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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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설명을 다 들은 차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러시아가 벌인 일로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처음에는 북경주재 러시아공사가 강력하게 러시아가 벌인 일이 아니라고 부인했었으나 강력한부정이 오히려 더 큰 의혹을 양산하자 얼마 전부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요. 러시아로서는 일본과의 종전협상도 결렬된 마당인데 구태여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까지는 없었겠지요.”

“맞습니다. 이곳 북경외교가에서는 러시아도 자국사정이 어렵기는 하나 일본이 전비문제로 아주 곤욕을 치루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고 있습니다.”

“하긴 지금 더 급한 것은 일본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밖이 잠시 소란스러워지자 오장경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오장경은 황당한 표정을 하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전하께서 오신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문 앞에 이토 사타코라는 일본여인이 전하를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차준혁은 깜짝 놀랐다.

“무어라고요? 이토 사다코?”

“그렇습니다. 소신(小臣)이 전하께서 지금 바쁘시니 돌아가라고 하자 무작정 전하를 배알해야겠다고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습니다.”

차준혁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정말 대책 없는 여자로군.”

“아시는 분입니까?”

“그녀가 바로 배정자입니다.”

차준혁의 말에 정화영이 깜짝 놀랐다.

“예? 배정자라면 국가기밀을 누설한 죄로 절영도에 귀양을 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배정자가 어떻게 여기에 온 것입니까?”

“부산수복작전당시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귀양지를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상해에서의 만남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정화영이 화가나 얼굴까지 붉히며 소리쳤다.

“저런 매국노 계집년이 다 있습니까. 아무리 밀정이라지만 어떻게 나라를 버릴 수가 있습니까?”

“개인의 부귀영달을 위해서는 나라라도 서슴없이 파는 것이 친일파속성인데 배정자라고 별다르겠습니까? 오히려 연좌제에 따라 노비가 되었던 전력 때문에 피해의식이 많았던 여자라 변절이 더 쉬웠겠지요.”

“그래도 나라를 버리는 짓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화영이 화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던 오장경이 차준혁에게 다시 물어왔다.

“전하, 어떻게 하면 좋겠사옵니까?”

“오늘은 먼 여정이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라고 하십시오.”

“예, 전하.”

 배정자는 판임관 오장경이 비록 정중하기는 하나 비웃는 표정이 역력한 모습을 하며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고 하자 이번에는 두 말없이 발을 돌렸다.

그러고는 동행한 일본군장교에게 몇 마디 지시를 하고는 타고 온 마차에 올라 돌아갔다. 

배정자의 지시를 받은 일본군장교는 배정자와 동행하지 않고 몇 명의 부하들을 불러 제2공관을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숨어서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바로 오장경의 눈에 띄었다. 오장경은 일본군이 제2공관을 감시하기 위해 병력이 배치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와 차준혁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정화영이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군이 공관을 노골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배정자가 뭔가 낌새를 눈치 채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상해에 간 것부터 배정자가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 온 모양입니다.”

“내일 경친왕부를 방문하시는 일에 차질이 없겠습니까?”

정화영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차준혁은 크게 마음 쓰지 않는 표정을 했다.

“마이어상사에서 들은 말로는 일본이 아직까지는 경친왕과 따로 특별한 교류가 없다고 하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저와 동료들이 내일 저들의 시선을 차단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내일 제가 전하로 변장하여 마차를 타고 북경에서 백리(40km)떨어진 천수산기슭에 있는 명나라 황제가 묻혀있는 명십삼릉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전하께선 그 틈을 이용해 변복을 하고 경친왕부를 다녀오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차준혁이 생각하니 좋은 방법이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내일 일찍 움직여주십시오. 과인은 때를 봐서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예, 전하.”

다음날이 되자 의친왕으로 분장한 정화영이 먼저 마차를 타고 관사를 나와 명십삼릉을 찾았다. 정화영이 마차를 타고 공관을 나서자 감시를 하고 있던 일본군이 뒤를 따랐다.

배정자는 감시를 담당하던 일본군장교로부터 의친왕(실제는 정화영이지만)이 명십삼릉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의친왕이 명십삼릉을 관람하러 갔다고요?”

“그렇습니다.”

배정자는 그것 보라며 코웃음을 쳤다.

“흥! 의친왕도 고고한 척 하더니 결국 냄새나는 유생에 불과하군.”

보고를 하던 일본군장교가 의아해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선에서 공부깨나 했다는 유학자들은 망한지 수백 년이나 지난 명나라를 아직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군장교는 말도 안 된다며 다시 질문을 했다.

