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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혁도 원세개가 이렇게 반응을 할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질러본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귀국이 본국에게 대물로 줄 것이 없지 않습니까?”
“한 번 찾아봅시다. 과연 무엇으로 무기대금을 지불해야 할지를 말이오.”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 대한제국도 귀국에 무기를 온전히 양도하려면 여름은 지나야 하니 아직 시간은 조금 있습니다.”
해주의 소총제작공장에서는 일본의 야하타 제철소에게 대대적으로 공급받는 강제(鋼製)를 이용하여 광무보총을 금년 들면서 드디어 양산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금년 말까지 전군에 보급을 마친다는 목표로 1월부터 본격적으로 일선부대에 보급을 시작되었으며 광무보총보급은 가장 먼저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는 북방군부터 기존의 소총을 대체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세개는 자신의 수족인 북양신군의 무력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대한제국이 노획한 일본소총이 너무도 탐이 났다. 대한제국도 광무보총이 보급되면 잉여물자가 되어 창고에 쌓여 있어야할 일본산 소총을 어떤 식으로든 처분하는 것이 좋았다.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협상이었지만 아쉽게도 좀체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수입이 엉망인 청국에게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서태후가 죽음이 얼마 남지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이 안타까운 듯 오히려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거기다 경친왕의 노골적인 매관매직으로 임명된 관리들이 하나같이 탐관들뿐이라 청국의 국고는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다. 그랬기에 무기구입대금예산은 세울 생각도 못하는 원세개는 탐이 나는 노획무기를 대물로라도 매입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서양세력과 이해관계가 상충될 이권개입계획이 없었던 대한제국으로서는 청국이 제시한 자원개발권은 마뜩치 않는 제안이라 협상은 뚜렷한 성과 없이 시간만 끌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답답해 진 것은 원세개였다.
권력을 쥐고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번도 못 가진 적이 없었던 원세개는 탐이 나는 노획무기를 얻지 못하자 여러 방법을 모색하다 어느 날 경친왕을 찾게 된다.
원세개는 경친왕의 앞에서 처음으로 정색을 했다.
“전하, 신(臣) 직례총독이며 외무부총리교섭통상대신 원세개가 경친왕 전하께 청이 있사옵니다.”
경친왕은 자신과 함께 청국조정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원세개가 평상시와 달리 갑자가 직책까지 줄줄이 거론하며 정색을 하자 웃음을 지었다.
“하하! 원 총독이 오늘 무슨 청이 있기에 이렇게 거창하게 나오는 것이오?”
“신이 그동안 대청제국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노심초사해 왔으나 이번에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사옵니다. 그래서 청국의 국정을 이끌어나가시는 전하께 도움을 청하고자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경친왕은 원세개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나서자 자신도 계속 웃으며 대할 수는 없었다.
“원 총독이야 우리 대청제국의 지주나 다름없는데 과인이 무얼 못 들어 주겠소. 말씀해 보시오.”
원세개가 그동안 차준혁과 추진하고 있는 무기 도입협상 문제를 거론하자 경친왕의 이마가 바로 찌푸려졌다.
“경도 아시다시피 지금 각 성에서 올라오는 거의 모든 세금이 황태후마마가 계시는 이화원의 금고로 들어가고 있어서 국고가 텅 비어있는 마당에 어디서 그 많은 자금을 끌어들인다는 말이오. 더구나 한국에서는 우리가 넘겨주겠다고 하는 자원개발권도 서양의 눈치를 보느라 거부하고 있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소?”
“그래도 45만 정의 소총과 1,000여 문의 대포라면 우리 대청육군은 단숨에 최고의 무장을 갖춘 정예군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원세개의 말을 듣는 경친왕도 답답했다. 그동안은 원세개가 자신에게 뇌물을 바쳐온 것은 물론이고 병력을 유지하는 비용도 본인이 알아서 조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원세개가 군자금문제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는 생각 밖이었다.
톡 톡 톡·······
잠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고민하던 경친왕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황태후마마만이 풀 수가 있겠구려. 알았소. 내 이화원에 들어가서 황태후께 주청을 드려보리다.”
이즈음 서태후는 병색이 짙어지면서 수석군기대신을 맡고 있던 경친왕과 일부 황족을 제외하고는 접견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어서 원세개도 거의 알현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백골난망입니다.”
