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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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에서 사세보접수를 위해 함께 온 병력은 대한제국 전함건조관련 기술병력이었다. 

최창교 주임원사는 마라도의 선내정비를 담당하다 해군전함건조 부서에 자원한 최고기술자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기술병력 중 장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나서서 통역을 대동하고 일본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일본군참모진에서도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최창교가 바로 본론을 들어갔다.

“각 부문 별로 기술자들을 구분해 놓았습니까?”

일본군 참모는 기다렸다는 듯 가져온 서류를 최창교에게 건넸다.

“관련 자료가 여기 있습니다.”

최창교는 일본어를 몰랐으나 숫자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철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넘기고는 바로 다음 일을 시작했다.

“그럼 인원분류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때부터 일본해군의 전함기술자들과 민간인 기술자들의 확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확인 작업에는 함께 온 수백 명의 병력이 분담해서 이뤄졌다.

“이름, 나이, 담당부서, 직위, 경력, 가족관계····”

사세보에는 일본해군공창은 물론 일본최고전범회사인 미쓰비시조선소가 있는 곳이라서 무려 5천여 명에 가까운 기술 인력이 있었지만 수 백 명이 달려들어 분류를 하니 예상보다 크게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세보에서 분류한 인원 중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수송선에 태워져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전역에서 선발된 선박건조 기술자들을 거재도와 황해도 송림 그리고 함경도 원산항으로 분리 수용했다. 이 세 곳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인포로들을 이용해 선박건조를 위한 기반시설을 이미 갖춰 놓고 있었다.

전함건조기술자들이 승선을 하는 동안 남아있게 된 일본기술자들과 최창교의 지휘를 받는 수백 명의 대한제국기술 인력은 조선소의 선거로 이동했다.

“휘우!~ 엄청나구나.”

최창교 주임원사는 상당한 폭격피해를 입은 조선소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서 선거에서 건조 중 폭격을 받아 그대로 주저앉은 대형전함을 보고 일본군참모에게 질문했다.

“전함이 상당한 크기입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입니까?”

“북해도에서 침몰한 사쓰마 전함의 자매함으로 건조 중에 있었습니다.”

최창교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무 부서져 계속 건조할 수가 없겠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없는 일이지. 일단 이 전함의 해체작업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류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일본군참모는 최창교 원사에게서 대한제국과 배상금정산에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받고는 부하를 불러 해체를 지시를 했다. 그러자 남아있던 기술자들 중 일부와 대기하고 있던 잡역부들이 전함에 달라붙어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최창교를 비롯한 해군관계자들은 해군공창은 물론이고 미쓰비시조선소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해체이전하거나 바로 이전할 수 있는 시설물들을 빠짐없이 정리해서 수송선박에 전부 옮겨 싣기 시작했다. 

사세보 일대에서 벌어진 이러한 정리 작업은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 당시 패전으로 최악의 경제사정을 겪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몇 개월간 유지되는 일자리는 황금보직이나 다름없어서 조선소입구에는 일자리를 얻으려는 일본인노동자들로 항상 북적일 정도였다.

최창교가 조선소를 돌아다니면서 분류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일본해군 장병들 중 전함건조기술자가 아닌 병력은 육군과 똑 같이 며칠간의 식량을 받고는 전원귀가조치 되었다. 

이러한 조선소 정리 작업은 동경만의 요코스카해군공창과 히로시마 옆 구레의 해군공창 그리고 일본이 잠수함을 건조를 위해 세운 가와사키조선소에서도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일본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의 고도인 교토에서는 특별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의식은 의친왕이 대한제국황실의 대표자격과 대한적십자사 총재로서 의식을 직접 주관하고 있었다. 

“차렷.”

“어깨위에 총.”

“발사.”

탕! ·······

지휘자의 지시로 10명의 대한제국군이 쏜 조포(弔砲)가 하늘로 발사되었다. 

“발사.”

탕!······

10명이 마치 한 명이 쏜 것 같이 한 소리를 내며 21발의 조포가 모두 쏘아지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음은 126,000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씻김굿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전라도진도에서 특별히 초청된 춤꾼과 소리꾼 그리고 사물패들이 나와 의친왕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씻김굿을 벌일 준비를 시작했다. 이 의식은 다름 아닌 교토에 있는 이총(耳塚)에 잠든 126,000명의 원혼들의 국내송환을 위한 개장의식(改葬儀式)이었다.

곧이어 씻김굿이 시작되었다. 죽은 사람 원혼을 풀어주는 해원(解寃)굿인 굿판은 진심을 담은 춤꾼의 춤사위와 소리꾼의 절절한 소리에 눈물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씻김굿이 벌어지고 있는 이총 옆에는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인 풍국신사(豊國神社)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풍국신사는 열도폭격 때 완전히 전소되어 그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었으나 대한제국정부에서는 이 풍국신사의 복구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여러 엄숙한 절차를 거친 끝에 개장된 이총은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탓에 관곽은 물론이고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의친왕의 지시로 이총의 봉분 흙의 전부는 물론이고 봉분 밑으로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4미터까지 깊게 파서는 그 흙도 모조리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리고 동작동국립묘지에 똑 같은 크기로 땅을 판 뒤 다시 안장을 해서 원혼들을 영면에 들게 만들었다.

이 같은 유해송환은 이총만 거행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공과 장인으로 강제로 끌려왔다 일본에서 죽은 사람들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본국으로 유해라도 송환되기를 원했다. 대한제국정부에서는 정부차원에서 이를 전부 수용해 원하는 사람들의 모든 유해를 본국으로 이송한 뒤 이총 옆에 납골당을 만들어 정중하게 안치시켜 주었다. 

이러한 유해송환과 함께 죄인송환도 이뤄졌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항복하자 곧바로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아 명성황후시해사건 주범인 미우라 고로 당시 공사와 시바 시로(柴四郎) 등 당시 일본공사관직원들,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와 주필과 편집장 그리고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등 신문사의 가담자 이십 여명, 거기다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등 규슈와 구마모토 현 출신 낭인 56명은 물론이고 도성훈련대 1대대장인 이두황과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송병준 사위 구연수를 비롯해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한국인가담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한성으로 압송했다.

이렇게 압송된 자들은 이들 같은 직접 가담자들만이 아니었다. 명성황후시해를 공공연하게 주도했던 극우단체인 현양사(玄洋社)설립자 도야마 미쓰루(頭山 満)와 초대회장인 히라오카 고타로 등 핵심간부 십여 명도 모조리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여기에 현양사 산하단체로 일진회를 후원하며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날뛰고 대동아공영을 주창하던 극우단체인 흑룡회(黒龍会)설립자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와 핵심간부 이십여 명 그리고 민간단체를 조직해 정한론과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던 극우분자들도 모조리 체포해 한성으로 압송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고 여론몰이를 하던 극우주의자들까지 압송하자 압송된 숫자만도 무려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압송된 자들은 전부 일반법정이 아닌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단 한명도 예외 없이 모조리 사형을 시켜버렸다.

일본우익을 대표한다며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 온갖 궤변을 만들어내고 대동아공영이란 자의적 주장을 펼치면서 일본이 아시아를 집어 삼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던 자들도 예외 없이 모조리 사형을 시켜버리자 일본에서는 대한제국을 비방하던 단체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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