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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회: 4권-1화 무르익는 전운(戰雲) --> (10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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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경이 경친왕부정문으로 먼저 가서 신분을 증명할 서류 등을 제출하며 경비대와 대화를 나누고는 차준혁에게로 돌아왔다.

“경친왕과 직례총독 원세개가 전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들어갑시다.”

“신이 모시겠습니다.”

왕부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차준혁이 다가가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정문을 들어서서 전원(前園)을 지나 중문인 수화문을 지나자 넓은 면적의 내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경친왕부 내원은 만청제일의 탐관으로 유명한 사람의 집치고는 화려하기는 보다 오히려 담백하다고 느낄 정도로 소박했다.

‘만청제일의 탐관이라고 하던데 의외로 왕부는 소박하게 꾸미고 사는구나.’

하지만 왕부답게 내원의 넓이는 상당히 넓었다.

차준혁이 내원을 가로질러가자 정문에서 이미 통보가 되었는지 왕부에 소속된 관원이 전각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대한제국 의친왕께서 들었사옵니다.~~”

그러면서 관원이 문을 열며 정중하였지만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경친왕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청국관원의 인사가 비록 정중했으나 일국의 친왕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기에 오장경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차준혁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고맙소.”

차준혁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경친왕과 원세개가 통역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경친왕은 그렇다고 해도 원세개조차도 차준혁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도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인사를 먼저 한 것은 경친왕이었으나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였다.

“어서 오시오.”

차준혁은 같은 친왕인데도 마치 속국의 왕족 대하듯 앉아서 거만하게 인사하는 경친왕의 태도가 고깝기는 했으나 면담을 요청한 것은 자신이었기에 더 이상 그의 태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과인은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李堈)이라고 합니다.”

차준혁이 허리도 숙이지도 않고 목례만 하면서 당당하게 인사하자 경친왕의 얼굴에는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경친왕의 옆자리에 있던 원세개가 일어나지도 않고 인사했다.

“어서 오시오.”

같은 친왕이며 나이가 70인 경친왕은 그렇다고 해도 40대 후반의 원세개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모습에 차준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

“청국은 손님을 앉아서 맞이하나 봅니다.”

오장경은 차준혁의 말을 곧바로 통역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오랜 한국생활로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 원세개가 그제야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내가 의친왕 전하께 결례를 했나 봅니다.”

원세개가 웃음을 지었지만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경직되며 어색해졌으나 경친왕이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었다.

“원 총독이 결례를 사과를 했으니 한국의 의친왕께서 혹 불편한 심정이 있더라도 그만 풀기 바라오.”

경친왕이 나서자 차준혁도 더 이상 꽁하게 있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과인이 혈기방장(血氣方壯)하여 아직 사리분멸을 재대로 못합니다.”

그러면서 경친왕에게 고개를 숙이자 원세개가 호탕하게 웃으며 중국인 특유의 인사법인 두 손을 모아 쥐고는 흔들었다. 

“하하! 이러면 본 총독이 더 미안해집니다. 전하께 결례한 것을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임오군란 때 병력을 파병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후 청국조정에서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조선총독과 같은 직위에 오르면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던 원세개가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자 의친왕도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같이 인사했다. 

협상을 하기 위해 방문한 자리에서 상대편이 일부러 깔아놓은 자리를 조금의 언짢은 감정 때문에 구태여 박찰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가 노회한 정객인 원세개의 말 몇 마디로 반전되었고 차준혁이 손님이 앉는 의자에 앉자마자 경친왕이 예의는 생략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의친왕께서 과인을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왕이 방문했다면 의례히 황제의 안부를 먼저 물어야 하는데 경친왕이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나오자 대한제국을 얕본다는 생각에 차준혁은 내심 불쾌했다. 

하지만 차준혁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양국 간의 영토와 국경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국경문제가 나오자 원세개가 바로 나섰다.

“간도문제를 말하는 것이오?”

“간도도 물론 협상에 포함되어 있소이다.”

“간도야 지난해 맺은 변계선후장정(邊界善後章程)으로 일단 도문강(圖們江 두만강상류를 청국이 지칭하는 이름)을 경계로 각자의 국경으로 삼자고 약정했는데 이제 또다시 국경협상을 하자는 말이오?”

“도문강의 경계야 귀국의 요청으로 맺어진 임시 약정이고 본국은 백두산정계비에 나온 바대로 토문강(土們江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송화강 상류)을 경계로 정식 국경조약을 채결하려는 것이오.”

원세개는 두 손을 내저으며 질렸다는 듯 고개까지 흔들었다.

“그 문제는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 십년이 넘는 동안 똑 같은 소리를 수십 번 듣는 것도 이젠 질렸소이다.”

원세개가 이렇게 질색을 하는 까닭은 그가 간도문제를 전담하며 몇 년간 대한제국과 협상을 주도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을 다시 말해도 진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 법이오.”

차준혁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오자 원세개는 국경협상을 하면서 갖은 협박에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던 대한제국관리들을 떠올리면서 질린 표정을 짓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차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끼리 영토를 갖고 다투면 뭐합니까. 간도는 물론이고 만주도 이제는 청국 땅도 한국 땅도 아닌 것을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경친왕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의친왕은 말을 삼가시오. 만주가 우리 대청국의 본향인 것을 모르시오?”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만주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러시아가 강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동청철도부설과 남만주철도부설 때문에 관리병력이 파견되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러시아가 귀국에 조차한 여순에 극동총독부까지 설치하면서 러시아영토로 공표했음에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난 이년동안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은 중립을 표방하면서 전혀 개입을 못하고 있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차준혁이 신랄한 비판을 하자 경친왕과 원세개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했지만 아무런 반박도 못했다. 통역을 하던 오장경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비비면서 마른 침만 연신 삼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분이 가라앉도록 잠시 시간을 준 차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과인은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만일 두 나라 중 누구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만주에서 그대로 철군을 하겠습니까? 과인이 보기에 지난 1896년 동청철도부설권과 지난 1900년 북청사변 때부터 만주를 강점하고 있는 러시아도 그렇지만 이번에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전쟁을 치루고 있는 일본도 마찬가지로 양국 중 누가 이기더라도 이 기회에 아예 만주를 집어 삼키려고 할 것입니다.”

“음!~~”

차준혁의 정확한 지적에 경친왕은 신음을 내뱉으며 아무 반박도 못하고는 청국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를 바라봤다. 

경친왕의 시선을 받으며 원세개가 입을 열었다.

“의친왕께서 그 문제를 상기시키려고 일부러 북경까지 방문 한 것은 아닐 터이고 우리를 만나자고 하는 본래의 목적을 듣고 싶소이다.”

“그전에 먼저 총독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사실대로 대답해 주실 수 있겠소?”

원세개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말씀해 보시오.”

“지금 청국의 군사력으로 러시아와 일본을 상대할 수 있다고 보시오?”

원세개는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바로 대답했다.

“지난 북청사변 이후 서양의 견제를 받고 있는 본국으로서는 솔직히 우리가 양국과 직접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렵소. 더구나 지금 우리 신건육군의 교관들이 대부분 일본군장교들이라 더더욱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힘든 상황이오.”

“그렇다면 만주를 이대로 저들의 손에 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할 것이오?”

“후!~ 지금으로선 솔직히 외교적으로 풀어가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책이 없소.”

원세개가 솔직히 대답하자 수석군기대신으로 청국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경친왕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실내 분위기는 더 할 수 없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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