원세개의 인사는 받았지만 경친왕의 입에서는 한숨과 함께 자신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 경도 아시다시피 요즘 들어 황태후마마의 성정이 예전 같지 않아 과인이 진언은 드려보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소.”
그러면서 경친왕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런 문제는 유폐되신 황상께서 나서시기만 하면 단 번에 해결될 문제인 것을 참으로 안타깝구나.”
경친왕의 독백을 원세개도 들었으나 그는 광서제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터라 듣고도 모른 척했다.
경친왕의 예상대로 다음날 이화원을 찾아 서태후에게 무기구매에 대해 진언을 했으나 서태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지만 경친왕도 자국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대한제국이 보유한 일본산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몇 차례에 걸쳐 서태후에게 진언을 더 했었지만 역시 불가라는 차디찬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죽기 일보직전까지 탐욕을 부리는 서태후의 전횡에 군사력증강을 바라고 있는 청국도 답답해졌지만 실상 대한제국도 상황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일 협상이 계속 늦어지다 청국에 광무보총의 보급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게라도 된다면 잉여물자로 전락한 일본군무기를 헐값에 넘겨야 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차준혁은 당분간 원세개가 불러도 만나주지 않고 공사관에 거의 칩거하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참 이 넓은 대륙에 우리가 발붙일 데가 이렇게 없다는 말인가? 본국에서는 이 협상의 전권을 나에게 부여해주어서 어떻게 해서든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참으로 걱정이다.’
고심을 하고 있던 차준혁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 맞아! 일본방식이 있었지.”
이렇게 소리치며 일어나 한동안 서성이며 골똘히 생각을 하던 차준혁이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는 옆방에 대기하고 있는 참서관 이상설을 불렀다.
“이 참서관.”
부르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이상설이 바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오 판임관에게 지시해서 직례총독공관에다 원 총독과의 면담신청을 하도록 하게.”
몇 날 며칠 고심을 하던 차준혁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이상설의 안색이 환해졌다.
“좋은 방안이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네.”
“알겠습니다. 소관이 오 판임관과 함께 직접 직례총독공관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기분이 좋아 밖으로 나가는 이상설의 뒷모습에 차준혁이 모처럼 미소를 지으며 협상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었다.
얼마 전부터 칩거하면서 만남을 미뤄오던 차준혁의 면담신청을 원세개는 반색을 하며 승낙했으며 두 사람은 이날 바로 회동을 가졌다.
“차 공사께서 먼저 본관을 만나자고 한 것을 보니 무슨 좋은 방안이 생겼는가 보오.”
“그렇습니다.”
원세개가 흥미가 바짝 동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해 보시오. 그렇지 않아도 본관도 무기도입문제로 고심을 하던 참이었소.”
“총독께서는 본국이 보유한 무기에 대한 가격을 후히 쳐주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물론이오. 본국의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자금만 있으면 후한 값을 쳐서 매입하고 싶은 게 본관의 생각이오.”
“그렇다면 그렇게 해 주십시오.”
원세개가 난색을 표시했다.
“그게 지금은 예산문제로 여의치가 않소.”
“일단 무기대금의 값을 후하게 매겨주시면 그 금액으로 귀국의 토지를 매입하겠습니다.”
“토지를 매입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원세개가 차준혁의 제안에 의아해 했다.
“일본을 포함해 서양각국은 힘으로 협상해서 본국영토를 할양받아왔었는데 귀국은 돈을 주고 매입을 하겠다는 말이오?”
“본국과 귀국은 오랜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본국이 힘이 생겼다고 귀국의 영토를 서양오랑캐같이 무단으로 강탈하겠습니까? 우리 대한제국은 정당한 대금을 지급하고 토지를 매입하고 싶습니다.”
원세개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고마운 말이오. 서양각국은 물론 일본도 마치 도적과 같이 강탈하려고만 하지 귀국같이 매입하겠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소이다.”
차준혁이 말을 딱 잘라 정리했다.
“본국은 그들과 달리 예를 숭상하는 나라입니다.”
차준혁의 말에 원세개의 표정이 더욱 환해졌다.
“그래, 어느 땅을 매입할 생각이오.”
“그전에 먼저 무기구입대금의 결정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