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회: 4권-23화 -->
차준혁의 적극적인 동조에 의친왕은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완성된 요동 시내를 그리는 듯 입을 다물고는 뚫어져라 요동성을 내려다봤다.
이러는 사이 비행선은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봉천방향으로 올라갔다. 요동과 봉천은 거리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서 웅비1호는 잠시 후 봉천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상에는 강폭이 상당히 넓은 혼하(渾河)가 끝을 알 수 없이 대평원을 가로 지르고 있었고 그 강 건너에 봉천성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웅비1호는 의친왕을 위해 봉천을 한 바퀴 돌았다.
봉천성(奉天城)은 청조초기 둥근 형태로 세워졌다.
사방이 십리인 원형의 성벽은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 형태가 확연히 들어났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성벽은 전부 벽돌로 쌓았으며 성문은 모두 8곳이었다. 그 성문은 전부 3층 전각으로 되어 있었으며 모두가 옹성으로 둥글게 둘러싸여 있었다.
성을 한 바퀴 둘러보자 특이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성벽 무너진 곳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의친왕이 성벽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다. 봉천전투가 아주 치열했었다고 하던데 요동성과는 다르게 성벽이 별로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어.”
“아마 성벽이 두껍고 견고해서 포격에도 견뎌냈는가 봅니다. 형님전하, 저 화면을 보십시오.”
차준혁이 화면을 가리키자 웅비비행선이 촬영한 화면으로 마침 봉천성의 성벽 중 무너져 내린 곳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러자 성벽두께가 그대로 드러났고 성벽의 두께는 거의 10 미터에 달해보였다.
의친왕이 그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 말이 맞구나. 성벽이 저 정도로 두꺼우니 웬만한 포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겠지. 거기다 벽돌로 축성을 한 것이라 석성보다는 포격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거고 말이야.”
의친왕이 하는 말에는 몇 개월간의 군사교육으로 군사지식이 많이 쌓였다는 것이 그대로 나타났다.
이렇게 두 사람이 바라보는 화면에는 지상의 상황이 생생하게 비춰졌다. 그런데 화면에는 의외로 일본군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의친왕이 다시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봉천은 온통 일본군 천지일거라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 일본군들이 별로 보이지 않네?”
의친왕의 의문을 조종석에 있던 강운형 대위가 대답해주었다.
“봉천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이 전부 장춘지역으로 이동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런가?”
“예, 지금 봉천은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주둔해 있을 뿐입니다.”
“압록강근처에 대규모 방어부대가 있었던 것 하고는 완전 딴 판이로군.”
“압록강방면이야 우리 때문에 방어를 하고 있다지만 이곳까지 누가 쳐들어온다는 것은 아예 예상하지도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만주는 병력이 별로 없다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동안의 정찰로 압록강방어부대와 여순·대련의 해안방어부대를 제외하곤 요동과 봉천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대대규모로 추정되는 봉천수비부대가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군의 북진에 압록강방어선만 돌파하면 철길을 이용해 봉천까지 그대로 돌진할 수가 있겠구나.”
차준혁이 부연설명을 했다.
“우리 군이 요동반도에 해병대를 상륙시킬 계획이니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도강만 성공한다면 형님전하의 말씀대로 남만주는 순식간에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이 러·일 양군이 피터지게 싸워야겠지만 말입니다.”
“일본이 이번 전투에 나라의 사활을 걸고 있으니 우리가 피터지게 싸우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들 스스로가 그렇게 하지 않겠어?”
차준혁은 의친왕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하하! 맞습니다. 러시아도 이번에는 이전의 전투와 달리 물러서지 않을 각오로 달려들 것이니 아마도 양군전투도 상당히 볼만 할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양국이 벌이는 전투를 빨리 보고 싶어지는군.”
“장춘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전투장면을 직접 보시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입니다. 잠시 동안 편한 마음으로 지상을 감상하십시오.”
구경 중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있듯 두 사람은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지상의 전경을 감상하였다.
이렇듯 공중에서 의친왕 등이 유유자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지상에서 직접 교전을 하는 러시아와 일본 양군은 피를 말려가면서 적을 상대하고 있었고 전장(戰場)에서는 야포소리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3군 참모장 이지치 고이스케 소장은 방금 전 총사령부의 전령이 주고 간 명령문을 3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에게 보고했다.
