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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각하. 조금 전 어전에서 폐하께 걱정하지 마시라는 진언은 드렸지만 솔직히 본직의 내심은 크게 걱정됩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우려에 야마가타의 안색도 침중해졌다.
“솔직히 지금 본토에 있는 병력이 예비군들이라 징집을 한다 해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화기수급도 크게 어렵지 않겠습니까?”
“후!~ 솔직히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난 번 만주경략 때 모든 화기들을 쏟아 부어서 지금 재고도 별로 없는 처지라 본관도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의외의 제안에 야마가타 원수의 눈이 빛났다.
“미국에 무기원조를 받는다고요?”
“그렇습니다. 물론 무상원조는 안 되겠지만 빠른 시일에 군대를 재무장하려면 유상원조도 고려해 볼 문제라고 판단됩니다.”
“흐음!~”
야마가타는 깊은 신음소리를 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선뜻 대답을 못하는 야마가타를 설득했다.
“우리 제국이 유신을 거치면서 근대화의 박차를 가해 여타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 제국은 영·미와는 국력이 조금 밀리는 형국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전함까지 장기 저리로 유상원조해주는 미국이니 각하께서 제고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야마가타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영국이라면 모르지만 솔직히 미국이라서 더 망설여집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국은 지금 우리의 맹방이기는 하나 멕시코와 필리핀에서 보듯이 그들은 자국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거야 영토를 넓히고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그들만이 갖고 있는 공략의 일환이라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 제국이 미국에 계속 의존한다면 저들의 마수가 우리에게 뻗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가타의 지적에 잠시 대답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자 총리대신 사이온지가 이토 히로부미를 거들고 나섰다.
“원수 각하. 지금은 당장 눈앞에 닥친 국가위기를 먼저 타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 본관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자칫 우리 제국이 미국에 말려들지 않을지 걱정이 돼서 그렇소.”
“그 문제는 당장의 위기를 타개하고 난 후에 걱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제고해 주십시오.”
총리까지 거들고 나서자 야마가타는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그럼 후작각하께 일임하겠으니 좋은 결과 부탁드립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허리가 바로 꺾였다.
“각하의 기대에 부응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야마가타의 승낙을 받아내자 한 숨 돌렸다고 생각한 이토 히로부미가 이번에는 총리를 불렀다.
“총리대신.”
“예, 후작각하.”
“미곡 수입은 어떻게 되었소?”
패전을 하고도 승전을 주장해야하는 일본의 내부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몇 년간 온 국력을 기울여 전쟁을 치룬 덕에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 배상금으로 국채를 상계처리하면서 일본국내로 자금유입이 되지 않자 경제는 거의 공황수준으로 처박혀 버렸다. 특히 한반도에서 쌀이 들어오지 않아 봄이 되면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을 정도였다.
“상해에는 지금 미곡이 동이나 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 인도차이나반도의 일본식 발음)에 있는 코친지나(코친차이나의 일본식 발음. 프랑스식민지)로 다시 사람을 급파해 놓은 상태입니다.”
“상해에 미곡이 없다고?”
“2년 전부터 조선에서 상해에 유통되는 미곡을 거의 독점해서 쓸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2년 전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그 일이 본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오?”
“본국에서 상해에 파견된 밀정들이 조선 상인들이 수입해가는 미곡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본국은 그동안 조선반도에서 염가로 들여오는 미곡으로 식량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으니 조선의 미곡수입에 대해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이토 히로부미는 입맛이 썼으나 그 문제를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쌀을 있는 데로 긁어왔었기에 조선 상인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상해까지 와서 미곡을 사가는 것은 조선의 국부가 유출되는 일이라 밀정들로서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로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후!~ 큰일이로군.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하겠다는 기치를 걸고 조선에서 미곡이 들어온다는 전제하에 지방에 있는 노동력을 대거 도시로 끌어들였는데 조선을 얻지 못하면 노동력을 다시 농업에 투입해야 하는 일이 생기겠어.”
