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회: 7권-16화 -->
“그 이유는 솔직히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영사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그동안 미국은 일본이 우리 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것에 동의한 것은 물론 한일전쟁 당시 일본에게 엄청난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본국과 미국과는 반드시 풀어야할 구원(舊怨)도 있고 해서 미국이 강점하고 있는 필리핀과 괌을 견제할 수 있는 마리아나제도와 캐롤라인제도를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바이페르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각하의 제안을 잘데른 공사각하와 함께 심도 있게 검토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면담을 마친 바이페르트는 바로 일어나 독일공관으로 가서는 잘데른 공사와 의논을 한 뒤 그의 동의를 얻고는 차준혁의 제안을 바로 독일본국에 보고하기에 이른다.
다음날 협상을 마친 제말 파샤와 그 일행, 그리고 바이페르트는 귀환을 위해 다시 비행선에 올랐다.
이번에 그들의 행선지는 북경이 아닌 상해였다.
비행선의 규모가 크거나 가스보충시설이 있었다면 이스탄불까지 운항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규모로는 인도까지는 데려다 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제말 파샤일행이 오스만제국에서 타고 온 선박이 상해에 있었기에 비행선여행은 아쉽게도 상해에서 멈춰야만 했다.
제말 파샤의 귀환은 여의도에서 간단한 송별연과 함께 이뤄졌으나 차준혁의 북경 복귀는 독일공사 잘데른의 요청으로 잠시 늦춰졌다.
차준혁이 독일에게 한 제안은 사견임을 전제했지만 대한제국이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 따른 것으로 해양영토 확보차원에서 진행된 공작의 일환이었다.
그랬기에 독일에서의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한성의 몇 명은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 했고 차준혁도 그 중 한 명에 들어갔다. 독일본국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차준혁은 이런 초조감을 잊기 위해 거의 매일 국사학회를 찾아 새로 번역된 역사서를 읽거나 신채호 등의 교수들과 각종토론을 하면서 지냈다.
이 무렵 대한제국의 역사관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박은식과 신채호가 주도하는 국사학자들의 공으로 김부식의 사대주의에 입각한 삼국사기의 굴종된 역사관을 완전히 벗어나서 철저한 고증에 의한 민족적역사관을 확고하게 정립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이 국사학회에 들른 차준혁은 신채호가 넘겨준 한 권의 두루마리를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건네받으면서 감탄했다.
“아!~~ 이것이 바로 신라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작년 초 둔황(돈황 敦煌)에서 막고굴을 지키고 있던 태청궁 도사 왕원록(王圓籙)에게 거금을 주고 매입한 유물 중에서 발견된 원본입니다.”
“아!~”
차준혁은 신채호의 설명을 듣고 감탄사를 다시 터트렸다. 이미 뒷면에 다른 종이로 배접이 되었지만 혹시나 손실될 것을 걱정해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왕오천축국전은 폭이 30여㎝에 길이가 무려 358㎝나 되는 아주 긴 두루마리였다.
“어떻게 이런 귀중한 보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참으로 대단합니다.”
“아마도 둔황의 건조한 환경 때문에 유물이 훼손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지난 1900년에 발견되었을 때까지 사방이 막혀 있던 곳에 거의 밀폐된 채로 보관되어 있어서 모든 유물의 보관상태가 오랜 보관기간에 비해 상태가 양호합니다.”
“매입한 유물의 규모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막고17굴의 장경동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이 무려 5만 여점이 넘었습니다.”
차준혁이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게나 많았습니까?”
“예, 그래서 유물을 싣고 오기 위해 웅비비행선이 십여 차례 왕복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대한제국이 둔황석굴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발단에 의해서였다. 웅비비행선 중에서 2차로 만들어진 웅비5호선이 시험비행을 위해 중국북부를 시험비행하다 신강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때 웅비5호기장인 박용진 대위가 이 시기 돈황석굴 중 막고17굴에서 신라고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던 것을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바로 해주로 귀환한 박용진 대위는 막고17굴에 대한 자료를 찾게 되었고 왕원록이 발견한 둔황의 유물들이 이 시기 발굴되어 청국정부의 무관심에 방치되었다가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유럽과 일본으로 반출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박용진 대위는 곧바로 최경식 공군대신에게 막고17굴의 유물에 대한 보고를 했다. 대한제국정부는 본래는 영국과 프랑스로 그리고 일본으로 분산 반출될 처지에 놓인 둔황유물의 국내매입을 승인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유물매입을 위해 문교성의 관리와 고고학자 등이 다시 둔황으로 날아갔고 유물의 최초 발견자인 왕원록(王圓籙)에게 이전시대와 달리 그가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정도의 거금을 주고 유물 전량을 매입해 국내로 반입해 왔던 것이다.
차준혁이 신채호에게 질문했다.
“유물이 5만 점이나 되면 별도로 박물관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문교성에서도 그렇게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막고17굴 유물 대부분은 4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오호십육국부터 북송시대의 고문서·고대악기·고서화 같은 귀중한유물이 많아서 아무래도 특별한 관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제국이 일본에서 본국관련 문화재를 철저히 조사해서 모조리 환수하고 있는데 중국유물을 매입한 것이 잘한 결정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채호가 무슨 말을 하느냐고 펄쩍 뛰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여온 막고17굴의 유물발견자인 왕원록이 6년 동안 천리를 마다않고 걸어 다니면서 청국의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들에게 유물보전을 위한 자금지원을 요청했지만 전혀 무관심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 청국은 자신들의 유물에 대한 국가적인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어서 국보급 보물들이 엄청나게 국외로 반출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때 막고17굴같이 귀중한 유물이라면 얼마가지 않아 서양으로 반출될 것이 분명합니다.”
신채호의 정확한 지적에 차준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동양의 귀중한 유물을 서양으로 반출되지 못하게 우리 제국이 먼저 매입해서 보관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청국도 후일 자국역사연구를 위해 자료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와서 같이 연구도 할 수 있을 것이고 5호16국의 역사는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의 역사로 엄밀히 말해 한족의 역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신채호의 말에 차준혁이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단재선생의 말씀을 들어보니 제 생각이 많이 짧았습니다.”
1900년 대대로 막고굴을 관리하고 있던 태청궁의 도사였던 왕원록은 청소를 하던 도중 막고16굴에서 숨겨져 있던 별도의 작은 방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제17굴인 장경동이다. 왕원록은 자신이 발견한 유물의 가치가 높은 것을 알고는 몇 년 동안 유물보존을 위에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었지만 청국정부에서는 누구도 지원해주지 않고 있었다.
본래는 1907년과 1908년 막고굴의 유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영국과 프랑스탐험가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받고 유물을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박용진 대위의 우연한 공으로 대한제국에서 이를 모조리 매입해 버렸으며 이로 인해 ‘둔황학(敦煌學’)으로 정립될 학문은 영국이 아닌 대한제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차준혁의 이러한 망중한(忙中閑)은 독일공사의 접견요청으로 며칠 만에 끝을 보게 되었다.
독일공사의 접견요청을 받은 차준혁은 단걸음에 독일공사관을 방문했다.
“각하. 귀국의 카이저께서 매각결정을 내리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본국은 그동안 청국의 산동일대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귀국이 이에 대한 본국의 확실한 기득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대한제국은 청국영토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귀국과 본국은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래도 우리 제국은 귀국과 거리가 가까운 산동에 대해 귀국의 보다 확실한 입장을 정식문서로 받기를 원합니다.”
독일은 아무리 군사동맹을 채결하고 있는 동맹국이라고 하더라도 몇 년 사이 국력이 급신장하고 있는 대한제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동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