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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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이렇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일본제국군의 상징으로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야마가타가 낙심하여 기가 죽은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총리관저를 나온 이토 히로부미는 로쿠메이칸(鹿鳴館)으로 향했다. 칩거하던 야마가타가 동경에 올라온 뒤 로쿠메이칸의 2층 특실에 머물고 있었다.

메이지정부초기 외빈이나 외교관을 접대하기 위한 사교장소로 지어졌던 로쿠메이칸은 제국호텔이 세워지면서 가치가 떨어져 그동안 화족회관으로 사용되었었다. 그러다 동경폭격당시 정부주요건물들이 전소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다행히 큰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내외귀빈용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총리관저를 나와 야마가타 숙소인 2층 특실 소파에 앉을 때까지 각자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느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소파에 앉아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긴 침묵을 깬 것이 야마가타였다.

“이토 후작.”

“예, 각하.”

“우리가 지금까지 조선을 생각하던 관점을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된 듯하오.”

이토 히로부미는 대답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종전을 하고 아직 2년도 되지 않았는데 조선이 이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어 놓을 줄은 정말 예상 밖이오. 나는 그래도 기반시설 만큼은 어느 정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소.”

“본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1년 6개월 동안 조선은 우리 제국이 수십 년간 일궈놓은 것을 마치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교묘하고 철저하게 군사시설이란 구실로 산업기반시설들을 모조리 빼내 갔습니다. 그게 얼마나 교묘한지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분명히 첩자가 있었을 거야, 첩자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쓸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후!~”

“그건 그렇고 후작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이렇게 무력하게 조선에 무작정 끌려 다닐 수는 없지 않겠나.”

“동경의 조선공사관에 조선군병력이 주둔해있고 요코스카에 조선7함대가 주둔해 있는 마당입니다. 미국과 협조아래 대대적으로 군대재무장을 하면서 이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지금 상황으로는 어떻게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국내에는 총기류도 치안유지용 소총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은 형편입니다.”

야마가타가 씁쓸해했다.

“지난번에 옥쇄를 하더라도 항복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도 후회스럽군.”

“그래도 천황폐하를 보위하고 제국을 이나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 그때의 결단덕분입니다.”

“후!~ 어쩔 수없는 일이지.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인 것을.”

그렇게 말을 하던 야마가타가 안색을 굳혔다. 

“대외적인 문제는 내각이 결정하는 데로 따르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부통치를 위해 아무래도 다른 방식을 동원해야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조선이 국정홍보처라는 조직을 이용해서 각종 홍보물과 신문을 이용해 우리 제국국민들을 호도하는 위무공작을 계속하는 바람에 조선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들이 많이 희석되어 가고 있소이다. 만일 이런 상태를 그대로 좌시하다가는 우리제국은 결국 정신까지 지배당해 조선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릴 수가 있소.”

야마가타의 말을 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안색도 순간적으로 심각해졌다.

“조선이 양국 간의 화해를 이유로 각종 위무공작을 벌이고 있어서 지금까지 정부차원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각하께서 좋은 방안이 있습니까?”

“본관은 현양사를 부활할 생각이오.”

이토 히로부미가 깜짝 놀랐다.

“현양사와 같은 우익조직을 결성하는 일은 종전협상위반이라 조직이 외부로 노출되는 순간 새로운 형법에 따라 중형을 받게 됩니다.” 

야마가타가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같이 대외적으로 노출된 조직결성은 어리석은 짓인데 또 다시 그것을 답습하는 것은 더욱 더 어리석은 짓이오.”

“그렇다면 따로 생각하신 묘책이 있습니까?”

“지금 전국에는 사무라이후예 출신의 교카쿠(협객 俠客)들이 많이 남아 있소. 나는 이들을 이용해 새로운 지하조직을 만들 생각이오.”

이토 히로부미의 눈이 더 할 수 없이 커졌다.

“협객이라니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야쿠자를 말씀하십니까?”

“그렇소.”

“폭력조직을 음성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만드시다니요. 너무 위험한 생각이십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우려에 야마가타의 고개가 저으면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연히 위험하겠지만 대리인을 내세운다면 별 문제 없을 것이오.”

“누구를 대리인으로 내세운다는 말입니까?”

“대본영의 육해군참모출신 중 충성심이 강한 인물을 골라보면 충분히 선발할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 각지의 야쿠자를 장악해 전국조직으로 키운다면 아마도 상당한 규모가 될 수 있을 것이오.”

이토 히로부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것을 보고 야마가타가 계속해서 말했다.

“후일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이러한 우익비선조직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소. 그리고 이들에게 밀정교육을 시켜 조선에 이주한 이주민들을 음성적으로 장악한다면 조선이 앞으로 무슨 일을 추진해 나가는지에 대한 정보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에 따른 대처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고 잘하면 조선의 지하세계도 장악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오.”

“전국적인 조직을 구축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자금은 각 기업에서 조금씩 지원을 받으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가장 난제인 자금문제를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가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하조직을 만드는 데는 큰 문제가 없겠습니다.”

“세상에는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기 마련이오. 만일 우리 제국이 이대로 조선을 정벌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 지하조직을 이용해서라도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대륙의 지하세계를 반드시 점령하고 말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눈은 살기가 일정도로 아주 차갑게 빛났다. 

일본정계거두인 두 사람이 총리관저를 나온 뒤 일본내각은 장시간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결론은 이미 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토 체신대신과 이케다 해군대신의 의견에 따라 대한제국에 병력을 파병하여 실익을 거두거나 대한제국이 병력파병을 거부한다면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본내각의 합의는 일왕의 제가를 거쳐 주일공사 이준에게 은밀히 전달되었고 이준 공사는 이 제안을 바로 본국으로 타전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생각지도 않던 일본의 제안을 받자 바로 내각회의를 개최했다.

박충식이 일본의 제안을 듣고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미국과 러시아의 파리비밀접촉이 우리를 겨냥한 것이었군.”

김종석 국방대신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나온 것이 의외입니다.”

“그들로서도 고심의 선택이었겠지.”

“그래도 정한론의 필두인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아직 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입니다.”

송의식 해군대신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동안 일본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강경파가 서서히 밀려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과인이 봐도 그렇게 보이는군.”

박충식이 송의식에게 질문했다.

“송 대신, 이들의 제안이 우리에게 득이 되는 것은 사실 아닌가?”

“물론입니다. 일본이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우리에게 이러한 제안을 한 것 자체가 그동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대일본작업이 잘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라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하지만 강명철이 이의를 제기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그렇지만 아직은 안심할 게재는 아니라고 봅니다.”

재무대신 이상재가 강명철의 말에 적극 찬성했다.

“강 대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일본이 비록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민족성을 갖고는 있지만 그동안 우리 제국에 대해 갖고 있던 우월의식을 짧은 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은 시간을 더 두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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