있었기에 대한제국에서 외국에 수출할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되지만 어떤 제품을 가지고 무역을 하려고 하십니까?”

“아! 칼 사장께서 인천에서 무역업을 하고 계시니 잘 우리나라 사정을 아시겠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동안 대한제국의 산물은 짐승가죽과 약간의 농업특산품이외에는 서양에 팔 수 있는 물건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동안은 그랬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칼 볼터는 의친왕의 무턱대고 자부심을 내 비치자 기대보자는 은근히 걱정이 더되었다.

“전하, 무역이라는 것은 타국에 팔 수 있는 확실한 품목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턱대고 사무실만 개설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하! 칼 사장의 말은 잘 알겠으나 우리도 다 계획이 있어서 사무실을 개설한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

차준혁이 보기에 칼 볼터가 대답은 했지만 영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으나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칼 볼터도 더 이상 말을 계속 한다면 남의 나라 일에 간섭을 하게 되는 꼴이라 애써 만들어진 의친왕과의 좋은 관계가 나빠질 걸 우려해 더 이상 자세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궁금해진 바이페르트가 나섰다.

“전하께서 이토록 자신하시는 것을 보니 앞으로 취급할 제품이 상당한 가치가 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제품을 취급할 수 있겠으나 일단 의약품수출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바이페르트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의약품이요?”

“대한제국은 예로부터 고유의 의학이 크게 발달해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전통의학을 서양의학과 접목해 그동안 은밀히 신약을 연구해 온 것이 있었는데 그 연구가 이번에 결실을 보게 되어 새로운 신약개발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신약을 외국에 수출하려고 합니다.”

칼 볼터가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대한제국에서 신약을 개발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증상에 효과가 있는 신약입니까?”

칼 볼터가 큰 관심을 보이자 차준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자세한 것은 칼 사장께서 대한무역공사를 방문하셔서 무역공사사람들과 직접 상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 제가 전하께 결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칼 볼터는 고개 숙여 사과를 하면서도 궁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그런 그의 표정에 차준혁과 바이페르트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독일영사관에서 기분 좋게 만찬을 마친 차준혁은 마차를 타고 대한무역공사 건물로 돌아왔다. 

상해대한무역공사는 각국조계의 황포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며 영국의 상해건설국(上海建設局) 책임건축가로 유명한 마샬(F. J. Marshall)의 설계로 지어진 삼층 본관건물과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앞으로 대한제국상해영사관도 같이 입주할 이 건물에는 숙소도 같이 마련되어 있었다. 

차준혁이 본관을 들어서자 몇 사람이 원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다 반갑게 맞이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로 인사를 한 사람은 삼족오군 출신 중 몇 명 되지 않은 민간인 중 한명인 홍기훈으로 이번에 대한무역공사 상해지점장에 임명되었다. 30대 초반의 홍기훈은 나이가 몇 살 많았지만 의친왕으로 분장하였고 차준혁이 이번에 총리정책기획비서관에 임명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높였다.

차준혁이 원탁으로 다가서자 마침 나누던 대화가 끝이 났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홍기훈만 남게 되었다. 

차준혁이 홍기훈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고생이 아니라 접대를 잘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하고 계셨습니까?”

“예, 준비할 것이 많아서 말입니다.”

“상해에 처음 진출한 것이라 살펴 볼 것이 많아 힘드시겠습니다. 그나저나 개업식은 언제쯤 여시려고 하십니까?”

“모든 준비를 갖추려면 아마 열흘 정도는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때부터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십니까?”

“준비를 마치고 각국 상인들을 초청하여 대대적인 개업식을 열 계획이지만 그전이라도 회사를 방문하는 상인들이 있다면 상담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독일영사관에서 세창양행 공동대표인 칼 볼터가 신약에 대해 아주 큰 관심을 보이던데 아마도 내일 방문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독일은 앞으로도 우리와 많은 교류를 해야 할 나라니 특별히 신경써주시기 바랍니다.”

차준혁은 바이페르트 영사와의 관계와 칼 볼터의 호의에 대해 설명해주자 홍기훈이 적극 호응했다.

“그렇다면 우리 공사에서 특별히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익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이니 우리나라를 도와준 사람에게 배려를 해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각국에 제출할 특허출원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홍구훈이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모두 각국어로 번역을 끝내서 계획에 따라 잘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럼, 페니실린이 먼저 출원되는 것입니까?”

“페니실린과 결핵약인 스트렙토마이신 그리고 살충제인 DDT를 동시에 출원할 예정입니다.”

