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회: 5권-25화 -->
잠시 생각을 하던 야마가타가 침중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번 이토 후작각하의 영애인 사다코 양이 대본영에서 증언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는군. 흠!~ 우리가 정말 조선을 간과한 것일지도 모르겠소. 만주와 연해주도 그렇고 이번에 북해도병력이 몰살된 것이 어쩌면 조선이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드는구려.”
그러자 사이온지 총리가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까지 상황이 아무리 미궁에 빠져 있다고 해도 약해빠진 조선의 국력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야마가타는 더욱 대한제국이 의심되었다.
“아니오. 지금까지 전개되는 정황이 조선을 점점 배재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소.”
지금까지 대한제국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이던 야마가타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고 나오자 회의참석자들은 맞다 아니다하며 갑론을박을 시작했다. 어수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으나 역시 이전처럼 뚜렷한 결말을 내지 못했다.
회의참석자들이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 하며 시간만 보내자 야마가타 원수가 다시 나서서 모두의 입을 막았다.
“여러 의견들이 많이 나왔으나 결국 조선이 힘이 있느냐 없느냐로 귀결되고 있소. 그래서 본관은 조선을 건드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오.”
사이온지 총리가 질문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우선 겁도 없이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북경에 나가 있는 조선의 공사를 납치해서라도 사실을 확실히 알아내는 것이 좋겠소.”
야마가타의 말에 고무라 외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조선의 공사를 납치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미 신임장까지 청국에 제출한 공사를 납치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아주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고해 주십시오.”
“고무라 외상은 그렇다면 조선에 관한 일을 어디서 알아볼 수 있겠소?”
“그렇지만 조선의 공사를 납치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치명타를 입을 수 있습니다.”
러일전쟁기간 동안 일본의 살림을 책임지며 말도 못하게 고생한 대장대신 사카타니 요시로(阪谷 芳郎)가 고무라 외상을 두둔하고 나섰다.
“외상의 말씀대로 외교관을 납치하면 후폭풍이 너무 큽니다. 그렇게 되면 국제적 신의가 떨어져 지금 추진하고 있는 경제재건에 필요한 차관도입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고해 주십시오. 각하.”
그러나 외상과 대장상의 우려를 야마가타가 냉정하게 잘랐다.
“영일동맹까지 파기된 상태에서 우리 제국을 도화줄 수 있는 나라는 이토 후작각하가 협상하고 있는 미국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소. 그러니 각국과의 외교적인 문제가 조금 생기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 조선에 대한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하오.”
“그렇다면 공사를 대상으로 하지 말고 다른 외교관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그나마 분란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마가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어차피 누구를 납치하더라도 시끄러워질 것이라면 고급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공사를 납치하는 것이 좋소.”
일본 군부는 물론 정가까지 좌지우지하는 야마가타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자 반대의견을 내기 위해 입을 달싹이던 반대론자들의 입을 모두 들어붙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에 국력을 더욱 집중시키기로 하면서 북경에서 차준혁을 납치할 공작에 들어갔다.
총영사 이준이 무관들이 감청한 내용을 보고받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놈들이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군요. 어떻게 공사각하를 납치할 생각까지 합니까.”
차준혁이 화가 잔뜩 나있는 이준에게 웃으며 위로했다.
“하하! 너무 걱정하시 마십시오. 우리 주재무관들의 실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각하! 지금 웃으실 게재가 아닙니다.”
그때 옆에 서있던 정성용 소좌도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이준 총영사가 질책했다.
“그대는 각하를 경호할 책임이 있는 무관으로서 일본 놈들이 각하를 납치할 기도를 들었으면서도 웃음이 나는가?”
이준의 질책이 있었지만 정성용은 당당했다.
“적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절대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니 총영사님께서는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리고 저희들은 이미 일본이 도발을 할 경우를 상정해 준비를 철저히 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잘못하다가는 공사각하께서 큰일을 당할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방어태세점검을 다시 한 번 철저히 하도록 지시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게.”
