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회: 7권-31화 -->
그러자 따듯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온 몸의 냉기를 순간적으로 가시게 했다.
“이 정도면 근무환경이 괜찮군.”
“일본군과 함께 지낼 때보다는 천국입니다.”
초소장은 장작림과 함께 청군으로 일본군을 도와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이 많은 소위였다.
장작림은 청일전쟁 때는 청군으로 일본군과 싸웠었으나 러일전쟁 때는 만주에 진주한 러시아군을 몰아내려는 일본군을 돕기 위해 청군으로 참전했었다. 일본군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청군을 크게 대우하지도 않았고 온갖 궂은일만 시켰으며 보급도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병사들이 굶는 날이 태반이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에 귀순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대한제국군은 자신들을 똑 같이 대우해주는 것은 물론 보급도 아주 풍족했다.
초소장의 말에 장작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일본에 비하면 대한제국군이 우리에게 하는 대우는 하늘이야 하늘.”
독백하듯 말을 한 장작림이 페치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러일전쟁 막바지 봉천으로 진군해올 당시 대한제국군에게 항복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쫒아 연해주로 진군할 때 그의 부대는 봉천에 남아서 일본군군수물자와 러시아군에게서 노획한 군수물자관리임무가 주어졌다.
장작림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했다. 그랬기에 후일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해 만주에서 모병한 수백 명의 병사들과 함께 열심히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떨어지듯 대한제국군이 일시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항복을 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잔인하게 모조리 사살해 버렸다.
그가 보기에 대한제국군은 일본군보다 잔인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한제국군은 일본군과 군복이 다른 자신의 병사들은 한명도 죽이지 않고 모두 포로로 잡았다. 장작림은 대한제국군이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일본군을 사살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자신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며칠 동안 죽은 일본군시신을 수습하는 일과 물자인수인계만 시켰다.
장작림군은 언제 죽을지 몰랐지만 바로 죽기는 싫었기에 대한제국군의 지시사항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 때 누군가 중국말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중에 누가 장작림인가?”
순간 장작림은 가슴이 덜컥 떨어졌다.
‘내가 드디어 죽는구나.’
“다시 한 번 묻겠다. 누가 장작림인가?”
자신의 부하들 중 누구도 자기를 지목하지 않았으나 장작림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애꿎은 부하들이 대신 죽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담담해진 장작림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로 장작림이오.”
대한제국군 장교는 그의 앞으로 와서는 인적사항을 일일이 질문하였다.
“따라오라.”
“후~”
장작림은 대한제국군 장교가 따라오라는 소리를 하자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는 그를 따라갔다.
“대장님!”
죽으러 간다고 생각하며 걷던 그를 불러 세웠던 병사가 바로 지금의 초소장인 소위였다.
“너희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국군에게 절대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흑흑흑······”
장작림이 의연하게 말을 하자 초소장이 먼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고 그러자 옆에 있던 병사들도 하나씩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작림이 버럭 호통을 쳤다.
“모두 정신 차려라! 죽는 것은 한번이고 순간이다. 대청제국의 군인이 어떻게 이렇게 눈물이 흔한가!”
그의 호통소리에 청군의 울음은 이내 그쳐졌고 그를 데리러 온 대한제국군장교는 그런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한국군장교가 장작림을 데리고 간 곳은 일본군총사령부가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이상하네. 나를 총살시키지 않고 왜 이리로 끌고 온 것이지? 나에게 심문할 것도 더 이상 없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들어간 방안에는 민간인 두 명과 군인 한 명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중 민간인이 능숙한 중국어로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시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을 한 장작림은 거침없이 당당하게 민간인이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그를 데리고 온 장교가 그의 앞에 앉더니 가져온 서류를 갖고 질문을 시작했다.
“몇 년 생인가?”
“1973년생입니다.”
“이름은?”
“장작림입니다.”
“어디 태생인가?”
“성경성(盛京省: 지금의 요녕성) 해성(海城)입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질문했다. 장작림은 대답을 하면서도 앞에 있는 사람이 너무도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조금도 숨기지 않고 성실히 대답했다. 그렇게 한 동안 질문을 하던 장교가 서류를 덮었다.
“본인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서 장작림이 조금 전 부하들을 통솔하던 것에 대해 한국어로 설명을 했고 그 말은 중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장작림은 자기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나누는지 몰라 내심 곤혹스러웠지만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에 담담한 표정을 하고 기다렸다.
장작림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북경에서 주재하는 중앙정보부팀장 정화영과 당시 대한제국군 총참모장이었던 송의식이었다. 본인임이 확인되자 정화영이 능숙한 중국말로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가 왜 귀관을 이리 불렀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우리는 귀관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오.”
“무슨 기회를 말씀입니까?”
“귀관은 부역자(附逆者)인 것은 알고 있소?”
“부역자라니요? 일본과 우리 청국은 적국이 아닙니다.”
“아!~ 귀관은 아직 모르니 그런 말을 하나 본데 이제부터 만주와 내몽골은 대한제국의 영토요. 우리 대한제국과 일본은 적대국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고 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도운 귀관이 부역자가 아니고 뭐겠소.”
장작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만주는 엄연한 대청제국의 영토인데 한국의 영토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가 이렇게 소리친 것은 내심으로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주가 계속 혼란스러우면 점점 북경의 통제에서 벗어 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며 그 때를 위해 지금 병력을 모아 내실을 다지기 위해 일본을 돕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정화영은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앞으로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고나면 정식으로 세계만방에 발표를 하겠지만 만주와 내몽골지역은 분명히 대한제국영토라는 것을 알기 바라오.”
하지만 장작림은 믿지를 않았다.
“그런 요설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오.”
그러자 정화영이 한 발 물러났다.
“그 문제는 나중에 밝혀질 일이니 지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니 제쳐두고 귀관은 우리 대한제국의 적국인 일본군에 부역하다 포로로 잡힌 것은 시인하오?”
장작림은 시인을 하면 바로 총살을 당할 것 같은 분위기라 대답을 하는데 잠시 망설였으나 어차피 자신이 잡힌 곳이 일본군주둔지였다.
“시인합니다.”
“우리 대한제국에서 부역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총살형이오. 이의 있소?”
항복을 하겠다는 일본군을 무참하게 사살한 대한제국군을 눈으로 목격한 것이 있었기에 자신의 죽음은 이미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의 없습니다.”
“귀관은 청군의 지휘관이고 더구나 자청해서 일본군에 부역을 했으니 스스로 자진하시오.”
그러면서 정화영이 가져온 권총을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탁!
장작림은 순간 당황했다.
“그, 그게······”
총살을 당하는 것이야 남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니 마음만 비우면 되지만 자살은 그게 아니었다.
특히 장작림처럼 야망이 큰 사람에게 자살은 생각지도 않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정화영은 그런 장작림을 지그시 바라봤다.
장작림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위의 권총을 쥐었다.
그러고는 잠깐 동안에도 마음속으로는 총부리를 돌려 모두를 쏴 죽이고 싶은 갈등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이 반항할 것을 대비해 놓지 않을 리가 없었기에 마음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