차준혁은 DDT란 말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DDT는 유해성분이 많은 약물인데 괜찮겠습니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위생환경으로는 이보다 좋은 유해곤충박멸충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국립생화학연구소에서 고심 끝에 제품출시를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설명을 하던 홍기훈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본 역사에서 이 세 가지 약품이 모두 노벨상대상이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저도 자료를 찾아보다 발견한 사실입니다.”

생각지 않은 홍기훈의 말이었다. 차준혁이 한동안 깊은 생각을 하다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조심해야겠군요. 잘못하다가 외국의 집중견제를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자체가 그동안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스스로의 일을 해결했기 때문에 외국의 견제를 받지 않고 있지만 만일 우리가 너무 앞서간다면 각국은 분명 집중견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하시는 문제를 가지고 국방과학연구소와 국립생화학연구소연구진들이 회의를 해서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적절히 수위를 조절해가면서 출시하기로 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연구 성과를 공유할 외국과학자초청을 최대한 서둘러야겠습니다.”

“이번 신약이 출시되면 외국과학자를 국내로 초청하는데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홍기훈의 말에 차준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홍기훈의 예측대로 10여 일 후 발표된 3종의 신약은 어마어마한 국제적 반향을 불려 일으켰고 이러한 반향은 독일연수생을 따라갔던 교수진들의 유럽과학자 초청 작업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이후에도 유명하거나 유명해질 유럽과학자들을 계속해서 초청한다. 최상의 예우를 보장한 과학자초청노력은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과학자들의 한국행이 봇물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대거 초빙은 이후 세계과학중심지가 미국이 아닌 대한제국이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다음날 대한무역공사 상해지점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중국인 점원의 보고를 받고 정문으로 나온 홍기훈은 한 명의 여자와 그녀를 호위하는 일본군 몇 명을 볼 수 있었다. 

홍기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대일본제국 후작이신 이토 히로부미님의 딸인 이토 사다코라고 합니다.”

“예? 이토 히로부미의 딸인 이토 사다코요?”

홍기훈의 놀란 표정을 마치 즐기기라도 하듯 배정자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홍기훈을 빤히 바라봤다.

홍기훈은 배정자를 처음 봐서 어리둥절했으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는 급격히 얼굴이 굳어졌다.

“그대는 배정자가 아닌가?”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의친왕으로 분장한 차준혁이었다. 배정자는 차준혁을 보자 나름대로 섹시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전하.”

의친왕에게서 한성에 있을 때 배정자와는 스쳐지나갈 정도의 인연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차준혁은 그녀를 만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대는 절영도에 귀양을 가 있어야할 몸인데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더구나 이토 사다코라니?”

차준혁의 강한 질책에도 배정자는 당당했다.

“지난 9월 하순 절영도에 있었으나 당시 러시아함대가 부산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절영도도 러시아군이 진군할 것이란 불안감에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섬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정자도 처음과 달리 러시아가 부산을 침략한 것으로 스스로의 생각까지 고쳐먹고 있었다. 

차준혁은 배정자가 절영도를 탈출한 후 또다시 일본의 밀정노릇을 했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부산을 공략한 함대를 러시아함대로 오인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준혁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일본에 부산공략사실을 밀고했겠군.”

차준혁의 냉랭함에 배정자는 더 당당해졌다.

“대일본제국신민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아버님께서 저를 정식으로 이토가문의 자식으로 인정하셔서 이제부터는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적을 버리겠다는 말인가? 네가 하는 꼴이 마치 못사는 부모를 버리고 잘사는 집 양녀로 간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은가.”

차준혁의 거듭되는 냉랭함에 배정자의 안색도 차츰 차갑게 변했다.

“조선이 저에게 해 준 것은 노비신분과 오욕뿐인데 조선에 무슨 미련이 있어 충성을 하겠습니까? 저를 이렇게 사람답게 만들어준 조국은 오로지 대일본제국뿐입니다.”

배정자도 냉랭하게 받아치자 차준혁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국가기밀을 일본에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일본인 행세를 하려는 자가 이곳은 무슨 일인가?”

차준혁의 말이 있자 배정자의 안색이 완전히 바뀌며 화사하게 변했다.

“오늘은 대한무역공사에 볼일이 있어 들르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어떻게 얼굴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나. 이건 팔색조가 따로 없군.’

차준혁은 배정자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돌아가라. 그대가 부귀영달을 위해 나라를 버리고 일본인이 된 것은 개인의 일이니 더 추궁하지는 앉겠지만 이곳은 그대 같은 매국노에게 팔 물건도 살 물건도 없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