정성용이 방어태세점검을 위해 밖으로 나가자 이준이 차준혁에게 물었다.
“일본이 납치를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이렇게 침착하신 것을 보니 저들이 도발을 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두셨나 봅니다.”
“저를 납치를 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란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경비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차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청국이 병력충원을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도청했다는 것을 알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본군이 일부 병력을 철수 했다고 해도 아직도 북경에 상당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데 10명의 병력으로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같이 온 무관들은 특별히 선별한 일당백의 전사들이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저들이 도발을 해 오더라도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는 못할 것이니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이고 저도 사격은 남들만큼은 합니다.”
이런 말을 들었어도 이준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일단 공사관직원들에게 조심을 시켜야겠습니다.”
차준혁이 의외의 말을 했다.
“오 판임관과 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상황을 말씀해 주시는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이 백주대낮에 도발을 자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부분 퇴근을 하는 청국출신 직원들에게는 구태여 알려서 동요시킬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준이 생각해도 타당한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가 보겠습니다.”
이준은 차준혁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해 거론된 사람만을 불러 특별히 주의를 주었다.
이날 밤은 아무 일없이 지나갔고 새벽이 되었다.
북경이 새벽잠에 빠져 있을 때 북경성벽그림자를 이용해 검은색의 청국 옷을 입은 이십여 명이 권총과 소총을 들고 대한제국공관으로 은밀히 접근했다. 가로등도 이미 꺼져 있는 새벽이라 높은 북경성벽에 의지해 신속하게 움직이는 이들의 접근은 너무도 주도면밀해서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대한제국공관 앞에 도착한 이들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손짓으로 담장을 가리켰다. 그러자 미리 지시를 받았는지 몇 명이 신속하게 앞으로 나와서는 담장 아래에 미리 준비해온 디딤판을 만들었고 그 중 두 명이 디딤판을 딛고서 날렵하게 담장을 넘었다.
잠시 후 공관정문이 소리 없이 열렸고 이들은 신속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전원을 지나 중문인 수화문(垂花門)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드디어 석재가 깔려있는 중정(中庭)이 나타났다.
일본군지휘관이 다시 손을 들어 뭔가를 지시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푸슝! 퍽!
소음기가 달린 총에서 나는 특유의 발사음이 나면서 지휘관의 머리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지휘관의 머리가 갑자기 터져 나가자 침입자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푸슝. 퍽! 푸슝 퍽! 푸슝 퍽!·····
사방에서 딱 열 발의 총성이 더 들렸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침입자들이 죽어나갔다. 갑자기 당한 총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둠 속에서 일본말이 흘러나왔다.
“죽기 싫으면 총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라.”
갑자기 일본말이 들리자 침입자들은 놀라고 당황한 모습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고 이런 이들에게 또 다시 일본말이 들려졌다.
“너희들은 모두 포위되었으니 살고 싶으면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고 항복해라.
하지만 이들 중 한 명이 정면에 있는 공사 집무실전각을 향해 무작정소총을 발사했다.
탕!
총소리가 나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침입자들이 곧바로 사방으로 총기를 난사했다.
탕! 탕! 탕! 탕!····
그러나 무작정 난사하는 이들의 총에 맞을 재수 없는 사람은 대한제국공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슝. 퍽!
“으악!”
처음으로 단발에 절명하지 않은 자가 나타나면서 그자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북경새벽을 울렸다.
푸슝. 퍽!
“으악!”
처음과는 달리 2차 사격은 일부러 부상을 입히기 위해 사격을 하고 거기에 공포심을 조장되도록 시간을 조금씩 띄우면서 한 발 한 발 총이 발사되자 남아 있던 몇 명은 바로 소총을 던지면서 그 자리에서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정성용 소좌는 눈앞에 달린 야간관측용 투시경을 들어 올렸다.
“불을 켜라.”
그러자 정원 사방에 있는 등에 불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