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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이란 뜻을 가진 하얼빈은 본래 아주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이 하얼빈이 발전하게 된 것은 시베리아철도의 만주통과노선인 동청철도(東淸鐵道)와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부설된 남만주철도(南滿州鐵道)가 러시아에 의해 건설되면서부터 급속도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걸린 철도건설과 그동안 도시가 러시아영향권아래 있었던 탓에 1906년의 하얼빈은 비록 청국영토이기는 하나 역 주변을 비롯한 도시의 중심부는 전부 러시아양식의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는 이국적인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4월에 들어서자 봉천의 일본군이 대규모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러시아극동군사령부로 접수되었다. 극동군총사령관 리네비치 대장은 곧바로 극동군전체회의를 소집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극동총독 알렉세예프 대장도 하얼빈으로 불렀다.
러시아는 1902년 8월 만주점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순 항에 극동총독부를 설치했었으나 여순 항이 함락되자 총독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했다.
리네비치 대장의 연락을 받은 극동총독 알렉세예프 대장은 극동군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청철도를 이용해 밤새특별열차를 타고 회의당일 아침 하얼빈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총독각하.”
“반갑소. 총사령관.”
하얼빈에는 청국에게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철도를 부설하면서 도시개발도 같이 시작해 러시아가 건설해 놓은 건물이 많았고 지금 극동군사령부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도 그 중 하나였다.
하얼빈은 이렇게 블라디보스토크와 같이 러시아극동군에게는 심장과도 같은 지역이라 생면부지 봉천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보다는 비교적 편안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총사령관 리네비치 대장과는 이미 극동군1군사령관시절부터 안면이 많은 알렉세예프 총독은 총사령관의 집무실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송구합니다.”
“별 말씀을 다하시오.”
계급이 같은 대장이기는 하나 알렉세예프는 극동지역을 통치하는 총독이라 리네비치 대장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리네비치 대장이 회의 주제에 대해 설명했다.
“일본이 총공세를 벌이려는 첩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어 총독각하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 첩보보고는 받았는데 상황이 심각한 모양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파악한 정보로는 해동이 되고 땅이 굳어지고 나면 저들이 도발을 할 공산이 아주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달 하순정도에 일본군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겠군.”
“우리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가시지요.”
“알겠소.”
잠시 후 두 사람은 이십여 명의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에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지휘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극동군총사령관 리네비치 대장은 극동총독 알렉세예프를 배려하여 자신과 같이 자리배치를 했고 그런 배려에 알렉세예프 총독은 당연하다는 듯 지정된 자리에 가서앉았다.
알렉세예프총독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본 리네비치 대장이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회의를 주제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다름 아니라 일본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오. 이에 대한 설명은 그동안 적정을 전담하여 살피고 있던 3군사령관 카울바르스(Kaulbars) 대장이 직접 하겠소.”
리네비치 총사령관이 말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지적을 받은 카울바르스 대장이 설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사령관이라는 최고지휘관이 참모를 뒤로하고 직접 설명을 하는 것은 별로 없었던 일로 그만큼 러시아극동군도 일본과의 전투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카울바르스 대장은 뒷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만주일대의 대형작전지도를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3군은 그동안 일본군의 동태파악을 위해 정찰수색에 뛰어난 카자크기병대를 지속적으로 정찰 보내면서 일본군 동태를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년 동안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일본군이 3월 하순부터 드디어 부대를 움직이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여기 지도를 봐주십시오.”
그러면서 카울바르스 대장이 지시봉으로 지도를 짚어 갔다. 그가 짚은 곳은 노기 대장의 일본군3군이 주둔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일본군3군이 지난 3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병력을 추스르며 각 사단 별로 실시하던 훈련을 이곳의 평원지대에서 통합방식으로 훈련을 전면 개편하여 실시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척후부대에 의해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카울바르스는 손짓으로 수십 장의 사진을 지휘관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아울러 일본군의 1·2·4군은 물론 후방지원군도 본격적으로 통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여순 항으로 들어오는 군수물자가 4월 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을 종합해 보면 적의 공세가 곧 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카울바르스 대장이 길지는 않지만 지도와 사진 등으로 된 설명을 하자 지휘관들은 2년간 일본과 전투를 벌여온 지휘관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극동총독 알렉세예프 대장이었다.
“카울바르스 대장께서 직접 설명을 하시니 본관은 아주 영광이오이다.”
알렉세예프의 치사에 카울바르스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리네비치 총사령관.”
“예, 총독각하.”
“우리 극동군의 훈련 상황은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소?”
“물론입니다. 그동안의 전투를 직접 경험했고 거기다 1년간 하얼빈에 주둔하면서 쉼 없이 훈련을 받아서 이제는 최고 정예부대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데로 군수물자보급이 너무 지연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리네비치 대장의 지적대로 러시아극동군은 2년 전에 신청한 겨울외투가 이번겨울에 도착할 정도로 여전히 고질적인 군수물자보급지연에 시달리고 있었다. 군수물자보급문제가 나오자 알렉세예프 총독의 안색이 크게 어두워졌다.
“정말 보급만큼은 해결할 방안이 없어 문제요.”
“이번에 일본과 벌일 전투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전투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서라도 전시물자는 충분히 보급될 수 있도록 총독각하께서 차르께 직접 청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이번 결전에 극동군의 사활은 물론 이곳 극동의 운명이 좌우 될 것이란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차르께 상황을 보고 드려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 보도록 노력하겠소. 하지만 본국정정이 극도로 불안해져서 전폭적인 지원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본국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작년 초에 벌어졌던 피의 일요일의 시위를 주도했던 가폰신부가 얼마 전 사회혁명당원들에게 암살되었다고 하오.”
리네비치 대장이 깜짝 놀랐다.
“예? 가폰신부가 암살되었다고요?”
알렉세예프 총독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 그렇소.”
“그렇다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소요사태가 더욱 확산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소요가 내각의 적극적인 대처로 그나마 반정부시위로까지는 번지지는 않고 있었는데 가폰신부의 암살로 시위행태가 자칫 변하게 되지 않을까 페테르부르크가 초긴장상태라고 하오. 그런 상태이니 너무 큰 지원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오.”
리네비치 대장은 충분히 상황을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일본과 빈총으로는 싸울 수가 없으니 실탄과 포탄만큼은 충분히 보급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정도는 내 차르께 무릎을 꿇어서라도 얻어내리다.”
총독의 굳은 의지가 보이자 리네비치 대장은 그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각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06년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다른 곳은 대부분 개통을 보았으나 바이칼 호수 횡단노선은 지형적 어려움으로 인해 정식 개통을 하지 못하고 기차를 배에 선적해서 호수를 건너는 주정교(舟艇橋)로 운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배가 전복되는 경우도 있서 화물차와 객차가 그대로 수장이 되는 등 바이칼을 지나는데 아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부패한 관리들의 농간으로 화물이 증발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물자수송에 막대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