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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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혁이 걷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차준혁의 행동은 위축되지도 비굴해 보이지도 않아서 잘못 보면 오만하게 보일 정도였으나 태화전의 청국관리 중 단 한명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황제의 옥좌 앞에 도착하자 차준혁과 친분이 두터운 직례총독이며 외무대신인 원세개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시오.”

차준혁이 그에게 목례를 했다.

“여기서 뵙습니다. 총독각하.”

“잘 오셨소이다.”

그러면서 옥좌를 손으로 정중히 가리켰다.

“우리 대청제국의 황제폐하시오.”

차준혁이 옥좌를 보자 4살의 어린 황제가 모후인 융유태후(隆裕太后)의 손을 잡고 옥좌에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차준혁이 당당한 걸음으로 옥좌 앞으로 가서 섰다.

“대한제국황제폐하의 특명을 받아 이번에 청국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차준혁입니다.”

그러고는 모자를 벗고서 정중하지만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를 대신해 태후가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세요.”

태후의 인사말에 몸을 일으킨 차준혁은 가져온 신임장을 두 손으로 바쳤다. 차준혁의 신임장은 총관태감 소덕장(小德張)이 직접 옥좌를 내려와 두 손을 받아 들고서는 다시 옥좌를 올라가서는 황후에게 공손히 바쳐졌다.

황후가 신임장을 펼쳐서 형식적으로 읽고는 하교하였다.

“지금같이 앞으로도 귀국과 우리 대청제국의 선린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하게 유지되기를 바라오.”

“외신(外臣 한나라의 관리가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 태후마마의 하교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황제에게 인사를 마치고 차준혁은 섭정왕(攝政王)인 순친왕(醇親王) 재풍(1883 載灃)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섭정왕 전하.”

“반갑소이다.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양국관계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부탁하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이어서 차준혁은 옆에 있던 경친왕과 원세개 등 10여 명의 청국고관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태화전을 나섰다. 

그때 환관 한 명이 특유의 향내를 풍기며 은밀히 다가왔다. 조선에서 내관이 될 때에는 불알만을 제거하는데 비해 중국은 고래로 아예 양물자체를 잘라버린다. 

그랬기 때문에 청국내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오줌을 조금씩 지리게 되고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이들은 특유의 독한 방향제를 늘 품에 지니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국내관이 가까이 다가오면 사람보다 향내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공사각하, 섭정왕 전하께서 별도로 만나 뵙기를 청하십니다.”

“본관을 별도로요?”

“예, 누구에게도 말씀을 하지 말라는 전언도 함께 주셨습니다.”

차준혁은 섭정왕 제풍과는 작년에 선통제(宣統帝)즉위 때 처음보고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는데 은밀히 만나자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청국의 최고실권자의 면담요청이라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어디서 뵈면 되는 것이오?”

“공사관에 가 계시면 따로 기별을 드린다고 합니다.”

“알겠다고 전해드리게.”

“예, 각하.”

환관이 종종걸음으로 돌아가자 차준혁은 오장경과 거칠 것 없는 걸음으로 자금성을 가로질렀다.

본래 조선사신이 자금성을 들어오면 이렇게 당당하게 걷지 못하고 상국을 받든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 때문에 명나라 때부터 이어온 방식인 무릎으로 기어서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출입은 청국과 교류하는 어떠한 나라도 하지 않던 방식으로 실리를 중시하는 청국에서는 하지 못하게 만류할 정도의 과례였다. 하지만 조선은 상국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어처구니없는 명분으로 수백 년을 계속 기어 다녔다고 한다. 

그런 꼴이 오죽 불쌍했으면 청국황제가 가련하다고 상을 줄 정도로 조선은 호란 때 청국에게 항복을 한 후부터 알아서 기었던 것이다. 

며칠 후 차준혁은 고관들이 주로 거주하는 십찰해에 있는 순친왕부에서 순친왕 재풍과 독대했다.

“공사께서 거절하지 않고 이렇게 과인이 만나자는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소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순친왕 전하의 말씀인데 본관이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따로 본관을 보자는 이유는 무엇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정치력도 없는 순친왕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동안 우리 조정을 손아귀에 쥐고 갖은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있는 원세개 직례총독을 이번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하오.”

차준혁은 역사대로 순친왕이 원세개를 몰아내려고 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그것을 본관을 이렇게 따로 불러서 말씀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과인은 원 총독이 차 공사와 사이가 아주 가깝다고 들었소. 그래서 미리 차 공사에게 원 총독의 거취를 말해 주는 것이오.”

“아! 그렇습니까?”

차준혁은 내심으로는 섭정왕이 미리 원세개의 거취문제를 별도로 알려줄 정도로 대한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지만 이것은 내심일 뿐이었다.

순친왕이 다시 차준혁에게 질문했다.

“원 총독이 사직을 하는데 있어서 귀국이 말을 보탤 것이 있소?”

차준혁은 순친왕이 원세개의 사직에 부정적인 말을 하면 들어줄 것 같은 말을 하자 이런 나약한 성품으로 어떻게 복마전 같은 청국조정을 이끌고 갈 수 있을지 속으로 그가 한심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약간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제국은 귀국내정에 간섭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의 말씀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솔직히 과인은 귀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귀국이 일본과 같이 본국의 내정을 간섭할 것이란 오해를 하고 있었소이다.”

차준혁이 다시 한 번 더 강조했다.

“우리 대한제국은 앞으로도 절대 귀국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그럴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강조를 하자 순친왕의 얼굴이 아주 환해졌다.

“참으로 다행이오. 과인은 지금까지 공사와 원 총독이 가까이 지내는 것이 내정문제를 서로 협의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소이다.”

차준혁은 경륜이 없어도 너무 없는 20대의 순친왕이 혼란과 격랑에 휩싸여 있는 청국을 어떻게 끌고 나갈지 점점 더 걱정이 되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구태여 내비칠 필요는 없었다.

차준혁은 이번에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원 총독과는 양국 간에 있었던 협상 때문에 가까워 진 것이니 순친왕 전하께서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순친왕이 두 손을 모아 쥐고는 거듭 사과했다.

“미안하오. 과인이 잘 못했으니 이렇게 공사에게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본관에게 오해의 소지를 만든 책임이 있으니 너무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준혁은 이렇게 말은 했지만 오해이든 아니든 의심을 했다는 것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국의 실권자인 순친왕이 거듭해서 사과하자 그동안 대한제국을 속국으로만 생각하던 청국의 입장변화를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사께 과인이 특별히 부탁을 드릴 일이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우리 청국은 땅이 넓어 각 지역 간 왕래를 하기 가 아주 어렵소이다. 더구나 철도는 서양국가가 모조리 선점을 해서 본국정부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형편이오. 그런데 지난번에 보니 귀국에 비행선이 있던데 혹 그 비행선을 본국에 판매하실 의향이 있는지 알고 싶소이다.”

차준혁이 순친왕의 자존심을 살짝 긁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만 가격이 비싸서 청국이 비행선을 구매 할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순친왕이 차준혁의 수에 바로 걸려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우리 대청제국은 아무리 재정이 어렵더라도 그 정도 자금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소이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하긴 서태후가 죽었으니 그녀가 흥청망청하던 자금만 잘 관리해도 상당한 금액이 모아지겠지. 그래도 서양에 줄 배상금이 남아 있어서 자금 모으기가 쉽지 않을 텐데.’

차준혁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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