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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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도 외상의 분석이 아주 정확했소. 지금의 국제정세는 미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각국의 개별사정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소. 아마도 지금부터 몇 년간은 외교력이 빛을 발할 시기가 될 것이니 외상은 앞으로 각국에 파견될 공사들에게 이점을 염두에 두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오.”   

이범진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국익을 위해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대한제국은 1907년에 접어들면서 각국에 외교관을 다시 파견하기 시작했다. 파견되는 외교관들 중 공사는 대부분 명망 있는 인사들로 선임을 하였고 실무를 보는 영사와 주재무관을 신군출신으로 선임하여 신구가 조화를 이뤄나갈 수 있도록 배치했다.

회의를 마치고 차준혁은 모처럼 박충식과 함께 그의 사저를 찾았다.

박충식의 사저에 도착한 차준혁은 사저 마당에 쌓여 있는 수백 권의 고서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책들은 다 뭡니까?” 

“하하! 이게 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국사학회에 기증해오는 역사서라네.”

“예? 우리에게 역사서가 이렇게 많았습니까?”

“이건 빙산의 일각이야.”

“이것보다 더 있다는 말씀입니까?”

“들어가 볼 텐가?”

“예, 본지 오래되어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차준혁은 박충식과 함께 그의 사저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국사학회를 오랜만에 찾았다. 차준혁은 국사학회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방들이 전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

“퇴근시간이 넘었는데 방마다 불이 전부 켜져 있습니다.”

“역사서번역과 고증을 한다고 교수들이 수십 명씩 밤을 새면서 연구를 하고 있어서 그렇다네.”

“이 정도라니 열기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문 하나를 열고 들어서자 이번에 새로 지어진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단층으로 지어진 신축건물은 주변의 건물들과는 달리 벽돌로 지어져 있었고 길이가 아주 길어서 서고란 것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박충식이 서고로 들어서자 십여 명의 교수들이 책상에 앉아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책과 씨름하고 있었고 서고 정면에는 표어가 걸려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내일이 없다.】 

“신채호 선생이 지은 것이군요.”

“그렇지. 단재선생의 글이지.”

두 사람이 신채호가 지은 현판표어를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연구를 하던 교수 중 한 명이 황급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박충식이 그를 보고 반색했다.

“아! 단재(丹齋 신채호의 호)선생. 오늘도 귀가하지 않으신 건가?”

박충식은 신채호의 나이가 어렸지만 민족사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를 정립시켜 달라는 뜻에서 박충식은 꼭 그를 선생이라 존칭했다.

“새로 들어온 책이 있어서 그것을 보고 있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허참! 아무리 그래도 집에는 다녀오면서 연구를 하시게.”

“집에 가봐야 반기는 사람도 없어서····”

신채호가 머리를 긁적이는 것을 보고 박충식은 그제야 신채호가 부인과 이혼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집에는 자주 다녀오셔야지. 숙소에서 지내는데 불편하지는 않소?”

“필요한 옷가지를 가져 온 것이 많아서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책이 단재선생의 퇴근길을 막았는가?”

신채호가 책상에 놓인 책을 들면서 설명했다.

“아! 이 책은 고구려 영양왕 때 명장인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활약상이 기록된 대동운해(大東韻海)라는 역사서입니다.”

그러면서 책을 건네주자 책의 표지에는 ‘大東韻海’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한자는 거의 쥐약인 박충식은 내용을 열어보지도 않고 다시 건네주며 격려했다.

“나야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니 단재선생께서 잘 살펴보시고 올바른 역사를 정립해 주시게.”

“반드시 전하께 올바른 역사를 살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내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바쳐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신채호는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박충식이 물었다.

“서고 안을 둘러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러면서 직접 서고를 안내했다. 차준혁은 서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감탄사를 바로 터트렸다.

“이야. 그동안 상당히 많은 역사서들이 접수되었군요.”

차준혁이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신채호가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제 작년부터 시작된 역사바로세우기운동에 국민들의 열성적인 호응으로 많은 역사서들이 수집되고 있었는데 만주가 수복되고 나서부터는 국민들이 역사바로세우기운동에 엄청난 호응을 보이면서 희귀진본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도 저렇게 많은 역사서들이 쌓여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신채호의 설명을 들으면서 차준혁이 서고에 비치된 책들의 목록을 들쳐보았다. 가나다순으로 정리된 목록에는 삼성기(三聖紀)를 비롯해 화랑세기(花郞世紀)·단군세기檀君世紀)·삼성밀기(三聖密記) 등 수많은 역사서들이 적혀있었다.

“아! 이러한 책들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었군요.”

“저도 이렇게 많은 역사서가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고 참으로 많이 놀랐습니다. 계속 이렇게만 역사서가 수집된다면 정말 제대로 된 국사를 편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단재선생은 만주 집안(集安)은 다녀오셨습니까?” 

차준혁이 이렇게 묻자 신채호는 갑자기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회장님과 함께 다녀왔었는데 광개토태왕비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신채호가 이렇게 만주 집안에 다녀온 소감을 말하고 있을 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늦은 시간에 서고는 어인 걸음이십니까?”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 박은식이 서있었다. 문교대신 박은식은 박충식의 특별부탁으로 국사학회회장직을 겸직하고 있었다.

박충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회장님께서도 아직 퇴근하지 않으신 겁니까?”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열성을 보이고 있는데 국사학회장인 제가 나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박충식이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회장님까지 이러시니 학자들이 국사학회 교수만 되면 전부 생과부 되겠다고 사모님들께서 시위라도 하겠습니다.” 

박충식의 모습에 박은식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국사학회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집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적당히 하십시오. 이러다 모두 병나시겠습니다.”

하지만 박은식이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대한제국은 젊고 우리도 아직은 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젊음은 정신까지 젊고 건강해야 비로소 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를 젊게 하고 국민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과업을 맡은 우리 국사학자들에게는 한 시간도 소중합니다. 그리고 저희들 건강은 매일 아침마다 항상 하는 재건채조만으로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박은식의 말에 박충식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차준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두 사람이 야근문제로 한두 번 대화를 나눈 게 아니란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박충식은 두 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휴 졌습니다. 졌어요.”

“송구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같은 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연구를 한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라 전하의 명을 받들 수가 없는 저희들을 해량(海諒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달라는 뜻)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만주지역역사답사를 위한 인원 구성은 마쳤습니까?”

“그게 가려는 학자들이 너무 많아 인원조정 때문에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가시겠다는 분들은 모두 보내십시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민족의 고토를 답사하는 일인데 누구는 가고 누구는 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인원조정문제로 고심하던 박은식의 얼굴이 환해졌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그리고 가실 때 국어학회 교수들도 함께 다녀오십시오. 그분들도 아마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박은식이 아주 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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