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회: 5권-18화 -->
한동안 충격에 입을 열지 못한 일왕이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우리 제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토 히로부미가 한숨을 내쉬며 상심해하는 일왕을 위로했다.
“폐하, 너무 상심 마시옵소서. 아직 신 등이 있고 오천만(1905년 일본의 인구는 4,760만이었다.) 신민이 폐하를 받들고 있사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쳐나갈 수 있사옵니다.”
달변의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을 설득하자 평상시에는 그를 존경하고 있어서 거의 말을 들어주던 일왕이었으나 이번에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후!~ 그렇지 않소. 짐은 그동안 짐을 믿고 죽을 각오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따라와 준 오천만 신민들이 오히려 더 걱정이 되오.”
한숨을 내쉬며 하는 일왕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그의 신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폐하!~”
일왕의 말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난 3년간 일본국민들은 정부정책을 따르느라 생활이 아주 피폐해져 있었고 최소한의 식량배급을 받는 바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뼈만 남아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이제 막 근대화의 길에 접어든 국가경제는 한반도과 만주를 강점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복불능상태에 빠져 있었다.
메이지일왕은 비록 신하들에 의해 떠받들어진 군주였으나 현명한 군주였다.
“일단 벌어진 상황이니 최대한 정확히 점검해 보고 국민들이 이 상황을 알게 되면 크게 동요할 수 있으니 최대한 기밀을 유지하시오. 그리고 내각에서는 어떻게 이 경제난을 해쳐나가야 할지를 최대한 빨리 검토해 보시오.”
일왕의 지시에 가쓰라 다로 총리가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
가쓰라 다로 총리의 대답을 들은 일왕은 시선을 군부로 돌렸다.
“참모총장. 그리고 군령부총장.”
야마가타 원수와 이토 대장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군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라고 했소. 그러니 지금 같은 어려운 시기에 더 이상의 책임논쟁은 불가하오.”
야마가타는 방금 전의 상황을 마치 일왕이 본 것 같이 말하자 얼굴까지 붉히며 허리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러자 따라서 이토 대장도 허리를 숙였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일왕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됐소. 이전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로 절대 육·해군이 대립한다는 말을 들으면 짐은 반드시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두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일왕이 야마가타를 다시 불렀다.
“참모총장.”
“예, 폐하.”
“만주황군에 대한 교신은 아직까지 되지 않고 있는 것이오?”
“송구하오나 아직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폐하.”
“아무래도 제3세력이 개입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그렇지 않아도 저희들도 그렇게 상황을 추측하고 있는 중입니다.”
야마가타 원수가 어정쩡한 대답을 내놓자 일왕은 다시 또 한숨을 내쉬었다.
“후!~ 북해도병력까지 포함하면 팔십만 명이 넘는 장졸들이 산화 되었는데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피폐해진 경제와 부담스러운 국채뿐이로군.”
일왕의 자책에 회의장이 순간적으로 잘못했다는 자책으로 혼란스러워졌다.
“신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황공하옵니다. 폐하.”
·······
여기저기서 잘못했다는 말들이 쏟아지자 일왕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 되었소. 지금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고 귀관들의 사과를 받자는 것도 아니니 더 이상 인사는 하지 마시오.”
어수선한 상황을 단칼에 정리한 일왕이 다시 야마가타에게 질문했다.
“참모총장은 지금의 상황을 계속 국민들에게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당분간은 가능하겠지만 끝까지 덮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불순세력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데 만일 그들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야마가타는 일왕의 질문에 순간 폭동이란 말을 떠올리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국정을 문란하게 할 공산이 있습니다.”
“바로 보았소. 지금은 어차피 벌어진 일을 걱정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국내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일들을 대비해야 할 것이오.”
이 말을 듣자 야마가타 원수와 이토 히로부미 등 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일왕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마가타가 바로 반발했다.
“폐하, 아직 우리황군이 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왕이 바로 그 말에 수긍하는 것이었다.
“그렇소. 우리는 패하지 않았소.”
야마가타가 오히려 의아해졌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는 승리한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제3세력의 개입으로 승리를 우리가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오?”
일왕이 오히려 되묻자 야마가타는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
“참모총장은 혹시 우리와 같은 상황을 러시아도 함께 겪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주의 황군이 교신이 되지 않는다면 러시아도 연해주와 교신이 되지 않을 것 아니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본국에서는 우리 황군이 아직 연해주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소?”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폐하의 말씀이 충분히 일리가 있사옵니다.”
“짐은 제3세력이 벌써 1년 이상 우리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정체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마 몇 개월은 이대로 비밀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소. 그래서 이번에는 짐이 도박을 하려고 하오.”
“도박을 하신다니요?”
“어차피 러시아와는 종전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단 승자로서 종전협상에 임하고서 러시아에 다른 것은 모두 놔두고 전쟁배상금만을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소.”
“아!~”
그제야 야마가타도 머릿속을 뭔가가 확 스쳐 지나갔다. 일왕은 야마가타의 표정을 보고 그의 머릿속의 생각을 짐작했다.
“경도 짐의 생각을 짐작한 듯하오.”
야마가타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어차피 만주는 제3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니 구태여 러시아와 영토문제로 다툴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영토문제를 거론하면 그들의 의견을 그대로 들어주는 척 하면서 우리 제국은 최대한의 실익을 취하자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일왕이 크게 흡족해했다.
“바로 보았소이다. 우리 제국은 지금 당장 러시아가 만주를 넘겨준다고 해도 이제는 병력이 없어서 지켜 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오. 그러니 러시아와의 종전협상에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어 다시 산업을 육성하면서 전비확충에 나선다면 반드시 후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짐은 생각하오.”
옆에서 듣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내심 크게 탄복했다.
하지만 일왕의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짐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국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야마가타 참모총장.”
일왕의 말에 감복한 야마가타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행동도 절도가 있었다.
“하명 하십시오. 폐하.”
“정국안정을 위해서 아무래도 군이 수고를 해줘야겠소.”
“우리 군이 치안을 담당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일왕의 말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가쓰라 다로 총리가 황급히 나섰다.
“폐하. 군이 치안을 담당하면 국민들이 반발할 우려가 큽니다.”
“어차피 지금은 전시가 아니오? 전시에 군이 나서서 사회를 안정시키겠다는데 그것을 반발하는 자들은 바로 불순분자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소?”
“그렇다고는 해도 군이 치안을 맡는 경우는 전례가 없습니다.”
일왕이 한마디로 딱 잘랐다.
“전례가 없으면 새로 만들면 되는 것이오.”
일왕의 말에 가쓰라 다로 총리가 다시 반대하려고 나서려하자 이번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총리보다 먼저 나섰다.
“폐하의 말씀대로 지금의 나라 상황으로는 육군이 치안을 맡는 수고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제국이 조금 먼저 시작할 뿐이지 어차피 앞으로의 세계는 군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군이 경찰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까지 찬성하고 나서자 가쓰라 다로 총리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