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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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일본어로 작성된 두 벌의 문서를 보자 이토 히로부미의 어지럼증은 좀 더 심해지자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

휘청~

그러자 뒤에 있던 고무라 외상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각하! 괜찮습니까?”

“괜찮네.”

‘내가 조선 놈들이 보는 앞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이토 히로부미는 항복조인식장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자신을 자책하면서 몸을 바로 했다.

“앉으십시오. 각하.”

이토 히로부미는 고무라 외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침침하게 글이 겹쳐보였다. 고무라 외상은 그 모습을 보고 손으로 사인할 곳을 짚어주었다.

“이곳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무라가 짚어주는 곳에 서명을 마치자 고무라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서명을 끝냈다.

“문서교환을 해서 다시 날인을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가 있자 공성기 제독과 고무라 외상은 서로 사인한 문서를 주고받았고 네 사람은 그 문서에 각각 날인을 끝마쳤다.

“양국은 각각 날인한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교환하겠습니다. 양국 대표 분들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이범진은 이토 히로부미가 고무라 외상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문서를 들고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성기 제독은 이범진과 같이 일어나며 처음으로 실물을 보는 이토 히로부미를 자세하게 관찰했다.

‘키가 정말 작군. 기록사진에서 볼 때는 기세가 느껴졌는데 이번 전쟁에서 패전하고 나서 그 기세가 대부분 사라졌나보군.’

공성기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항복조인식에 나온 이토 히로부미는 키 작고 힘없는 66세의 늙은 노인에 불과했다. 

이윽고 대한제국 이범진 외상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서서 항복문서를 교환했다.

펑! 펑! 펑! 펑! 펑!·····

순간 수십 명의 기자들이 터트리는 플래시소리가 다시 갑판을 진동했다.

이범진이 먼저 손을 내밀자 이토 히로부미가 손을 마주잡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국어로 말을 했지만 각각 상대국 언어로 대화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상대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이범진도 예의상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공성기 제독과 고무라 주타로 일본외상도 각각 악수를 나누자 기자들이 자세를 부탁했다. 

“자! 네 분 서로 악수를 나누시면서 이쪽을 봐주십시오.”

이범진은 당연히 입이 귀밑에 걸렸지만 악수를 나누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은 참혹한 심정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었다.

펑! 펑! 펑! 펑! 펑!·····

이토 히로부미의 일그러진 표정은 일본의 표정을 그대로 대변하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기록사진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김충선 함에서 거행된 한·일 양국의 항복조인식은 상공에 떠있는 웅비비행선에 의해 촬영되었다. 촬영된 영상은 황제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특별히 몇 척의 웅비비행선의 중계까지 거치면서 경운궁(慶運宮)석조전의 대회의실에서 실시간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 그토록 짐에게 오만방자하기만 하던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이 참으로 볼만하구나.”

마치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황제의 모습은 대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웃음을 짓게 했다.

“하하하! 하하하!”····

민영환이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경하(慶賀)드리옵니다, 폐하. 드디어 일본이 우리 대한제국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사옵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경하 드리옵니다. 폐하.”

박충식을 비롯한 만조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자 황제의 용안은 더 할 수없이 밝아지면서 조금 전 보다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고맙소. 이 모든 것들이 경들이 고생하신 덕인 것을 짐은 잘 알고 있소. 정말 고생들 많이 했소이다.”

“황공하옵니다.”

황궁예법이 많이 간소화되었다고는 해도 이럴 때는 모두가 함께 황제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박충식 등도 이제 이런 인사에는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던 황제가 박충식을 돌아봤다.

“대공 이제 우리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제국이 된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제국은 강역은 고구려의 옛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고 이제 일본마저 발아래 꿇렸으니 서양열국과 견주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대공의 말을 들으니 짐이 드디어 진정한 황제가 된 것 같소이다.”

