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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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밀정침투는 전부 야간에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의 침투가 아무리 은밀하다고는 하나 반드시 압록강을 넘어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간관측 장비를 미리 배치해 놓고 있는 대한제국군의 경계망을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군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도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눈을 피하는 방식이었지 밤에 동작과 인체의 열에 의해 감지되는 장치가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일본군의 남파는 넘어오는 순간 죽음이었다. 더구나 겨울의 경우 압록강이 얼어 있던 탓에 일본군의 도강움직임은 너무도 관측이 잘 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는 일본군지휘관들이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면서 원인을 분석하느라 설왕설래 하고 있을 때 총사령관 오야마가 그에 대한 대화가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을 제지했다.

“모든 지휘관들은 지난 10월 조선이 적도들에게 넘어갔을 때 대본영이 내렸던 명령을 상기하시오. 지금 우리가 먼저 섬멸할 적은 하얼빈에 주둔해 있는 러시아극동군이지 조선반도의 적도가 아니란 것을 반드시 명심해 주셨으면 하오.”

오야마 원수는 물론이고 일본군의 모든 지휘관들은 대한제국정규군이 한반도를 수복했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러시아군을 등에 업은 일부대한제국군이나 의병과 같은 봉기세력에 의한 것이라 애써 낮춰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들의 영토를 불법세력에게 빼앗겼다는 듯 적도라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쓰고 있었다.

노기 대장은 조금 전 개전시기를 앞당기자고 주장할 때처럼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이번에는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만주일본군지휘관들은 그동안 한반도가 수복된 후 수십 차례 한반도에 대한 문제로 격론을 벌였었다. 이 격론에서 강경파를 항상 대표한 노기 대장은 만주를 포기하고라도 대륙진출의 근간을 위해서라도 한반도로 먼저 진군하여 적도들을 수습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강경파의 남진 주장은 대본영이 두 가지를 거부 이유로 들면서 한반도상황을 당분간 무시하고 만주를 먼저 도모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유는 첫째 봉천에 주둔중인 병력 중 일부를 한반도로 파병할 때의 문제였다. 대본영에서는 한반도를 1개 정규사단이 지켜내지 못했으니 만일 한반도로 파병을 할 경우 만주의 5군 중 적어도 1개 군 병력이상인 5~8만 명 이상을 파병해야 수습할 수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병력분산으로 인해 러시아군과의 군사적 균형이 일시적으로 무너지게 되는 점을 우려했다. 만일 병력이 분산 된 것을 틈타 러시아군이 공격해온다면 절반도 안 되는 남은 병력만으로는 러시아군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을 했던 것이다.

둘째로 전 병력을 한반도로 돌리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만일에 전 병력을 동원해서 한반도를 빨리 제압하지 못한다면 이는 러시아군의 남진을 불러오게 되고 이렇게 되면 앞뒤로 적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어 일본군으로서는 첫 번보다 더 불리해 진다고 예상하였고 설사 한반도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이는 일본군의 한반도고립을 초래해 수많은 병력과 전비를 투입하고도 만주로의 진출을 실패해서 결과는 패전이나 다름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대본영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만주를 먼저 도모하는 것이 병력충원이 힘든 현재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란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대본영이 러시아군을 먼저 상대하기로 한 근본바탕에는 개항이후 수십 년간의 직·간접의 간섭으로 대한제국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 오야마의 제지가 있자 3군 사령관 노기  대장도 한반도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도 다른 일본군지휘관들과 같이 한반도는 언제라도 공략할 수 있다는 무모할 정도의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족오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대한제국의 형편으로 봐서는 일본지휘관들의 판단이 정확한 것이기도 했다.

이날의 작전회의는 총참모장 고마다의 새로운 전술 덕분에 근래 드물게 화기해애하게 끝이 났다.

 일본군이 이렇게 작전회의를 열고 있을 때 러시아군도 막연하게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상(陸軍相) 쿠로파트킨 대장이 극동군총사령관이 되어 육전을 총지휘했다.

쿠로파트킨은 그의 성품대로 아주 소극적으로 병력을 지휘하여 연전연패하면서 봉천까지 물러났다.

