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회: 7권-19화 -->
“그러면 몇 대나 구매를 하시려고 합니까?”
“확실한 구매대수는 지금 확정할 수는 없겠지만 과인은 적어도 수십 대는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소.”
“비행선은 충분히 귀국에 판매가 가능하지만 일단 비행선의 인도 일정을 확인한 후 다시 만나 별도로 협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순친왕과의 면담을 마치고 왕부를 나온 차준혁은 선걸음으로 원세개의 관사를 찾았다.
밤이 깊어질 무렵의 뜻밖의 방문이라 원세개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늦은 시각에 차 공사께서 어쩐 일이시오?”
“방금 전에 순친왕부를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차준혁은 순친왕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지만 의외로 원세개가 담담해했다.
“공사께서 이렇게 소식을 알려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나 본관은 이미 대강의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소이다.”
“미리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세개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나같이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은 당연히 물러나야 하지 않겠소?”
“그렇더라도 청국의 군권을 쥐고 있는 총독이시라면 타협의 여지는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차 공사의 말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소이다. 지금은 조용히 뒤로 물러서는 것이 좋소. 그래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소이다.”
“후일을 위해 잠시 물러서려고 하시는군요.”
원세개가 눈빛을 빛내며 속내를 말했다.
“내가 물러난다고 해도 군권은 어차피 내가 쥐고 있소이다. 지금의 정국으로는 분명 오래지 않아 변란이 발생할 조짐이 아주 다분하오. 그렇게 된다면 수습을 위해서는 반드시 군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순친왕은 분명 나를 불러올리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오.”
원세개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차준혁은 부패의 대명사라고는 하지만 역시 노회한 정치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이보전진을 위해 잠시 한 발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차준혁의 말에 원세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라 참으로 좋은 말이오.”
이렇게 말을 하던 원세개가 이를 갈았다.
“뿌득! 지금은 시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잠시 물러나지만 뒷날 내가 다시 돌아올 때는 반드시 오늘의 굴욕을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오.”
차준혁은 이를 가는 원세개의 말을 들으며 청국의 시간이 얼마가 남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원세개의 사저를 나와 공관으로 돌아오던 차준혁에게 판임관 오장경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각하,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순친왕이 각하께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바로 원 총독에게 알려도 되는 것입니까?”
차준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는 국익을 위해 움직이는 외교관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순친왕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원 총독에게 알리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오장경이 의아해했다.
“선통제의 나이 이제4살입니다. 앞으로 선통제가 성년이 될 때까지 순친왕이 섭정을 할 것이고 또 그 후에도 청국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물러나는 원세개가 국익에 도움이 더 된다는 말씀하십니까?”
“십년이 넘는 동안 청국군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를 일선에서 물러나더라도 순친왕의 경륜으로는 쉽게 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까 통역하면서 들으셨겠지만 원세개는 아주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권을 잡을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라 미리 관리를 해 두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준혁은 그가 복귀하는 것이 몇 년 걸리지 않을 것이란 말은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청국생활이 오랜 오장경은 말을 해주지 않아도 그간의 경험으로 정확한 판단을 했다.
“하긴 지금의 청국은 온 나라가 화약고와 같아서 원 총독이 복귀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차준혁은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는 동의해 주었다.
“잘 봤습니다. 저도 원 총독이 복귀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이를 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가 다시 복귀를 하면 분명히 피바람이 불 것 같습니다.”
오장경이 이렇게 느낄 정도로 원세개는 자신이 이번에 물러나는 것에 대해 깊은 복수심을 갖고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사람인데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후!~ 가뜩이나 어려운 청국상황인데 원세개가 복귀한 후 칼바람을 날리면 청국은 정말 더 힘들어지겠습니다.”
오장경은 마치 청국이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걱정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준혁은 오장경의 한숨을 보면서 역시 경험만큼 중요한 자산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특명전권공사로 승진 임명된 차준혁이 북경에서 순친왕과 원세개를 번갈아 만나면서 청국의 구 권력과 신 권력을 적절히 관리하고 있던 시기에 새로 대통령이 취임한 미국은 그들만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시오. 국무장관.”
미국의 신임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는 미국역사상 가장 뚱뚱한 대통령답게 170kg의 거구로 백악관대통령집무실에서 로버트 베이컨(Robert Bacon) 신임 국무장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제임스 셔먼(James Sherman)부통령이 앉아 있었다.
“이리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베이컨 장관이 자신의 손짓한 의자에 앉자 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업무인수로 바쁠 텐데 이렇게 오라고 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이제 업무인수도 거의 끝이 나서 크게 바쁘지 않습니다.”
“다행이오. 그런데 베이커 장관.”
“예, 대통령각하.”
“아시아지역 상황에 대해서 보고는 받으셨소?”
“그렇습니다.”
“보고를 받은 장관의 소감을 듣고 싶소이다.”
“다른 곳은 본국과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 미합중국이 진출해 있는 남태평양의 지도가 바뀌었다는 보고가 상당히 거슬렸습니다.”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이 바로 동의했다.
“그렇소이다. 그 문제 때문에 내가 장관을 보자고 한 것이오.”
이렇게 말을 한 태프트는 탁자위에 놓인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지도에는 남태평양일대의 지도로 대한제국영토 사이에 미국이 강점한 필리핀과 괌이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장관도 느꼈겠지만 이 마리아나제도와 캐롤라인제도를 독일로부터 매입한 한국의 행보가 영 마뜩치가 않소.”
“각하께서는 필리핀 초대 총독을 역임하셨기 때문에 누구 못지않게 아시아 사정에 밝으셔서 더 그렇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한국은 내가 육군 장관으로 있으면서 일본과 밀약을 맺었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을 교묘하게 변조하여 우리 합중국과 영국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던 전력이 있소. 결국 한국은 그것을 이용해 영국과 일본의 동맹을 파기시키고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더니 이번에는 독일과 협상을 벌여 이렇게 남태평양까지 진출한 것이 아무래도 우리 미합중국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행보라고 생각되오.”
베이커 국무장관이 적극 찬성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그냥 두다가는 한국이 우리 합중국의 식민지까지 넘보지 않을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베이커 장관의 찬성의견을 들은 태프트 대통령이 부통령인 제임스 셔먼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시오. 국무장관도 본인의 생각과 같지 않소.”
부통령 제임스 셔먼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아직 한국이 우리 합중국에 어떠한 도발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베이커 장관이 바로 반대의견을 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은 몇 년 전 대통령각하께서 일본과 밀약을 맺은 것을 터 잡아 우리 외교관과 국민들을 억류했다가 강제 추방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일뿐더러 국가적인 수치이기도 합니다.”
태프트 대통령이 이마를 찌푸리며 국무장관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소이다. 그 일은 우리 합중국외교사에 처음 있었던 아주 굴욕적인 사건이었소.”
“맞습니다. 그래서 전임 대통령께서 일본을 그렇게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던 것입니다.”
부통령 제임스 셔먼이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