“폐하께서는 이전에도 황제이셨고 지금도 당연히 황제이시고 앞으로도 영원한 우리 대한제국초대황제이십니다.”

“하하하하! 참으로 즐겁고도 기쁘도다. 짐에게 이런 날이 있을 줄 짐작조차 못했도다.”

이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감사원장 최익현이었다.

“폐하, 창업보다 수성이 몇 배가 힘이 드는 법입니다. 우리 제국에 항복한 일본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는 제국의 수성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옵니다.”

최익현의 말 한마디에 한창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오늘의 행사를 주관하고 있던 국정홍보처장 장주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 양반은 꼭 이럴 때 나서서 분위기를 죽이네. 그나저나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던데 괜찮으신지 모르겠구나?’

최익현의 말에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자 박충식이 웃으며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최 원장님.”

“예. 전하.”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마음껏 즐거워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최익현도 자신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자 내심 당황해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박충식의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물론입니다. 유사 이래 오늘 같이 기쁜 날이 어디 있었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자 황제가 크게 웃으며 농담을 했다.

“하하하! 우리 제국의 스승께서도 허락하셨으니 백관들은 이제 마음껏 즐거워하라.”

“하하하하!·······”

황제의 농담에 모든 사람들이 파안대소를 했고 최익현은 얼굴이 붉어졌으나 그 자신도 누구 못지않게 즐거웠다.

‘황제께서 정말 많이 변하셨구나. 이제는 진정 제국의 황제가 되셨어.’

이렇게 생각하자 슬그머니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내가 죽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잡았으니 이제 내일 당장 죽어도 정말 여한이 없구나.’

최익현은 얼마 전부터 노환으로 눕는 날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벌써 사직상소를 올렸겠지만 대한제국이 굳건히 설 때까지 나라의 기틀을 직접 바로 잡겠다는 생각에 감사원업무를 손에 놓지 않고 있었다.

장주현은 최익현이 남이 볼세라 슬며시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노환 탓인지 고개를 돌린 최익현의 얼굴이 많이 수척한 것을 보고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참으로 대단한 어른이시다. 위정척사론(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고 서양문물을 배격하자는 주장)의 태두셨던 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새로운 변화에 동참하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제국을 위해서라도 또한 나라의 스승으로서도 부디 오래 살아 계셔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저분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구나.’

장주현이 이렇게 속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국정홍보처직원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보고를 했다.

직원의 보고를 받은 장주현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광화문의 환영식장으로 나가실 시간이십니다.”

“오! 그런가?”

“예, 신이 모시겠습니다.”

황제는 장주현의 말에 박충식을 찾았다.

“대공, 짐과 같이 나갑시다.”

“예, 폐하.”

황제가 박충식과 함께 먼저 석조전 대회의실을 나서자 뒤이어 의친왕 등 황실인사들과 감사원장 최익현과 대법원장 허위, 그리고 내각의 대신들이 뒤를 따라 나섰다.

황제의 행차답게 석조전을 나서자 궁내성의 내관이 먼저 소리쳤다.

“폐하께서 거둥하십니다!”

내관의 외침이 있자 경운궁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관과 여관들 중 건물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내시로 불리는 내관들의 숫자는 120명이 정원이었고 궁녀로 불리는 여관들 숫자는 많을 때는 1,000여 명 가까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내관과 여관은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차츰 숫자가 줄어들었으나 신군이 도래하고 난후 공식적으로 내관제도가 폐지되었다.

내관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평생 황제만을 모셔온 이들을 당장 길거리로 내몰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스스로 물러나는 내관을 제외하고는 무예가 출중하거나 무예에 재능이 있는 내관들은 시종무관부로 부서를 옮겨 근무를 시켰고 또 일부 내관들은 정부부서로 보직을 변경시켜 주었으며 황제와 귀비 등 황실가족을 지근거리에서 모셔야 하는 30여 명의 내관들은 궁내성 관리로 재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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