쿠로파트킨은 후일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대륙에서 싸워보지 못한 일본군을 보급이 힘든 내륙 깊숙이 끌어들여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적당한 시기 철수를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술은 나폴레옹과의 전쟁 때부터 러시아군의 즐겨 쓰던 전술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 전술로 본국과 거리가 멀었던 만주에서의 전투는 막대한 전비를 쏟아 넣게 만들었고 거듭된 퇴각으로 인해 일본군의 사기만 높여주는 등의 부정적인 문제점이 더 많았다.

더구나 각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남만주지역 대부분을 일본에 넘겨주면서 봉천까지 밀린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전략은 끝내 수정되지 않은 채 1905년 2월 20일부터 20일간 치러진 봉천전투에서도 러시아는 소극적인 대응전략을 그대로 사용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봉천전투에서는 특히 전선의 우익을 담당하던 오쿠 대장이 지휘하던 일본군제2군이 며칠간의 소모전으로 일시적인 탄약보유량이 바닥을 보였을 때 러시아극동군군이 방어를 포기하고 공세만 취했다면 전황을 단 숨에 바꾸면서 대승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너무도 이상하게 패전의 귀신에 씌었는지 방어로만 일관했다.

러시아군에게 가장 큰 문제는 병력자원의 질적인 문제였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과의 전쟁이 이미 예고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극동군의 군사력보강에 있어서 유럽에 비해 아주 차별적이었다. 러시아는 충분히 훈련된 정예부대를 유럽의 국경선에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음에도 단지 처음으로 실시되는 징병제로 입대한 일반 농민들을 극동으로 파병했던 것이다. 이런 부실한 자원으로 구성된 부대의 전투능력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봉천전투의 막바지 때 전황이 확실히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쿠로파트킨 사령관은 또다시 이전 전투에서와 같이 무리하게 후퇴를 지시했다.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밀리던 러시아군은 방어선이 급속히 무너지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게 되었다.

쿠로파트킨 대장은 이에 대한 책임으로 전투 중 총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극동군1군사령관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감수하다 결국 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되었다. 

쿠로파트킨의 후임으로 극동군총사령관이 된 사람은 극동군1군사령관이었던 리네비치(Linievitch) 대장이다. 극동군총사령관이 된 리네비치 대장은 전임 총사령관 쿠로파트킨 대장의 지시로 이미 병력이 봉천에서 철수하고 있는 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는 하얼빈으로 병력을 그대로 철수했다.

일본은 이 봉천전투에서 군사력은 물론 남아있던 전시물자까지 모조리 소진했다.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던 일본군은 하얼빈의 러시아군을 계속해서 밀어붙이지 못하고 봉천에 그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전의 역사에서는 이어서 벌어진 동해해전에서 도고의 연합함대가 러시아발트함대를 격멸시키면서 양국은 미국의 중재로 본격적인 종전협상을 벌이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삼족오군이 절묘한 시기에 개입하면서 러시아함대는 물론 연합함대까지 실종되자 지금까지의 기득권상실을 우려한 일본은 몇 개월간 총력을 기울이며 연합함대수색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미국의 중재로 양국이 종전협상에 들어갔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반영한 협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연합함대가 실종된 것을 알게 된 러시아가 거꾸로 일본에게 항복을 주장하는 등의 강력한 요구조건을 내 새우며 협상을 주도하자 종전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만 것이다.

협상결렬 이후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남은 지상병력으로 러시아군과 마지막결전을 벌여야 했기에 모든 국력을 집중시켜 군수물자생산에 목을 매었다.

다행인 것은 미국의 은밀한 원조로 부족한 전비를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공들인 한반도가 자신들의 손을 벗어나 육상수송이 불가능해졌을 때 배정자의 대 활약으로 외국상선을 임대해 해상수송이 다시 시작되면서 군수물자수송에 한시름을 덜고 있었다.

이후 일본은 임대한 외국국적수송선으로 지난겨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군수물자를 만주로 보내 총탄 등 부족한 군수물자부족을 해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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