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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전의 1층에는 어전회의를 위해 사이온지 총리와 야마가타 원수를 비롯한 일본정계와 군부 최고 권력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고무라 외상. 이게 정말 조선에서 본국에 보내온 외교문건이오?”
메이지일왕은 차준혁이 보낸 외교문서를 고무라 외상에게 다시 확인했다.
고무라는 왕이 자신을 지목하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참람한 내용이 적혀 있사오나 분명 청국주재 조선공사가 북경의 본국공관에 정식으로 보낸 문건입니다.”
팡!
메이지일왕은 고무라 외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자 대전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해졌다.
뿌드득
침착한 일왕이 이빨까지 갈며 으르렁댔다.
“조선국왕의 간이 부어도 너무 부었군. 감히 이따위 말도 안 되는 문건을 짐에게 보내다니.”
차준혁이 외교문서형식을 갖춰 일본공사관에 보낸 문서는 외교관계 단교(斷交)와 더불어 이전까지 양국사이에 채결되었던 모든 조약의 폐기와 그동안 일본이 대한제국에 피해를 끼친 악행에 대한 배상요청이었다.
더구나 배상에는 금전적배상도 있었지만 국가원수인 일왕의 정식사죄도 포함되어 있어서 일본이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고무라 외상은 대한제국의 문서가 외교문서로 들어온 탓에 다른 각료보다 더욱 송구한 표정이었다.
“신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메이지일왕은 고무라 외상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야마가타 원수를 노려봤다. 일왕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자 야마가타의 몸이 움찔했다.
“참모총장.”
“예, 폐하.”
“국적불상의 적이 조선이오?”
메이지일왕이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추궁하듯 확인하자 얼굴까지 달아오르며 급히 허리를 숙였다.
“신 등이 어리석어 조선이란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메이지일왕도 그 자신이 대한제국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야마가타에게서 다른 특별한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답답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또 있었다.
“조선의 군세가 수십만이나 된다는데 우리 제국군이 격멸할 수가 있겠소?”
일왕의 의문에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의외로 군 장성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었다.
“폐하, 우리 대일본제국군을 의심치 마시옵소서. 우리 대일본제국군은 비록 지금 약간의 비세에 직면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타국에 무시를 받을 정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만주에서 우리 군이 전멸을 당했지 않았소.”
“그것은 분명 아군이 러시아군과의 격전을 벌이고 난 후 적이 없다고 방심한 틈을 이용한 간교한 공격이 분명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때는 아군병력이 몇 만에 불과 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당백의 우리 대일본제국군이 조선군 따위에게 전멸 당할 일은 절대 없었을 것입니다.”
달변가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기름칠한 혀로 일왕을 설득하자 메이지일왕은 그 설득에 넘어가는 눈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대일본제국에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가미카제(神風 신풍)가 있사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미카제를 거론하자 메이지일왕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오! 그렇지. 우리에게는 가미카제가 있었어.”
일본이 가미카제라고 불리는 바람은 여몽연합군이 일본에 두 번에 걸친 정벌전쟁 때 유래된 것으로 2번에 걸친 원정을 했었다. 일본은 이때마다 여몽연합군에게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두 태풍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은 신의바람이 불어와 열도를 지켜주었다고 믿었고 앞으로도 적이 쳐들어오면 신풍이 다시 불어 줄 것이라고 신앙처럼 미신을 믿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가미카제가 있어서 어떠한 적도 열도에 발을 디디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미신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거의 신앙과도 같은 가미카제였기에 이토 히로부미가 이렇게 말을 하자 모든 사람들이 수긍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기름칠한 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에 미국에서 연합함대에 버금갈 정도의 전함이 도착하니 폐하께서는 크게 우려하지 않으셔도 되옵고 이번만은 우리 군이 절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메이지일왕이 이토 히로부미의 세치 혀에 마치 최면이 걸린 듯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 대일본제국군이 고작 대한제국군 따위에게 밀릴 이유가 없지.”
