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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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데른과 블랑시가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아도 이전 같았으면 바로 끼어들었을 조던이 이번에는 끝내 침묵을 지켰다. 그도 대한제국육군에 대한 의문은 크게 갖고 있었으나 연합함대의 실종이 대한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박충식과의 독대에서 확인한 지금 대한제국군사력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쉽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던을 보고 블랑시가 의아해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조던 공사께서 별말을 안 하십니다.”

블랑시의 지적이 있자 조던은 자신의 속내를 일부 털어 놓았다.

“아, 예! 솔직히 저는 요즘 대한제국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쉽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한반도가 수복된 것은 러시아의 도움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지금 한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대적인 개발 사업은 정말 상상이상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대대적인 도시개발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대규모사업입니다.”

조던의 말이 있자 각국공사들도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엄청나게 빠른 공사속도는 분명 최고의 건축기술자가 지휘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공사속도입니다. 더구나 저는 공사자재로 사용하고 있는 시멘트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철근콘크리트공법이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도입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이런 최신공법들을 벽돌도 얼마 전부터 겨우 쌓기 시작한 한국에서 어떻게 모든 건축물에 쓰이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투성이입니다.”

“그거야 일본이 알려줘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알기로 일본은 절대 건축기술을 한국인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던이 단정 지으며 말하자 누구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날 각국 공사들은 상대편에게 뭔가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모였다가 조던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머릿속에 의문만 가득 갖고 돌아갔다.

의친왕은 이때 군에 자원입대하여 일반 병사들과 같이 훈련소의 훈련을 마치고 다른 사람과 똑 같이 간부교육을 몇 개월 받은 후 다시 육군중장에 복직했다. 의친왕은 처음에는 3년간 초급장교로 복무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친왕이란 신분 때문에 앞으로 평생 군복무를 해야 하니 지난 몇 개월간 보통의 장병들과 똑 같이 군사 훈련받은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박충식의 설득에 결국 고집을 꺾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 몇 개월간 장병들과 함께 생활한 것만으로도 의친왕은 이미 국민들에게 황실을 대표하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박충식은 서운해 하는 의친왕을 새로 설립된 적십자사 초대총재로 임명했다. 그러자 의친왕은 적십자사의 각종 구호활동에 직접 참여했고 국민들은 이런 의친왕을 더욱 더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의친왕은 만주에서 러일 양군이 결투가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자 만주지역을 항공 관측하고 있는 웅비1호에 탑승해 직접 전장을 살펴보기를 원했고 이 시찰에는 박충식의 지시로 차준혁이 동승했다.

두 사람을 태우고 해주에서 이륙한 웅비1호는 두 시간 만에 압록강을 넘었다. 압록강을 넘자 비행선 아래로 펼쳐지는 험준한 지형에 의친왕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험난한 지형이구나. 이전에 사신들이 연경에 갈 때 만주의 이 험난한 지형을 걸어서 넘으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 말이 실감나는구나.”

웅비호를 타고 몇 번 만주를 왕복한 경험이 있는 차준혁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는 만주 벌판이란 말을 하도 들어 그냥 만주는 넓은 벌판으로만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직접 와보니 그게 아니라서 처음엔 무척 놀랐습니다.”

“저 험난한 지형 때문에 과거 우리 선조들이 이 타국 땅을 넘으며 얼마나 많은 고생했겠나.”

의친왕이 조선의 일을 들고 나오자 차준혁은 의친왕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조선시대에는 만주에 오면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전의 만주는 바로 우리 민족의 고토였습니다.”

의친왕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바로 인정했다.

“그래 동생 말이 맞다. 만주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우리의 고토야. 과인이 잠시 실언했어.”

의친왕의 이렇게 바로 사과하자 차준혁이 오히려 미안해졌다.

“아닙니다. 제가 형님전하 앞에서 너무 아는 척하며 나댔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 자네가 이렇게 사과하면 과인이 더 미안해지잖아. 그러니 이제 그런 사과는 하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조종석에 앉아 있던 기장 강운형 대위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두 분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아! 그런가? 고맙네. 기장.”