“각하! 총사령부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내용이 뭔가.”
“적의 기병을 제압할 진형구축을 모두 마쳤답니다. 계획대로 아군의 기병을 움직여 러시아군의 기병군단을 직접 자극해 적의 도발을 유도하라는 총사령부명령입니다.”
노기 대장이 이끄는 만주일본군3군은 봉천전투에서와 같이 유격 군의 임무를 맡고 있어서 전황(戰況)에 따라 휘하병력의 긴급 기동을 수시로 전개하고 있었다.
“흠! 다른 명령은 없었는가?”
“제1군의 기병1여단은 물론 각 사단의 기병연대도 전부 작전에 투입시키라는 명령도 함께 내려왔습니다.”
참모장의 보고에 노기는 두 손을 움켜줬다.
“오야마 원수께서 러시아기병을 이번에 완전히 결판을 보시려고 작정하셨군.”
“그렇지 않아도 우리 포병이 러시아군에 계속 밀리고 있어서 전황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나가면서 양군은 서로 총력을 기울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군이 서로 총력전으로 나오자 전투는 예상과 달리 서로가 밀고 또 밀리면서 엄청난 소모전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특히 야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양군의 포병은 엄폐물이 거의 없는 평원에서 정면 맞대결을 벌인 결과 사거리가 조금 더 긴 러시아포병이 일본포병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군의 야전포병은 최대사거리가 4.8㎞이고 최대발사속도가 분당 3발인 1898년 아리사카(有坂) 75밀리 속사포와 최대사거리 4.3㎞인 아리사카 산악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러시아포병이 보유한 대포는 일본군보다 사거리가 길어 최대 5.5㎞까지 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거리의 차이는 산악지형일 경우 포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평원에서의 정면대결에서는 일본포병의 형편없었던 포격실력과 함께 러시아포병에게로 승리를 기울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저울추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이 미국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온 국력을 집중해 전쟁준비를 철저히 했다고는 하나 막대한 물량을 쏟아 부어야 하는 소모전의 양상이 계속되고 포병전력이 밀리자 뒤가 가벼운 일본군으로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대장은 대치상태국면의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러시아기병대에 결정적 타격을 주기 위해 오야마 원수의 결재를 받아 일본군기병병력을 총 동원한 것이다.
노기 대장은 무의식 적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전황을 바꿀 때가 왔어. 지금까지 전투가 일진일퇴로 진행되고 있었으니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어. 참모장은 지금 곧 2기병여단장을 호출하라.”
“예. 각하.”
참모장 이지치 소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기병대 특유의 복장인 빨간 바지에 파란색 상의를 입은 장성 한 명을 대동하고 본부막사로 다시 돌아왔다.
기병여단장은 모래색깔의 일반적인 육군군복이 아닌 근대서양의 영향의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기병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어깨에는 일본육군소장을 나타내는 가늘고 붉은 두 줄이 그어진 황금색견장 위에 왕별이 하나 얹혀 있었다.
일본군장성은 3단계 직제로 가장 낮은 직급이 별이 하나인 소장이다.
이지치 소장을 따라 막사로 들어온 장성은 3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에게 자세를 바로 세웠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어서 오게. 사토 소장.”
정 자세를 취한 장성은 일본인 특유의 키가 작고 몸집도 왜소했지만 눈빛이 아주 날카로운 2기병여단장 사토 이치로(佐藤 一郎) 소장이었다.
“본관이 귀관을 부른 이유는 총사령부명령을 하달하기 위해서다.”
“경청하겠습니다.”
“총사령부에서는 귀관이 지휘하는 2기병여단과 1기병여단은 물론 우리 군의 전 기병대가 합동작전을 펼쳐 계획대로 러시아기병대와 격돌 후 유인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사토 소장은 이미 전투가 벌어지기 전 총참모장인 고다마 대장에게서 기병작전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들었기에 노기 대장의 말에 주저 없이 바로 대답했다.
“작전개시시간은 언제 입니까?”
사토 소장의 질문에 참모장 이지치 소장이 나섰다.
“아직 정확한 시간은 하달되지 않았고 기병병력을 먼저 집결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알겠네.”
노기 대장이 사토 소장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