“명나라가 망한지 얼만데 조선의 유학자들이 뭐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합니까?”

배정자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설명해주었다.

“400년 전의 일어났던 문록·경장의역(文祿·慶長の役. 일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지칭하는 용어로 역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대국이 소국을 손바줬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때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조선을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서 나라를 지켜줬다면서 이런 상국(上國)은 영원히 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조선의 유학자들입니다.”

일본군장교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 그래서 의친왕이 북경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명나라 황제의 능을 찾은 것이군요.”

“그러니 조선이 태생부터 소국이란 말을 듣는 것입니다.”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짓을 하는 군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친왕이란 자가 스스로 속국을 자처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대일본제국의 친왕전하들이라면 아예 시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조선민족은 식민지 근성이 다분한 어쩔 수없는 족속들입니다.”

배정자는 일본군장교가 이렇게 한민족을 폄하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귀관께서는 부하들에게 의친왕을 보다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일본군장교가 나가자 배정자는 자신이 한 말에 도취되어 중얼거리며 스스로 다짐했다.

“내가 아버님의 덕분에 일본인이 된 것이 정말 다행한 일이다. 우리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일에 꼭 일조를 해서 지금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아 내고야 말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은 먹이를 앞에 둔 잔혹한 뱀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화영이 명십삼릉으로 가기 위해 제2공관의 정문을 나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장경의 안내를 받은 차준혁이 청국고유복장으로 변복하고는 제2공관 후문을 나섰다. 

판임관 오장경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변복을 했다고는 하나 마차도 없이 걸어가는 차준혁을 보고는 송구해하며 안절부절 했다.

“전하, 마차를 따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경친왕부까지는 거리가 상당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걷는 것이 북경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을 하며 차준혁이 경호요원과 함께 걸음을 옮기자 오장경은 미안한 마음에 허리를 더욱 굽히며 앞서서 안내했고 그런 그들의 뒤를 상해에서 동행한 비서실직원이 서류뭉치를 들고 따랐다.

동교민항 일대는 외교가라 차준혁이 걷은 발걸음 주변은 전부 각국 고유전통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런 건물들을 둘러보며 한 참을 걸은 끝에 차준혁은 십찰해(什刹海)지역에 도착했다.

10개의 사찰이 있다 해서 십찰해(什刹海)로 불리는 지역은 경친왕부를 비롯한 청국주요관리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한성으로 치면 북촌과 같은 곳이다.

십찰해는 청국고관들이 모여 사는 지역답게 고대광실들이 처마에 처마를 맞대고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이 저택들은 모두 사합원(四合院)형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사합원은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직사각형의 대지에 사방으로 담장으로 둘러진 형태이다.

사합원은 처음 전원(前園)이 있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야 내원인 중정(中庭)이 나온다. 그 중정 중앙에 정방(正房)이라고 하는 집주인이 거주하는 건물과 그 뒤로 다시 여자들만이 거주하는 후원(後園)으로 되어 있는 눈목(目)자 형태로 되어있다. 

정문은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 치우쳐있고 정문을 들어가 다시 또 문을 통과해야만 전원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방은 담장과 같이 늘어서 있으면서 담장 바깥쪽으로는 창문을 내지 않아 외부와 집안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것이 사합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십찰해에서도 큰 저택들은 대개가 왕부였으며 이러한 왕부도 크기만 다를 뿐 전부 사합원의 구조로 건설되어 있었으나 그 넓이는 상상이상이었다.

차준혁이 방문하는 경친 왕부는 서태후 집권 초기 최고 권력자였던 공친왕이 살던 공친 왕부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차준혁은 모든 것이 붉게 칠해진 화려한 공친왕부정문을 바라보며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친 왕부는 본래 건륭제시절 탐관으로 아주 유명했던 화신이 살던 저택이었다. 

‘희한하게도 청국에서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한 역대 탐관의 집이 서로마주보고 서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잠시 차준혁이 공친 왕부와 경친 왕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잠시 서있자 그를 안내하고 있던 오장경이 옆에서 독촉했다.

“전하. 이만 왕부로 드시지요. 혹 접견시간이 늦어질까 소인 걱정됩니다.”

오장경의 말에 차준혁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과인이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다.”

차준혁이 이렇게 말하자 오장경이 서둘러 경친 왕부로 다가갔다. 차준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마치 결전에 임하는 장수의 심정으로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경친왕부로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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