그러자 여기저기서 이토 히로부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튀어 나왔다.
아무리 현명한 군주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힘들고 거친 말보다 쉽고 부드러운 말에 귀가 쏠리는 법이고 거친 음식보다 부드러운 음식이 구미가 당기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가미카제가 나왔고 미국에서 연합함대를 다시 편성할 정도의 전함까지 도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상기시킨 이토의 기름칠한 혀 때문에 메이지일왕은 상황을 점차 오판하기 시작한다.
어전회의의 처음과 달리 메이지일왕의 안색이 한층 밝아졌다. 메이지일왕이 참석자 모두를 한 번 둘러봤다.
쫙! 쫙! 쫙! 쫙!
그러고는 결전을 다짐하듯 대한제국국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으며 넓은 회의실은 문서가 찢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서를 다 찢은 메이지일왕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조선이 이렇게 불측한 국서를 보낸 것은 우리 제국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소.”
메이지일왕이 육군을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호칭했다.
“야마가타 원수.”
“예, 폐하.”
“아무리 우리에게 가미카제가 있다고 해도 지상병력은 반드시 충원해야 하니 새로 징집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아도 새로 황군을 편성하기 위해 징집 뿐 아니라 예비 병력의 동원도 전부 명령해 놓은 상태입니다.”
“참으로 현명한 대처요.”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육군을 보고에 흡족해하며 메이지일왕이 이번에는 해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토 대장.”
“예, 페하.”
“미국에서 인도받는 대형전함이 6척이라고 들었소. 훈련받은 승조원들이 부족하지는 않겠소?”
이 무렵 미국해군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대형전함 16척으로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 세계를 순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은 본래 일본에게 전함을 인도해주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미국에 있는 친일파들을 총동원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한 끝에 전 세계를 순회하다 필리핀에 머물고 있던 16척의 전함 중 6척의 전함을 인도받게 된 것이다.
본래역사에서는 16척의 미국전함은 1907. 12월부터 1909. 2월까지 14개월간의 전 세계를 순회하며 미국의 국력을 과시했었다. 하지만 신군이 도래하면서 역사가 조금씩 바뀌면서 순회시기가 앞당겨졌고 이토 히로부미의 노력으로 일본이 이 전함 중 6척을 인도받게 된 것이다.
미군에게 양도받은 6척의 대형전함들은 3월 초 해군공창이 있는 요코스카 항에 입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비록 선령이 조금 오래된 전함을 인도 받는 것이지만 변변한 전투함정 한 척 없던 일본으로서는 단 번에 강력한 함대를 편성할 수 있는 6척의 전함은 감지덕지였다.
“함정승조원들은 숙련된 기술력을 요하는지라 우리 해군에서는 그동안 지상병력에게도 승선훈련을 병행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전함에 대한 적응기간만 약간주면 훌륭히 제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모처럼 귀관에게서 만족한 답변을 들었소.”
“그동안 송구했습니다. 폐하.”
“아니오. 지금은 이전의 일을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맞을 국가존망대사(國家存亡大事 나라가 흥하나 망하나 하는 큰 일)를 걱정할 때니 이전의 불미함은 모두 잊고 앞으로 국가를 위해 더 힘써주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육군과 해군에게서 모처럼 만족스런 대답을 들은 메이지일왕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짐은 절대 조선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오. 더구나 조선은 우리 제국이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식민지로 만들어야 하는 땅이니 짐은 이 기회에 조선을 반드시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오.”
메이지일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보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그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조선이 보낸 문서에 적시한 날짜가 3월 말이니 앞으로 시간이 없소. 하지만 육·해군은 이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 결전준비를 하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최대한 박차를 가해주기 바라오.”
그러자 합창을 하듯 참석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폐하.”
어소에서의 어전회의를 마치고 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육군참모총장 야마가타 원수 그리고 해군군령부총장 이토 대장과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와 별도로 회동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