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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겁도 없이 그동안 우리와 채결한 모든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지금 우리에게 감히 통보하는 것이오?”
“국가 간의 조약은 호혜평등에 입각해서 채결해야 하는 것인데 일방적이고 잘못된 조약을 바로 잡자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소?”
“이이이!~~”
약을 올리듯 조목조목 따지듯 말을 하자 하야시 곤스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외교관답게 숨을 잠시 고른 후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협박했다.
“조선이 지금 우리 대일본제국과 전쟁이라도 해 보겠다는 것이오?”
하야시의 협박에 차준혁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이보시오, 하야시 곤스케 공사. 본국이 국호가 바뀐 것이 벌써 10년인데 귀관은 외교관이면서 어떻게 상대국의 국호도 제대로 쓰지 않는 결례를 누차 범하는 것이오. 앞으로 본관과 대화를 하려면 그것부터 고치시오.”
하야시의 얼굴이 완전히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하야시는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소. 대한제국이 지금 우리 대일본제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오?”
“귀국이 불평등 조약을 계속 강요한다면 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겠소?”
하야시 곤스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하의 말을 귀국의 공식반응으로 인정해도 되겠소?”
“물론이오. 본관은 본국의 황제폐하의 황명을 받은 몸이니 당연히 본국을 대표하지 않겠소?”
“뿌드득.”
너무나도 당당하게 대답하자 하야시가 말을 하지 못하고 이빨을 소리 내어 갈았다. 그런 하야시 곤스케에게 차준혁이 또다시 염장을 질렀다.
“본국은 귀국에 불평등조약의 파기만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요.”
하야시 곤스케는 차준혁이 간이 배밖에 나온 것 같이 행동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또 무엇이 있소?”
“귀국이 그동안 본국에 끼친 피해에 대한 확실한 배상을 해주기 바라오.”
참고 참았던 하야시가 이 말에 드디어 폭발했다.
“무엇이! 이자가 말이라고 하면 다 말 인줄 아는가. 감히 대일본제국이 배상을 하라고?”
하지만 차준혁은 너무도 냉정했다.
“그동안 일본이 본국에 자행한 잘못이 하나 둘이 아니란 것은 귀하께서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하야시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차준혁을 노려봤다.
“분명 귀하가 조선을 대표한다고 한 말을 책임져야 할 것이오.”
“물론이오. 그리고 귀하도 앞으로는 말투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할 것이오.”
말이 막혔는지 하야시 곤스케는 한동안 노려보다 돌아가려고 할 때 차준혁이 그를 불렀다.
“아! 본국의 정식공문은 가져가야하지 않겠소.”
이 말에 하야시의 안색이 다시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원탁에 있던 공문을 확 잡아채서는 정전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야시가 나가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들은 총영사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그리고 육군주재무관 정성용 소좌와 그의 부하 2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통쾌하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들어온 사람들 중 가장먼저 이준이 입을 열었다.
“아주 잘 하셨습니다. 십년 묵은 채증이 쑥 내려간 기분입니다.”
이상설은 대소를 터트리기까지 했다.
“하하하! 총영사각하의 말씀대로 정말 통쾌했습니다. 하야시의 노랗게 뜬 얼굴을 꼭 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상설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크게 한바탕 웃었다. 속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난 차준혁이 육군정복을 입은 정성용 소좌에게 질문을 했다.
“도청장치는 작동이 잘 됩니까?”
“다행히 작동에 이상이 없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정성용의 소좌였고 나이가 많았으나 차준혁이 상관이었기에 확실하게 말을 높였다.
“그럴까요?”
주재무관들은 특전사출신들로 북경에 도착한 지난 밤 경비 병력이 별로 없는 일본공사관을 손쉽게 잠입해 하야시 곤스케 공사의 집무실창문과 회의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차준혁이 승낙하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전 뒤에 있는 후전(後殿)으로 몰려갔다.
후전주변에는 이미 CCTV가 설치되어있었고 문 양쪽에 주재무관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차준혁이 후전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있던 감청담당관이 헤드폰을 벗으면서 경례를 했다.
“충성,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습니다.”
정성용이 감청을 하던 부하에게 물었다.
“뭐 좀 걸리는 것이 있나?”
“하야시가 우리 공관을 찾아오기 전에 많은 말들이 오갔으나 지금은 잡다한 소리만 들리고 있습니다.”
정성용이 차준혁에게 권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차준혁이 거절하려다 세 사람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준혁이 헤드폰을 건네받아 착용했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내 벗고는 눈을 반짝이는 이준에게 헤드폰을 건넸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신기한 표정으로 헤드폰을 착용했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헤드폰은 이준의 손에서 이상설과 이위종까지 거친 후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갔다.
“하야시가 방금 돌아갔으니 곧 무슨 소리가 감청될 것이니 잘 감시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감청을 하는 것은 힘든 임무이니 시간마다 교대 확실히 하는 것 잊지 말고.”
“예, 소좌님.”
일본공사관으로 돌아온 하야시 곤스케는 차준혁에게 당한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 모습을 본 참사관(參事官 공사의 아래직급으로 서기관보다는 높은 지위) 사토(佐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선의 공관에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이것을 읽어보게.”
사토 참사관은 하야시가 건네준 서류를 읽다가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조선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것뿐이 아니네.”
그러면서 하야시는 배상금에 대한 말을 꺼내자 그도 하야시와 같이 격하게 반응했다.
“그자가 정말 겁을 상실했나봅니다. 본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공사가 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대책을 강구해야겠네. 자네는 지금 곳 회의를 소집하게.”
“일단 상황을 본국에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아! 그리고 주둔군사령관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이르고.”
“예, 각하.”
지시를 받은 사토가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러시아와의 종전협상이 끝나자 일본은 히로시마에 있던 대본영을 해산했다. 일왕과 내각이 동경으로 돌아온 뒤 첫 번째로 들려온 외국소식인 대한제국청국주재대리공사의 파견소식에 일본이 발칵 뒤집혀졌다.
일본총리관저는 서양풍의 목조 2층 건물로 메이지유신이전시대에 수상격인 태정대신의 관사였다.
이 총리관저에 일본을 이끌어 가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연 사람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수상,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내각이 동경으로 복귀하며 가쓰라 다로의 후임으로 새로 총리가 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미국에 가있는 이토 히로부미와는 같이 외국순방까지 하여 나이를 떠나 막역한 사이였으며 야마가타에게도 총애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소관도 갑작스럽게 보고를 받아 자세한 사정을 현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선을 하야시 다다스(林董)외상에게 돌렸다. 하야시 다다스가 총리의 시선을 받자 목례를 하고는 상황을 설명을 했다.
“주청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보고로 이틀 전 조선의 대리공사라는 자가 북경에 입경해 어제 청국 외교부에 신임장을 제출했다고 합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를 갈았다.
“양국 간 협약을 채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이렇듯 방자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우리 대일본제국을 아예 무시하려고 작정을 했군.”
“그렇습니다. 지금 조선이 우리 대일본제국에 중대한 도발을 한 것이니 반드시 이를 징치해야 합니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한제국침략의 대표적 원흉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가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으로 우연히 일이 겹치는 형상)도 아니고 조선이 갑자기 우리 제국을 무시하고 도발을 하고 나오는 데는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오.”
이 말을 하던 야마가타는 갑자기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인 배정자가 부산에서 봤다는 함대에 걸린 태극기가 떠올리자 처음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