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회: 6권-35화 -->
이해 겨울 일본은 일본유사 이래로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대한제국에 당장 지급할 금년분의 전쟁배상금액은 물론이고 생산기반시설이 와해된 일본은 국민들이 겨울을 넘길 수 있도록 식량을 수입할 국고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전쟁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다 내 줄듯 지원하던 미국이 패전을 하자마자 안면을 바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차관을 구하기 위해 손 벌릴 곳조차도 마땅히 없는 지경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이러한 일본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금년에 배정된 배상금액의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1년 예산과 거의 맞먹는 2억 원이나 되는 배상금을 지급할 금액이 일본의 국고에는 없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동경에 새롭게 개설한 대한제국공사관에서 일본 외상 고무라 외상과 북경총영사로 있다가 이번에 주일공사로 영전된 이준(李儁) 공사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고무라 외상은 먼저 이준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귀국이 본국의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해주셔서 경제의 숨통이 조금은 트였습니다. 이점 먼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양국이 활발한 교류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본국이 필요해서 구입하는 토지인데 귀국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대한제국은 항복협상에서 대한제국화폐개혁 당시 일본이 사용한 일본제일은행권의 교환을 요구했고 일본은 당연히 일본은행권으로 교환을 해주었다.
대한제국은 1억이 넘는 막대한 금액을 일본은행권으로 교환받은 뒤 그 금액을 본국으로 가져오지 않고 일본의 주요항구마다 대한제국전용공단을 조성한다는 구실로 대규모 토지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매입했다. 거기다 앞으로 영사관등 각종공관 짓는다는 핑계로 동경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도시의 중심지에 있는 토지도 대규모로 매입했으며 지금도 매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일부러 돈을 찍어서라도 경제를 살려야 할 마당에 1년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돈을 풀고 있는 대한제국에게 오히려 고마워했고 행정력을 동원해 토지매입을 지원할 정도였다.
더구나 전후라 일본의 토지는 거의 헐값에 가까울 정도라 대한제국은 엄청난 면적의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눈 이준은 고무라 외상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외상께서 무슨 일이 있으셔서 본 공사관을 방문 하신 것입니까?”
“다름 아니라 금년에 귀국에게 넘겨야할 배상금에 대해 의논을 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배상금에 대해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준도 일본의 제정이 최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침을 떼고 역으로 질문을 하자 고무라 외상의 얼굴이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일본의 제정이 요즘 최악입니다. 그래서 배상금을 지급할 형편이 안 되어서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외상각하.”
“말씀하십시오.”
“본국은 귀국의 형편을 봐드려 배상금도 분할 상환하도록 해주었고 거기다 초기에는 배상액을 낮춰주었는데 처음부터 무조건 어렵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이준이 정색을 했다.
“처음으로 배상하는 것인데 귀국은 중앙은행에 있는 금이라도 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무라 외상이 펄쩍뛰었다.
“그 금은 금본위제인 본국이 태환을 위해 준비해둔 것이라 절대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각하, 지금 귀국국민 중에서 화폐의 태환을 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일본은 외국에 수출입도 당분간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준의 말대로 일본은 일본은행에 태환을 위해 천여 톤의 황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우리 대한제국이 귀국의 항복을 받고도 일본은행을 수색하지 않은 것은 지금과 같은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준이 이렇게 말을 하자 고무라 외상은 반박도 하지 못하고 12월 말의 날씨임에도 이마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일본은 본래부터 금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이고 지금은 국방비지출도 하지 않고 있어서 본국에 금을 지급한다고 해도 곧 복구될 것으로 본 공사는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이준 공사가 거듭해서 중앙은행에 보관된 금이라도 상환하라는 요구를 하자 잠시 답변을 하지 못하던 고무라 외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공사각하의 말씀은 돌아가서 총리대신과 협의해 보겠습니다만 금년에 상환할 배상금 전액을 금으로 드리기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자 이준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본인도 전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만일 남은 배상금은 어떻게 정리하실 계획이십니까?”
“배상금조로 자원개발권을 넘겨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고무라 외상의 말에 이준은 깜짝 놀랐다.
“예? 자원개발권이요?”
“그렇습니다.”
“자원개발권이라면 광산이나 목재채취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음!~”
이준 공사는 생각지도 않은 고무라 외상의 제안을 듣고는 잠시 생각했다.