이토 히로부미의 독백 같은 탄식에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독백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눈치 챈 이토 히로부미가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했다.
“미곡을 수입하러 불령(佛領) 코친지나로 사람이 내려갔다니 좋은 소식을 기다려보고 해군은 곧 요코스카에 입항할 미군전함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하시게.”
“알겠습니다. 각하.”
“자! 나는 빨리 미국에 선을 대봐야 하니 이만 일어들 납시다.”
이토 히로부미의 말이 끝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들 중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의 안색은 끝까지 펴지지 않았다.
일본어전회의 결과는 곧바로 북경의 일본공사관을 통해 대한제국에 통보되었다. 차준혁은 일본이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일전불사(一戰不辭) 하겠다는 통보를 하자 그 전문을 들고 그날로 귀국했다.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전면전을 벌인다는 소식은 세계를 강타했다. 특히 소식의 진화점이고 모든 나라의 공관이 모여 있는 북경외교가는 발칵 뒤집혀졌다.
그동안 일본의 식민지처럼 인식되던 대한제국이 만주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을 몰아내자 북경외교가가 한동안 엄청난 난리가 났었다. 그러다 이번에 일본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소식은 북경외교가를 또다시 뒤집어 놓기 충분했다.
전쟁에 대한 각국반응은 정확히 셋으로 나뉘었다.
먼저 대한제국과 그동안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독일이 대한제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고 영국도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에 대한 지원을 공개적으로 시사했으며 몇 년간의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러시아도 이번에는 일본에 대한 공개지지를 천명했으며 청국을 비롯한 나머지 다른 국가들은 모두 중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팥죽같이 들끓는 북경을 뒤로 하고 차준혁은 정기여객선을 타고 유유히 귀국했다. 이렇게 귀국한 차준혁은 곧바로 총리부를 찾았다.
몇 달 만에 찾은 총리부를 찾은 차준혁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감탄부터 했다.
“이야! 잘 만들었다.”
총리부 현관 정면에는 2층 높이로 세계전도가 제작되어 있었고 그 전도 한가운데에 한반도는 물론 만주일대와 사할린 등이 돋을새김으로 다른 곳과 달리 확연하게 표시 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는 국경의 경계가 요하가 아닌 요서지역을 포함한 만리장성으로 되어 있었다. 보통사람은 그저 지도가 잘못 제작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는 사람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특이한 것은 만주이북지역의 경계를 분명하게 표시해 놓지 않은 것이다.
한동안 지도를 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차준혁을 보고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알아봤다.
“아니. 자네는 차 공사가 아닌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의친왕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차준혁은 반갑게 소리쳤다.
“아! 형님전하.”
그러면서 몇 개월 만의 만남이라 반갑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의친왕이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래. 북경에서는 잘 지내는 거야? 아무래도 대륙이라 날씨가 무척 추웠을 텐데.”
“춥기는 했지만 공관에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견딜 만 했습니다.”
“다행이다. 지금 들어오는 길이야?”
“예. 회의참석 때문에 황제폐하도 알현하지 못하고 바로 총리부로 왔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같이 올라가자. 과인도 회의 때문에 들어왔어.”
두 사람은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중앙계단을 올라 3층의 총리집무실에 도착했다.
총리집무실에는 박충식을 비롯해 몇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모처럼 만난 차준혁과 인사를 나눈다고 실내가 잠시 소란스러웠다. 인사를 마치자 집무실 옆에 붙어 있는 소회의실로 자리를 이동했다.
소회의실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차준혁이 북경에서 각국과 협상한 경과보고와 함께 일본의 반응도 보고를 했다.
보고를 다 들은 박충식이 서두를 꺼냈다.
“결국 일본이 예상대로 결전을 불사하겠다고 나오는군.”
김종석 국방대신이 거들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