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회: 5권-16화 -->
최익현은 그러면서 몸을 돌려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신이 폐하의 안전에서 너무 각박한 소리를 했사옵니다.”
“아니오. 공이 그동안 얼마나 일본군에게 핍박을 받았는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소.”
“신이 받은 핍박보다 저들이 이번 전쟁에서 우리 불쌍한 백성들을 노예같이 부려먹은 것이 수십만이고 그 때문에 비명횡사한 백성들 또한 기백입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이들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일본군을 철저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최익현의 말에 승전에 기뻐하던 접견실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지만 차준혁은 최익현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대단한 분이군. 승전분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시다니 말이야.’
이날 최익현이 내놓은 의견은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본군들이 원산에 수용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제국군에 의해 그들의 군복은 모조리 벗겨졌다. 이후 대대적으로 살충제를 뿌려 소독을 한 후 전부 검은색 물감을 들여 노동자들에게 무상 지급해 주었다.
일본군들에게는 그들의 군복색인 누런색으로 물들인 한복죄수복을 만들어 입혔다. 이렇게 한복죄수복으로 갈아입은 10만 명의 포로들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일대의 광산과 정착촌건설현장에 분산 투입되면서 인력문제로 고심하고 있던 건설대신 박연수의 짐을 크게 덜어주었다.
10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포로들은 일본정부의 철저한 무관심으로 인해 이후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10년의 시간이 흘러 자유의 몸이 되었어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만일 이들을 받아들일 경우 사회적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한 일본당국이 이들의 귀국마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귀국을 거부당한 일본군포로들은 어쩔 수없이 대한제국에 정착해야 했다. 대한제국은 이들의 처지를 배려해 전부 귀화시키고는 자국민과 똑 같이 대우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한반도북부와 만주에 정착했다.
군복을 검게 물들여 노동자들에게 입힌 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튼튼하고 질긴 군복을 일부러 구해서 염색해서 입을 정도로 큰 유행이 되었으며 한동안은 만기 전역 한 예비군들이 군복을 물들여 입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날 밤 친일파들에게서 몰수한 저택 중 중앙정보부에서 안가로 사용하고 있는 저택에서 박충식은 차준혁과 중정부장 오창권을 은밀히 만났다.
이 자리에서 차준혁에게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박충식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정원장께서 그렇게 강경하게 나온 것을 보니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일본에 맺힌 게 아주 많았었나 보네.”
“그렇게까지 강하게 나오실 줄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일본군에게 가혹한 고문까지 당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시겠지.”
“내무상께서 말씀하신 환영식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박충식은 환영식에 대해 반대했다.
“아직 다른 나라에 우리의 전력을 완전히 노출 시킬 필요는 없지 않겠어? 어차피 만주일본군을 따라 종군한 종군기자들도 모두 죽고 없는데 일부러 전력을 노출시킬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군사력을 계속 감출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성에서 발행하는 신문만 봐도 우리의 승전소식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구태여 들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어차피 신문에도 승전보도만 나지 무기가 노출된 것은 아니잖아. 내 생각에는 만주가 오롯이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는 타국에서 그저 우리의 군사력을 짐작하는 정도의 비밀 아닌 비밀로 놔두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 같네.”
“그렇다면 승전기념식은 당분간 없는 것으로 내무상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이고 내가 오늘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네.”
그러면서 두 사람을 바짝 당겨 앉게 하고는 먼저 중정부장 오창권에게 지시를 했다.
“앞으로 중정이 필리핀을 책임져 주어야겠네.”
중정부장 오창권이 먼저 질문했다.
“필리핀은 말입니까?”
“그래. 중정에서도 미국이 끝까지 일본을 뒤에서 도왔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이번 병력수송에도 20척의 대형수송선을 차관의 형식으로 공여했다는 정보는 입수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노획한 200정의 기관총이 맥심기관총인 것으로 봐서 미국이 전시물자까지 일본에 제공했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네.”
박충식의 말대로 일본은 그동안 호치키스기관총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노획한 물자 중 맥심기관총이 있다는 것은 미국이 일본을 도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들어내는 증거였다.
“지금은 우리가 전파교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도 미국도 아직 전황파악을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는 것을 미국이 알게 되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네.”
“저희 중정에서 미국의 발목을 잡을 필리핀에 공작을 벌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미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라는 공작을 벌였었는데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필리핀은 독립전쟁이 몇 년 전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네.”
오창권은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저희 중정에서 앞으로 필리핀에 공작을 벌여 미국을 흔들어 놓겠습니다.”
“그냥은 공작을 벌일 수가 없겠지?”
“좋은 복안이 있으십니까?”
“만주에서 노획한 러시아산 무기를 적극 활용해보게.”
생각지도 않은 말에 오창권의 눈이 커졌다.
“필리핀독립군에게 러시아군의 무기를 공여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이번에 북해도병력으로 인해 10만정의 신형소총까지 노획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제 러시아산 무기는 잉여물자에 불과해. 그리고 필리핀독립군이 러시아산 무기를 사용한다면 미국은 러시아를 의심하게 될 테니 여러모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무상공여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박충식이 고개를 저었다.
“무상공여는 아니란 것은 분명히 하고 공작을 시작하게. 아무 대가없이 도와준다면 필리핀독립군들은 분명히 우리를 경계 할 테니까 말일세.”
“그렇다면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면 좋겠습니까?”
박충식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도움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면 팔라완의 할양을 요구하게.”
오창권은 물론 옆에 있던 차준혁도 깜짝 놀랐다.
“예? 팔라완의 할양이요?”
박충식은 미리 준비한 지도를 탁자에 펼쳐서는 손가락으로 필리핀군도 중 왼쪽에 길게 뻗어있는 섬을 짚었다.
“이 팔라완은 우리가 있던 시대에도 개발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 섬이었으니 지금은 아마도 소수의 원주민들만이 살고 있을 것이네. 그러니 그들에게도 이 섬의 할양에는 별다른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 섬이 개발이 거의 안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별다른 실익이 없지 않겠습니까?”
박충식이 손으로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그렇지가 않아. 여기 이 섬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보게. 이 정도면 앞으로 중국이 남중국해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겠어?”
두 사람은 그제야 박충식의 의도를 눈치 챘다.
“팔라완을 할양받으시려는 것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을 미리 깔아두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이러지 마시고 차라리 앞으로 시작될 중국내전을 이용해 중국을 분할하는 공작을 펼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생각도 좋지만 지금으로선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야심을 견제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네.”
미국을 상대한다는 생각에 오창권의 안색이 심각해졌고 그 모습을 보고서 박충식이 웃었다.
“이 사람 이거, 이전시대 미국의 강력했던 힘에 너무 주눅 들어 있는 거 아냐? 오 부장, 너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지 말게.”
하지만 오창권의 안색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미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지금의 미국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미국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전 세계를 쥐락펴락 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대규모로 유럽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넘어갈 때 유럽의 과학자들도 대거 이민을 가면서부터 급격히 국력이 신장되었다는 것을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은가.”
차준혁이 바로 동조했다.
“맞습니다. 지금은 영국의 힘이 미국보다 훨씬 더 월등합니다.”
“그렇지, 우리가 독일연수생을 보내면서 유럽과학자들을 포섭하려고 했던 이유를 명심하게. 만일 우리가 이번에 미국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유럽과학자들의 발길을 우리 대한제국으로 훨씬 더 많이 돌리게 만들 수 있을 것이야. 더구나 우리는 이제 광활한 영토까지 가진 명실상부한 제국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