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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지상을 내려만 보던 의친왕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건 학살이구나. 학살.”
“후!~~”
차준혁도 처음 보는 대학살장면에 질리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심정은 비행선에 승선한 사람 모두 다르지 않았고 영상촬영을 하던 비행선사무장은 일방적인 학살 장면을 그대로 담기에는 너무 참혹했는지 초점을 아주 멀리 잡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매복한 일본군 사이에서 죽어나가는 러시아기병대의 참혹한 장면을 모두 감출 수 없었다.
이날의 전투로 일본군기병대는 절반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러시아기병대는 불과 수백 명의 병력만이 살아 돌아갔을 정도로 대참패를 당했다.
이 한 번의 교전으로 힘의 균형은 일본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수만 명의 기병이 사망했어도 단지 균형이 일본으로 기울어졌을 뿐이지 급격히 전세가 기울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기울어진 전세를 만회하려는 러시아군과 승세를 잡은 기회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일본군은 이전보다 더욱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치열한 격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달 가까이 계속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고 전투는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승세는 차츰 일본군에게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비록 절반밖에 남지 않은 전력이지만 아직은 1만 명가량 남은 일본군기병대 덕분이었다.
일본군기병대는 수백 명밖에 남지 않아 겨우 전령이나 척후병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러시아기병대와 달리 러시아군의 보급로인 동청철도를 수시로 파괴시켜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러시아의 군수물자보급에 결정적 부담을 주게 만들었다.
7월 중순 러시아극동군 총사령관막사에서 극동총독 알렉세예프 대장의 제안으로 총사령관 리네비치 대장과 1·2·3군 사령관들이 긴급회의를 가졌다.
모여든 최고지휘관들의 얼굴은 그동안 계속 밀리고 있는 전황을 그대로 보여주듯 안색들이 모두 어두웠다.
극동총독 알렉세예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각 군 사령관들을 부른 이유는 이대로 계속 전쟁을 지속해나가다가는 극동군이 전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오.”
알렉세예프 총독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네 명의 장군은 모두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알렉세예프 총독이 총사령관을 지명했다.
“리네비치 대장.”
“예, 총독각하.”
“총사령관의 생각은 어떻소?”
리네비치 대장은 총독이 자신을 먼저 지목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질문이 있자 바로 대답했다.
“솔직히 진퇴양난입니다.”
“총사령관의 의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소.”
“지난 한 달 보름간의 전투로 우리 극동군의 십만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더구나 사령관인 파벨 폰 렌넨캄프 소장까지 사망한 기병집단군의 전멸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음!~”
“다행히 포병이 저들보다 우세해 지금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며 서로 수많은 사상자를 보고 있지만 솔직히 비세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제는 양군 중 누군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종전을 할 수도 후퇴를 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계속 소모전이 지속된다면 결국 우리는 병력고갈로 교전을 벌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오.”
“그건 일본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 비록 우리 기병대를 전멸시켰지만 저들도 그동안 십만이 넘는 병력손실을 입고 있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이제 남아있는 가용병력이 십만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무모한 소모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이오?”
“기병대가 없는 우리 극동군으로서는 우세한 포병전력을 활용해서 지금과 같은 국지전을 벌여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리네비치 대장의 주장에 알렉세예프 총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거 참 큰일이로군.”
“본국에 요청한 기병은 정말 지원되지 않는 것입니까?”
“지난번에 전멸한 기병대가 시베리아전역에서 차출된 병력이라서 기병대의 가용병력이 없다는 것을 총사령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렇기는 합니다만. 1개 기병사단만이라도 파견해 주도록 차르께 다시 청원을 넣어 주십시오.”
제2군사령관 그리펜베르그(Grippenberg) 대장이 총사령관 리네비치 대장의 말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총사령관각하의 말씀대로 유럽전선에 있는 1개 코사크기병사단만 있어도 기마술이 떨어지는 일본군기병대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습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 대대적인 교전을 벌일 수 있어 충분히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렉세예프 총독이 한 숨을 내쉬었다.
