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9)화 (9/123)

9화

“강요는 하지 않을게요. 왕자님이 여기가 좋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늘부터 혼자 이 넓은 층을 다 치워야 하고… 여기가 번쩍번쩍 광이 날쯤이 되면 제 허리는 남아나질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분간은 제가 아니라 예니체 경이 왕자님의 식사를 가져다드리게 될지도.”

“예, 예니체 경.”

“아까 저랑 같이 왔던 기사 말이에요.”

고민에 빠진 왕자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예니체 경과의 첫 만남이 그렇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진 못했는지, 어쩐 일로 그에게서 빠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 난 그 사람 싫은데.”

“그런데 그전에 제 허리 걱정은 안 되시고요?”

“…청소가 그렇게 힘들어?”

“네, 아무래도 혼자서 하기에는.”

“그러면… 내가 도와주면.”

오, 세상에. 청소를 하는 왕족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꼭대기 층이 좋으세요?”

“조, 좋은 건 아냐. 그냥, 난 여기서 나가면 안 된다고 들었으니까….”

“누가요? 그 아구창 맞을 유모가요?”

“응.”

“하지만 제가 여기서 나가도 된다고 한다면?”

“…….”

왕자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저렇게까지 심각해질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내게 은근히 설득당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유모나 메이드나 왕자에겐 거기서 거기인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렇잖아요. 이름 없는 성의 주인님은 왕자님이신데, 전체를 모두 쓰셔야 마땅해요.”

“그렇지만… 다들 나를 싫어하니까.”

“누가요? 일단 저는 아닌데.”

“예니체 경이라는 자는?”

“그분도 왕자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어제 그 귀여운 모습을 저만 봤냐며 뭐라고 하셨는걸요.”

그는 망설였다. 귀엽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어도 별로 와닿지 않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이 문제가 그에게는 얼마나 큰 사안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네, 왕자님.”

“역시 안 되겠어. 들어갈래.”

용기를 내는 줄 알았던 왕자가 갑자기 문을 닫으려 했다. 그래 봤자 이제 잠기지도 않는데. 나는 낑낑거리며 다시 문틈을 벌리려고 했지만, 다 자란 남자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안쪽에서 문을 밀었다. 자연스럽게 밖으로 밀려 나간 나는 결국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래서야 언제쯤 그를 데리고 성을 탈출할 수 있을는지.

“알겠어요. 결국 이건 왕자님의 선택이니까요.”

“…….”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마지못해 빗자루를 들고 복도를 쓸기 시작했다. 어차피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할 것도 없는데 청소나 하지 뭐. 며칠쯤 고생하면 꼭대기 층도 깨끗해질 것이다.

나는 오후 나절 내내 복도를 쓸고 닦았다. 간혹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가 내 신경을 건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이 되었다.

내가 복도를 열심히 오가는 동안 왕자는 문밖으로 머리카락 한 올도 내보이지 않았다. 대체 그는 저 어두컴컴한 침실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회귀 전에는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자꾸만 신경 쓰였다.

뻥 뚫린 창밖의 풍경이 오렌지빛으로 물들 무렵, 나는 먼지투성이가 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 식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예니체 경과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말없이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러나 고된 노동 탓인지 영 입맛이 없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포크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더 안 먹습니까?”

“네. 오늘은 일찍 자고 싶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 오늘은 무슨 일이 있긴 했네요.”

“경의 어깨는 좀 어떠신가요?”

나는 새카만 제복 사이에 감춰진 상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렇지도 않다, 였다.

다행이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그 뒤로는 편안한 침묵이 이어졌다.

“남은 고기는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어, 그럼요. 당연하죠.”

“다프네 양은 왕자님께 가는 겁니까?”

“네.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데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도 되는 건가. 나는 내 몫의 고기를 제 접시에 옮겨 담는 예니체 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쟁반을 챙겨 들었다. 사실은 여기서 식사를 하기 전에 꼭대기 층에 먼저 다녀와야 했지만, 그러기엔 나는 너무 지쳤었다.

다시 계단을 오를 즈음 내 머릿속은 멍하기만 했다. 오늘은 이것만 가져다주고 침대에 쓰러져야지. 나는 내일도 할 것이 많았다. 예니체 경에게 부탁해 의자를 옮겨 달라고 해 볼까. 천장의 거미줄들을 기어코 없애고 말겠다.

“느, 늦었어.”

“어머나.”

낮보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마지막 계단을 올랐을 때였다. 나는 문가에 쪼그려 앉은, 머리가 덥수룩한 왕자와 마주쳤다.

그의 옆에는 점심나절에 먹었던 빈 그릇들이 쟁반에 올려져 있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왕자가 웬일로 안 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왕자님…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나는 감동의 눈물을 머금고 물었다. 고작 이틀 차였지만 벌써 왕자가 나의 노고를 알아준 것인가. 그러나 왕자는 절대 아니라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라고요? 너무해요.”

“…너무한 건 너야.”