의친왕은 신군 출신들에게는 별다른 존재였다. 

의친왕으로 인해 쉽게 한반도에 정착할 수 있었고 또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황제의 절대적인 후원과 지지를 얻으며 신군이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것에 대해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고마운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강운형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친왕에게 노정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벌판을 보시려면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앞으로 이십여 분 후면 산악지형이 끝나고 우리에게는 요동(遼東)으로 불리고 있는 요양(遼陽)이 나옵니다.”

의친왕은 요동이라는 말을 듣자 가슴에 무언가 치미는 듯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아! 그런가!”

요동성,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바로 고구려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 바로 요동성이다.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넘으면 만주는 처음 평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백정간의 험준한 산악지형이 먼저 나타난다. 이 산악지형은 위로는 백두산을 너머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아래로는 요동반도 끝까지 연이어있었다. 

만주의 산악지형은 생각보다 험준하다. 

그 중 마운령(摩雲嶺)과 청석령(靑石嶺)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박지원이 북관(北關 함경북도)의 마천령(함경남도와 북도를 가르는 고갯길로 아주 험준함)같이 험하다고 기록할 정도로 아주 험준하다. 

호란(胡亂)이 후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던 봉림대군도 이 험난한 고갯길을 넘기가 너무 힘이 들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시조까지 지을 정도로 험준하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험준한 산악지형을 넘고 나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천이백리 요동벌판이다.

험한 산길을 죽어라고 고생하며 걸어서 넘은 후 비로소 마주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은 고생하며 산을 넘은 사람에게는 장관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벌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요동성의 백탑이었다. 높이가 70미터의 거대한 백탑은 평원에 유일하게 우뚝 서서 먼 여정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조선의 사신들도 죽어라고 험한 산길을 넘어 요동의 백탑이 보이면 그제야 한시름 덜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방에 요동평원이 보입니다.”

강운형 대위가 알려주지 않아도 산악지형만 이어지다 갑자기 눈앞에 뻥 뚫리면서 펼쳐지는 평원에 의친왕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아!~~”

의친왕은 정말 요동벌판 어디에도 보일 정도로 우뚝 솟아 있는 둥근 모양의 탑을 내려다보고서 다시 감탄했다. 

“아! 저것이 요동성의 백탑이구나.”

차준혁이 백탑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두 차례에 걸친 러·일 양국 간 전투에도 저 백탑은 다행히 전화를 입지 않아 이전 모습 그대로라고 합니다.” 

“우리 국군의 정찰대가 요동성까지 나와 있나 보구나?”

“요동성뿐이 아니라 만주전체에 군 정찰대는 물론이고 중정요원들이 요소요소에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아! 그래.”

이 사이 웅비비행선은 요동성 상공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요동성은 러·일 양군의 치열한 교전을 그대로 보여주듯 도심지가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저렇게 무너진 채로 있는 것을 보니 일본군이 아직은 재건을 하지 않고 있구나.”

“남만주가 아직은 자신들의 손에 완전히 들어온 것이 아니라 손을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긴 청국도 우리와 영토조약을 맺은 후부터는 만주는 아예 외면하고 있을 테니 일본이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을 뭐라고 할 것은 없겠지.”

“더구나 이번에 일본이 노골적으로 청국주민들을 만주에서 소개시키고 있어서 재건은 당분간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의친왕은 차준혁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 무언가를 생각한 듯 입을 열었다.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요동성은 과거 고구려선조들의 얼이 서린 곳이잖아. 이번에 우리가 북진에 성공하고 나서 저 요동성을 우리 방식대로 완전히 새롭게 재건을 한다면 상당히 뜻 깊은 일이 되지 않겠어?”  

차준혁이 의친왕의 의견에 적극 동조했다.

“아! 그거 참 좋은 의견입니다.”

“동생도 과인의 의견이 괜찮다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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