“후!~ 두 사람의 말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더 이상의 병력지원은 없다는 차르의 확고한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극동총독이라 해도 더 이상 청원을 드릴 수는 없소이다.”
“더 이상의 병력지원은 없고 지금의 병력으로 일본과 끝장을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때 3군사령관 카울바르스가 나섰다.
“차르의 의지가 그렇게 확고하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지금과 같은 소모적인 국지전보다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과 양군 중 누군가가 항복할 때까지 끝장전투를 벌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끝장전투를 벌이자고 했소?”
“그렇습니다. 병력지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자칫 일본군과 마지막 결전도 벌이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일본군과 최후의 일전을 겨루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카울바르스 대장의 제안에 장군들은 한동안 갑론을박 격론을 벌였으나 일선지휘관 4명은 총력전을 벌이자는 측과 지금과 같이 국지전을 계속하며 일본의 힘을 빼자는 측으로 정확히 나뉘었다.
네 명의 사령관들의 주장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한동안 격론만을 주고받자 결국 알렉세예프 총독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카울바르스 대장의 의견대로 끝장전투를 벌이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자 반대의견을 갖고 있던 총사령관 리네비치 대장이 반발하려고 나섰으나 알렉세예프 총독은 손을 들어 리네비치를 제지하고는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다.
“리네비치 대장의 의견대로 시간을 두고 적을 상대하는 것도 좋은 방책이기는 하나 일본도 그렇지만 우리도 계속되는 보급불안에 시달리고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소. 이런 마당에 더 이상의 병력지원이 없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게 된다면 카울바르스 대장의 말대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소.”
리네비치 대장이 기어코 반대의견을 펼쳤다.
“하지만 끝장전투를 벌인다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만일 끝장전투에서 패전하게 되면 자칫 만주전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정 안되면 포기해야겠지.”
알렉세예프의 말에 지휘관들이 모두 놀랐다.
반대를 하던 리네비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주를 포기하다니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북만주는 사수하라는 차르의 명령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결전을 벌이고 패한다며 깨끗이 만주를 포기하자는 말이오. 그래야 차르도 급박한 상황을 인식하고 지금과 같이 병력지원의 절대불가 입장을 바꾸지 않겠소.”
“아무리 그렇더라도 차르의 명령대로 북만주만큼은 절대 사수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병력은 유지해야 하고 말입니다.”
알렉세예프 총독의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이보시오. 리네비치 총사령관.”
“말씀하십시오.”
“지금과 같이 일본과의 전투가 지루한 소모전으로 진행 된다면 우리들의 자리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하시오?”
“그건·····”
리네비치 대장이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알렉세예프 총독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페테르부르크에는 널리고 널려 발에 걸릴 정도로 많은 것이 육군 장성이오. 만일 우리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지금 같은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 고집한다면 한 달도 되지 않아 아마도 쿠로파트킨 전임총사령관 같이 온갖 불명예를 온 통 뒤집어쓰고 해임조치 될 것이 분명하오.”
알렉세예프 총독의 설명에 리네비치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모든 지휘관들의 얼굴도 전부 일그러졌다.
“전쟁이 3년을 끌어오고 있소. 지난번에는 쿠로파트킨 한 명이 책임을 지고 해임조치 되었지만 차르의 성격상 이번에는 여기 있는 모두에게 책임을 지울 공산이 아주 많소. 그리고 총독인 본관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총독의 말을 들은 네 명의 사령관들은 반박을 하지 못하고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침묵에 빠졌던 리네비치 대장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총력전을 벌어야 한다는 말이군요.”
총독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게 우리가 살길이고 또한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오.”
“승리를 한다면 더 할 수 없이 좋겠지만 패전을 할 경우도 생각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패전을 한다면 아까도 말했듯이 만주를 포기합시다. 그리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오소리강(烏蘇里江 연해주와 만주사이에 흐르는 강)을 넘읍시다.”
리네비치 대장의 눈의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