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회: 5권-21화 #공사관습격사건 -->
시간이 조금 거슬러 올라가 차준혁이 중정안가에서 박충식과 밀담을 나눈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대한제국외무대신 이범석은 청국공사 증광전(曾廣詮)을 외무성청사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대한제국외무성이 외국공사를 정식으로 불러들인 경우는 신청사가 준공되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청국공사 증광전(曾廣詮)은 처음으로 방문하는 외무성신청사 내부를 들어서자마자 엄청나게 놀랐다.
새로 건설된 대한제국외무성의 신청사내부는 아주 넓고 높이도 높아서 쾌적했으며 외무성답게 대부분 양복을 입고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활기찬 모습에 부러움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내가 부임한지 2년여 동안 한국은 이렇게 점점 상전벽해가 되어 가는데 우리 청국은 여전히 저 모양 저 꼴로 서태후가 정권을 농단하고 있으니 참으로 큰일이다. 이러다 우리 대청제국이 대한제국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구나.’
신청사입구에서 잠시 서서 이런 생각을 하던 증광전은 정면에 있는 중앙계단을 올라 3층에 있는 외무대신집무실에 들어섰다. 외무대신은 각국공사를 역임하다 러시아공사를 역임하다 입국한 이범진(李範晉 1852)이었다.
이범진은 외무성의 다른 관리들과 달리 개량한복차림이었고 증광전은 청나라전통복식차림을 하고 있어서 두 사람의 복식이 묘하게 어울려보였다.
이범진은 당당한 자세로 증광전을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시오. 공사.”
증광전도 손을 마주 잡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외상(外相)각하.”
“하하! 공사께서 도와주셔서 나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있었던 취임식행사 때 뵙고 오늘이 두 번째니 이거 내가 참으로 격조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며 손으로 자리를 권하자 증광전이 자리에 앉으며 소회(所懷)를 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각하를 면담하러 간다고 하니 각국공사 분들께서 외상각하께 섭섭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었군요. 일이 바빠 그동안 제가 각국공사 분들께 결례를 많이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며칠 내로 공사 분들을 한 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각하께서 초청하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각국공사들이 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하하! 이거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더 미안해집니다.”
“별 말씀을요. 그런데 오늘 본관을 부르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귀국 외무장관께 제출할 서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손짓을 하자 통역을 하던 관리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증광전에게 건네주었다.
증광전이 서류를 펼치는 것을 보고 이범진이 설명했다.
“그 문서는 본인이 귀국외무장관께 제출하는 신임대리공사 선임에 관한 신임장입니다.”
“우리 청국에 주재할 신임대리공사를 선임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북경을 계속 비워둘 수가 없어서 이번에 새로 대리공사를 선임했습니다.”
증광전은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원세개의 최측근인 증광전은 만주할양에 대한 사항도 이미 극비전문을 통해 통보받았기에 다른 공사들보다 사고가 아주 유연했다.
증광전이 신임장을 한 번 더 훑어보고는 곱게 내려놓고 표지를 덮었다.
“알겠습니다. 본국에 그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리공사로 부임하시는 분이 아주 젊은 분이군요?”
“예, 청국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황실종친 중에서 한 분을 선정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증광전은 외국에 주재할 공사는 전문외교관이 아닌 사람도 선임이 종종 되었기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임장에 적힌 신임대리공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대한제국 청국주재 전권대리공사 차준혁’
신임장에 적힌 이름은 바로 차준혁이었다.
증광전이 신임장을 다시 접에서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만주에서 일본군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외무대신 이범진은 증광전이 원세개의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은 조심했다.
“귀국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범진(李範晉)은 그의 부친이 구한 말 유명한 포도대장이었던 이경하(李景夏)였으며 그의 동생은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애국투사 이범윤(李範允)으로 집안전체가 철저히 반일집안이었다.
이범진은 러시아공사로 근무할 때 일본의 농간으로 공관이 강제 폐쇄되자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귀국하지도 않고 러시아에 남아서 모진 고생하면서 고군분투했었다.
그러다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어 귀국한 이범진이었기에 일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아주 이를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범진이기에 만주에서 일본군을 전멸시킨 통쾌한 전과를 청국공사에게 알려주고 싶어 입이 아주 근질거렸으나 끝내 입조심을 하면서 에둘러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적당히 말을 돌려 설명을 해도 증광전은 대한제국이 승전했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채고는 그도 에둘러 질문했다.
“그럼 경친왕 전하와 원 총독각하께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정식으로 공표하기 전까지는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청국의 국익에 훨씬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거야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증광전은 이후 이범진과 앞으로의 국제정세에 관해 상당한 대화를 나눈 후 청국공관으로 돌아갔다.
공사관으로 돌아간 증광전은 대리공사 임명에 관한 전문을 바로 북경으로 보냈다.
하지만 차준혁이 인천을 출발한 것은 10월 중순으로 이렇게 출발이 늦어진 것은 동행할 외교관의 선임에 신중을 기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차준혁과 같이 선임된 북경총영사는 40대 후반의 이준(李儁 1859)으로 이범진 외상이 박충식의 제가를 얻어 특별히 선임되었다. 그리고 영사로는 이상설(李相卨, 1871년)이 선임되었으며, 이범진의 아들인 이위종(李瑋鍾, 1887년)이 차준혁을 보좌할 외무성 참서관(參書官 정5품의 주임관(奏任官))에 임명되었다.
특히 이위종은 나이가 어렸으나 어려서 부친을 따라 각국을 돌아다닌 덕에 7개 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어학에 아주 특출한 재능을 보이고 있어서 차준혁의 보좌관으로는 아주 금상첨화였다.
이렇게 하여 이전시대 황제의 밀사였던 3명을 포함한 10명의 외교관과 특전사에서 특별히 선발된 10명의 무관이 차준혁의 북경 행에 동행했다.
일본과 서양은 의화단사건이후 자국공관을 경비하는 병력을 별도로 파견할 수 있었으나 아직은 대한제국이 청국과 공사관경비에 대한 자국병력파견협상을 한 적이 없어서 주재무관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10명을 대동한 것이다.
황궁에서 황제에게 부임인사를 마치고 총리부와 외무성에 들러 각각인사를 마친 차준혁이 인천에서 상해를 오갈 때 탔던 500톤 급 탐라호에 승선을 하려고 할 때 수백 명의 사관생도들이 다른 배에 승선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 친구들 사관생도들 아닙니까?”
주재무관으로 동행하는 장교 한명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어디 여행가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고 이번에 한성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요동으로 이전하기 때문에 생도들이 전부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요동으로요?”
“육군의 주요 활동무대가 앞으로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 되기 때문에 역사적인 도시이고 평원과 산지가 바로 인근에 있어 산악훈련도 쉽게 할 수 있는 요동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이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의선과 안봉선(安奉線 일본군이 러일전쟁당시 개설한 만주안동에서 봉천까지의 철도)을 이용하지 않고 왜? 배를 이용하지요?”
“그건 생도들이 북진을 완수한 선배들의 높은 기상을 받들기 위해 배를 타도 여순 항에서 하선한 후 철도를 따라 하얼빈까지 행군을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차준혁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 먼 길을 행군한다고요? 더구나 곧 겨울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수들이 곧 겨울이 된다고 말렸지만 선배들은 죽음으로 북진을 완수했는데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 육사생도가 아니라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승낙했다고 합니다.”
차준혁이 감탄했다.
“하!~ 생도들의 의기가 대단합니다.”
주재무관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 구국간성(救國干城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이 될 우리 대한제국의 생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