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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소. 내 원 총독 때문에 잠시 동안은 참겠소.”
그러면서 차준혁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의친왕, 지금까지는 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예로써 대했지만 만일 과인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조금 전의 말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차준혁은 경친왕의 경고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 심려를 드려 송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하지만 과인의 말을 들어보면 조금 전의 제안이 양국에게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닐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말해보시오.”
경친왕이 차갑게 말했으나 차준혁은 차분하게 설명이 시작됐다.
“청국은 그동안 러시아와 수백 년간 영토문제로 늘 다퉈오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양국의 국력이 균형을 이뤘거나 청국의 국력이 강대해서 러시아의 도발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근래 들어 청국이 러시아의 힘에 밀리면서 몇 십 년 사이 수많은 영토를 러시아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있는 사실을 말하자 경친왕은 물론이고 원세개도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반응을 슬쩍 확인한 차준혁의 설명은 이어졌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로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빼앗낀 것은 물론이고 틈만 나면 대륙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만주를 넘보기 위해 러시아와 대대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차준혁의 차분한 설명에 경친왕은 언제 격노했는지 모를 정도로 깊게 빨려 들어갔다.
“우리 대한제국은 그동안 누구도 모르게 군사력을 비축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군사력으로 일본을 한반도에서 단번에 몰아냈으며 또 러시아함대를 격멸한 일본연합함대까지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흠!~~”
차준혁은 경친왕의 자신의 말에 서서히 빨려드는 것을 느끼며 말을 더욱 신중하게 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지금 만주는 십여 년 전부터 러시아가 철도건설을 구실로 거의 점령을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일본이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일본은 러시아와 같이 만주를 그대로 점령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승리한다고 해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점령지를 넓히려고 청국을 더 강하게 압박을 해 올 것은 자명합니다.”
차준혁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경친왕은 물론이고 원세게도 계속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
“안타깝지만 청국은 그런 양국을 몰아낼 군사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또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서양제국의 견제로 쉽사리 군사를 움직이기도 힘든 것 또한 현실입니다.”
이 말을 듣자 원세개가 드디어 나섰다.
“그렇다면 귀국이 나서서 양군을 몰아내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원세개가 고개를 저었다.
“귀국이 설령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냈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이라야 1~2개 사단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군대를 몰아낸 군사력으로 어떻게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한 양국군대를 만주에서 몰아낸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본관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병력차이 때문에 그렇다면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본국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병력을 확충하고 있어서 곧 저들과 대등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과 러시아군을 합치면 거의 오십 만에 육박하는 대군입니다. 아무리 귀국에서 병력을 확충한다고 하더라도 양국을 모두 상대한다는 것은 귀국의 인구로 봐서 거의 어려울 것입니다.”
원세개가 계속 부정적인 말을 하였지만 차준혁은 그를 계속 설득했다.
“조금 전 총독께서 귀국과 본국의 관계가 순망치한이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양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사 이래로 늘 견제와 협력을 해온 관계입니다. 그래서 과인이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경친왕이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귀국이 두 나라를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어차피 만주는 이대로 간다면 청국이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두 나라 중 한 나라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순망치한의 나라인 우리 대한제국에게 넘기는 것이 청국으로서는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경친왕과 원세개의 머리에서 동시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그러나 두 사람은 차준혁의 이어진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청국에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치 속을 들킨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지자 차준혁은 내심 코웃음 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대한제국의 힘으로 일본과 러시아를 몰아낸다면 그야말로 이이제이의 전략이 가장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제국이 양국군을 만주에서 몰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청국의 입장에서는 지금보다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제국이 양국군을 몰아낸 후 만주를 얻게 된다면 청국으로서도 일본이나 러시아에 만주를 강제로 빼앗기는 것보다 훨씬 득이 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청국이 무슨 이득이 있겠소.”
“대청제국과 우리 대한제국 양국은 300여 년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나리입니다. 그런 양국의 관계로 봐서 러시아와 일본보다 훨씬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구태여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차준혁의 설명에 경친왕이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력은 병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데 귀국이 설사 병력을 충원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장시킬 무기는 구하지 못할 것 아니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오장경은 준비한 사진을 차준혁에게 넘겨주었고 차준혁은 그 사진을 경친왕에게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진을 받아든 경친왕이 의아해했다.
“이게 뭐요?”
“우리 대한제국이 이번에 한반도를 수복하면서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들입니다.”
경친왕과 원세개가 사진을 넘기자 사진에는 엄청난 군사무기들이 쌓여있는 것이 찍혀있었다.
경친왕이 놀란 표정을 하며 질문했다.
“이게 모두 얼마나 되는 것이오?”
차준혁은 부풀려서 설명했다.
“지금까지 노획한 무기는 10만 명의 대군을 당장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준비한 군사무기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경친왕의 머리가 그제야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는 노회한 정치가였다.
“알았소. 일단 귀국의 제안은 잘 들었으니 오늘을 그만 돌아가시고 내일 다시 찾아주시도록 하시오.”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경친왕이 다시 찾아달라는 말은 반승낙이나 다름없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협상을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차준혁은 두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경친왕과 인사를 나누고 전각을 나설 때 원세개가 따라 나왔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흠! 흠!”
원세개가 말을 못하고 헛기침을 내 뱉자 차준혁이 웃으면서 다시 물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과인이 충분히 검토하겠습니다.”
원세개는 주변을 둘러본 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친왕 전하께서는 재물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순간 차준혁은 내심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넉넉히 준비하면 협상이 성사되겠습니까?”
원세개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본관이 이런 말을 했다는 말이 새나갈 수 있으니 조심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함정이 참 좋던데·········”
원세개가 이렇게 말을 은근히 끌며 눈치를 살피자 차준혁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고 이놈아 어차피 그건 너에게 주려고 가져온 미끼였다.’
청국은 청일전쟁 때 당시로는 최신예함정으로 구성된 북양함대(정원(定遠) ·진원(鎭遠) 등 갑철포탑함(甲鐵砲塔艦) 4척을 비롯한 수십 척으로 구성된 당시로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태후의 군사비전횡으로 포탄조차 제대로 적재하지 못하고 청일전쟁에 참전했다 해군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일본연합함대에게 표적지가 되어 전멸 한 후 10년 넘게 변변한 함대조차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