“만일 대한제국이 자원개발권으로 받은 광산을 개발한다면 거기서 채굴되는 자원은 어떻게 합니까?”
“자국민과 같은 세금을 납부하면 그 나머지 물량의 전부를 대한제국이 반출할 수 있도록 조처 해드리겠습니다.”
이준이 고개를 저었다.
“귀국이 주는 자원개발권으로 얼마의 산물이 나올지도 모르는 곳을 개발을 하고 또 그 광산에서 나온 자원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금을 부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흠!~”
이번에는 고무라 외상이 고민을 했다.
“일단 그 문제는 돌아가서 내각회의를 열어봐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본관도 귀국의 제안을 본국에 보고해서 명령을 받아놓겠습니다.”
고무라 외상이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준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공관 정문까지 나갔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해 가십시오.”
고무라가 돌아가자 이준은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공관 옆에 새로 공관을 신축하고 있는 공사장을 눈으로 둘러봤다. 동경에 있는 대한제국공관은 그 면적에서 우선 다른 외국공관을 압도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이 남산에 공사관을 지을 때와 같이 토지를 강제로 빼앗지 않고 교환된 일본화폐를 이용해 일본정부의 도움을 받아 일본왕궁 부근에 일본왕궁과 거의 비슷한 어마어마한 면적의 토지를 매입했다. 면적은 비록 넓었으나 왕궁부근이라 폭격을 심하게 받아 성한 건물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일본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매입은 예상보다 쉽게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토지를 매입한 대한제국은 임시로 사용할 공관건물을 제외하고는 많은 인부들을 고용해 그 넓은 면적의 부지를 깨끗하게 정비했다. 그리고는 공사관경비를 위해 대대병력이 상주할 병영은 물론이고 한국식 조경을 한 정원과 남아도는 일본 돈을 이용하여 3층으로 된 대규모 공사관본관건물을 전부석재를 이용하여 신축하고 있었다.
‘저 본관건물이 다 지어지면 볼만할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규모가 일본 왕궁에 못지않을 것이야.’
이준은 설계도면을 기억해내며 준공된 건물의 오습을 상상하다 고개를 돌려 일본왕궁을 바라봤다.
넓은 해자(垓字)에 둘러싸여 있는 일본왕궁도 건물이 전소된 탓에 지금 왕궁을 신축 중에 있었다. 본래는 왕궁이 신축되는 것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야 하지만 폭격으로 대부분의 나무가 소실 된 탓에 해자 너머에 있는 대한제국공관에서도 잘 보였다.
‘우리 공관본관은 석조로 지어지고 있는데 일본왕궁은 석조로 지을 자금이 없어서 목조로 지어지고 있으니 이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대한제국공사관과 일본왕궁의 신축은 이렇게 양국의 처지를 말해주듯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었다.
며칠 후 양국은 금년의 배상금을 절반은 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자원채굴권과 대물로 상환하기로 협상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이 대한제국에 넘긴 자원개발권이 바로 규슈의 가고시마지역 광업채굴권과 함께 대물로 받은 것이 대한제국에서 폭발적인 수요를 보이고 있는 시멘트와 더불어 후쿠오카의 지쿠고(筑後)탄전에서 생산되는 코크스의 원료인 역청탄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으로 화전양면공작을 실시했다. 먼저 동경이 있는 혼슈는 적절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으며 대한제국과 가까운 규슈는 문화적인 교류를 활용한 유화공작을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특히 후쿠오카는 대한제국의 영토가 된 대마도와도 가깝고 부산과는 겨우 2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한반도에서 최단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인 이유로 대한제국은 후쿠오카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해 유화공작을 위한 교두보로 삼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야하타 제철소는 물론 후쿠오카에 대대적인 개발 그리고 가고시마의 자원개발권 등 규슈지역은 대한제국의 의도대로 차츰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협상에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의 자원개발권을 요구한 까닭은 이사(伊佐)에 있는 히시카리 광산 때문이다. 이 광산은 이때는 개발이 되지 않고 1980년대 초에 발견된 금광으로 연간 채굴량이 10톤이나 될 정도로 채굴량도 엄청났지만 순도도 세계최고수준으로 지금도 매년 7~8톤의 금이 채굴될 정도로 일본최고의 금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