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회: 6권-24화 열도침몰(列島沈沒) -->
국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며 어느 틈에 준비했는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사방을 뛰어다녔다.
특히 광화문 앞 주작대로는 몰려든 한성주민들로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이날은 전차 등 주작대로의 통행을 전면 금지해 놓고 있었다.
박충식을 비롯한 문관출신 각료들은 총리부에 모여서 항복발표를 듣고는 환호했다. 몇 몇의 대신들이 주작대로에 나가서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양국사이에 채결할 항복조인식을 남겨 놓고 있어서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박충식은 그랬기 때문에 오늘은 항복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즐기도록 정부는 나서지 말자며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국이 이렇게 환호하고 있을 때 김종석을 비롯한 삼군 대신들은 용산에서 일본으로 파병할 병력들 점검에 정신들이 없었다.
“2군단에서 차출된 병력은 어떻게 되었나.”
“지금 신의주를 통과하고 있어서 내일이면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삼도에서 차출되는 향토여단들은?”
“모두 부산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오키나와특전여단은 출발했다고 하던가?”
“아직 출발 전이라고 합니다.”
“그 병력이 먼저 규슈로 진군해야 야하타 제철소 인근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본격적으로 시작 할 수가 있으니 다시 연락해 최대한 빨리 움직이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대한제국에서 일본본토에 파견될 병력은 2군단과 3군단에서 각각 1개 여단이 하삼도에서 각각 선발된 3개의 향토여단 그리고 한성의 친위 1개 여단과 오키나와의 특전여단 등 총 7개 여단이었다.
김종석과 강명철 그리고 최경석은 북새통인 합동참모본부 상황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강명철이 가슴을 내밀며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고진감래라더니 그동안 애들 많이 썼는데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을 맞았습니다.”
김종석도 흐뭇한 표정으로 상황실을 바라봤다.
“지난 몇 년간 정말 고생들 많이 했어.”
그러면서 최경석을 보며 고마워했다.
“공군이 그동안 애를 많이 썼네. 고맙네.”
“우리야 비행선을 만든 것 밖에 한 일이 있습니까? 고생은 여기 계신 육군대신과 저 안에서 참모들을 진두지휘하고 계신 해군대신께서 고생이 많으셨지요.”
“그래도 인명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비행선이 제때 제작된 것은 물론 계속 공급이 이뤄져서가 아니겠나.”
강명철이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맞습니다. 비행선이 아니었다면 폭격을 못해서 만주를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는 아마도 수십만의 지상군이 열도에 상륙했어야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결국은 지상군이 북해도와 오키나와에 상륙하고 나서야 일본에 항복을 받아내지 않았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전쟁의 승패는 지상군이 좌우합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비행선이 없었다면 육군은 분명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인명피해를 봤을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적은 인명피해로 일본과의 전쟁을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공군의 도움 때문입니다.”
강명철과 최경석이 서로에게 공을 돌리자 김종석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이번 대일전쟁은 군사무기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직전인 이 시대의 덕도 많이 본 것도 있다고 봐야해. 조금만 늦었다면 우리가 지지는 않았겠지만 아마도 인명피해가 상당히 많이 났을 것이야.”
김종석의 말에 최경석이 동의했다.
“맞습니다. 만일 우리가 일제강점시기에 왔다면 친일파들이 완전히 득세하던 때라 한반도수복도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주수복은 더 훨씬 어려웠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겠지. 지금부터 몇 년 만 지나면 한반도에 들어와 있을 일본인만 해도 수십만이었을 것이고 일본군주둔부대도 지금보다 2배 이상은 되었을 거네. 거기에 만주와 연해주에는 아마도 수십만의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자리를 잡고 있었겠지.”
육군대신 강명철도 공감했다.
“어쨌든 지금까지 얻은 것이 전부 일본이 대국으로 커나갈 수 있는 시대적 이익이라고 보면 일본이 누릴 것을 우리 대한제국이 대신 누리게 되었으니 이것 만해도 우리로서는 아주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지금시대는 일본과 우리 대한제국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또 다시 헛된 야욕을 부릴 수 없도록 철저하게 뿌리부터 없애버려야 할 것입니다.”
김종석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우리 제국의 역량으로는 만주에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일본을 감시는 할 수 있어도 지금 당장 식민지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아쉽게도 저들의 야욕을 완전히 분쇄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래도 야하타 제철소와 북해도에 있는 무로란의 제철소를 우리 제국이 철저히 통제한다면 저들의 헛된 야욕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해도 야하타 제철소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무한정 강점할 수는 없잖은가. 저들이 배상금을 다 갚는다면 그때는 오롯이 돌려줘야지.”
“국방대신께서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일본이 또 다시 도발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시는군요.”
강명철의 질문에 김종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네. 이건 나뿐이 아니라 대공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고 있어.”
“그렇다면 이참에 일본이 그동안 만들어 놓은 군수산업을 철저히 무력화시켜야겠습니다.”
이 말에 대한 대답은 상황실에서 참모들을 지휘하다 세 명의 대신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오던 송의식이 했다.
“바로 보셨습니다. 우리 참모본부에서는 육군대신께서 지적하신 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참모본부가 계획하고 있는 방안을 한참동안 세 사람에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강명철이 제일 신이 났다.
“그 정도면 일본이 앞으로 고생깨나 하겠습니다.”
“고생이 아니라 일본이 다시 군사대국으로 서려면 아마도 수십 년은 피를 짜내야 할 것입니다.”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강명철은 크게 웃었지만 신중한 성격의 최경석은 우려를 표시했다.
“그렇게 심하게 거덜을 내면 일본이 반발을 하지 않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일본이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그들은 아예 우리 제국을 식민지로 삼아 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철저하게 온 국토를 유린하는 것은 물론 국민들 전부를 거의 노예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송의식의 설명을 듣자 우려를 표시하던 최경식의 고개도 저절로 끄덕여졌다.
“하긴 저들이 이전시대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것입니다.”
강명철이 강하게 나섰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니 참모본부장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병력도 7개 여단 병력을 차출하여 파병하는 것입니다.”
“메이지일왕은 물론 우리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던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볼만하겠습니다.”
강명철이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짓자 다른 사람도 따라서 함께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열도침몰(列島沈沒)
드디어 광무10년(1907) 11월 11일이 되었다.
대한제국 제2함대 소속 전함인 김충선 함에서 드디어 항복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조인식에는 대한제국대표로는 외무대신인 이범석과 2함대 사령관 공성기 제독이 참석했고 일본대표로는 메이지일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십여 명의 관리들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지금부터 대한제국과 일본제국간의 항복조인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먼저 대한제국 황제폐하를 대신하여 이범석 외무대신님과 공성기 제독께서 나오셔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시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있자 외무대신 이범석과 공성기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차례로 나와서 하얀 천으로 덮인 탁자에 놓인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자 사진기플래시의 섬광이 잠시 갑판을 휘감았다.
펑! 펑! 펑! 펑!······
잠시 그렇게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지정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다음으로 일본제국 천황폐하를 대신해 추밀원 의장이며 후작이신 이토 히로부미님과 일본내각의 외무대신인 고무라 주타로님께서 서명을 하시겠습니다.”
통역을 통해 사회자의 안내를 들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잠깐 어지러운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후!~”
그러다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고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그 뒤를 따랐다. 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가 마치 지옥과도 같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항복문서 앞에 도착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