“제가 왜요? 그런데 너보다는 다프네라고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사람 기분이라는 게 이렇게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는 건지. 나는 왕자가 반가워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이왕이면 강아지 상태일 때가 좋은데. 그렇지만 어제오늘 하도 많이 변신을 해 댔으니 더 이상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네, 네가 다녀간 후로 왠지 방에 있으면 버, 벌레가 나올 것 같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내가 입은 옷도 지, 지저분해 보이고.”

“실제로 거미는 이미 나와 있잖아요. 옷도… 음, 그렇네요. 자세히 보니 빨래가 시급한 것 같아요.”

“…네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헉, 놀래라.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제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그저 소심한 줄로만 알았던 왕자가 벌떡 일어나 내게 손가락질했다. 한 걸음 다가간 그에게선 방금 씻었는지 진한 비누 향이 풍겼다. 그러고 보니 어두워서 몰랐는데 머리칼이 아직 젖어 있다.

나는 내게로 쭉 뻗어진 왕자의 손가락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눈에 띄게 몸을 굳힌 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물리려고 했다.

“펜 한번 잡아 본 적 없으시죠? 손이 엄청 부드러워요. 마디마디가 굵고 길긴 하지만 그런대로 예쁜 손이에요.”

“누, 누, 누가 그런 걸 물었어. 난, 난 이제 큰일 났다고. 더 이상 내 방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아.”

당황할 때면 그는 말을 더 많이 더듬었다. 예상해 보건대 자신감이 없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 듯싶다.

이쯤 되니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왕자 쪽에서 먼저 꼭대기 층에 머무를 수 없겠다고 판단할 줄이야. 역시 정신 연령은 아직 어린아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잘 어르고 달래면 오늘 안에 그를 아래층으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 보세요. 왕자님도 이젠 침실이 찝찝하죠? 왜 멀쩡한 식당을 놔두고 매번 방에서만 식사를 하냔 말이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하, 하지만 이제까지는 항상 그렇게 했으니까.”

“꼭 그러라는 법도 없잖아요. 왕자님이 아래로 내려오시면 저는 매일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돼서 좋고, 왕자님은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어서 좋고.”

“…아래는, 깨끗해?”

“네, 제가 매일 아침 쓸고 닦으니까요.”

왕자가 쓸 방은 나중에 따로 마련하면 되겠지. 솔직히 내 방과 예니체 경의 방, 식당 정도를 제외하면 아래층도 꼭대기 층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난 어떻게서든 왕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으니까. 물리적 거리도 포함해서.

“어때요? 저랑 같이 내려가실래요? 저녁도 식당에서 먹어요. 밝은 곳이 훨씬 좋잖아요.”

“내, 내가 진짜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여기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면서요. 설마 복도에서 주무시려는 건 아니죠? 입 돌아가요.”

“으, 으….”

왕자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했다. 그 와중에 내게 잡힌 손가락을 곁눈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새삼 가까이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니 역시 왕자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귀신같이 멋대로 줄줄 기른 머리카락만 좀 어떻게 하면 참 좋을 텐데.

“왕자님….”

“으, 응.”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왜 이렇게 잘생기셨어요?”

“…….”

할 말을 잃은 왕자가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쳐다봤다. 당황해 살짝 벌어진 입술, 살짝 떨리는 동공. 달빛이 겨우 비치는 창가에 의지해 감상하기에는 아쉬운 절경이었다.

그는 윽, 읏,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펑! 하고 강아지로 변해 버렸다.

“엥.”

“…왕!”

“이게 뭐 하자는 건가요? 저보고 편하게 데려가 달라고?”

“왕왕! 왕!”

결단코 그런 건 아니라는 듯 강아지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군. 하나 배웠다.

강아지 상태일 때의 왕자는 인간일 때보다 훨씬 다루기 쉬웠다. 거기다 있는 힘껏 끌어안아도 내게 뭐라고 하지도 못한다.

“끼잉, 낑. 낑. 켕!”

“아, 방금은 너무 심했나요? 숨 막히셨죠. 죄송해요.”

보들보들한 털이 아직 촉촉했다. 나는 비누 향이 나는 강아지를 꼭 끌어안은 채 슬금슬금 계단으로 향했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그가 캥캥거리며 반항했지만, 그렇다고 복도에 계속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밑에 내려가면 제가 선물을 드릴게요. 아까 맛보지 못한 초콜릿은 어떠신가요?”

“…….”

“오늘 저녁은 맛있는 송아지 스테이크예요. 가니시로 나온 익힌 당근이 특히 맛있… 어, 왕자님?”

나는 신이 나서 떠벌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다 멈췄다. 품속의 강아지가 뜨거운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설마 나 때문인가? 내가 너무 들이대서?

나는 왕자를 추슬러 안고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그는 끙끙거리며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내 품에 파고들기만 했다.

귀, 귀여워.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가요? 혹시 어제오늘 너무 발가벗고 돌아다녀서?”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계절이었다. 나는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왕자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가 방까지 달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침대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는 풀썩 쓰러져 눈을 감아 버렸다. 작은 몸이 따끈따끈했다.

“아, 어떡하지. 왕자님. 왕자님?”

“…끼이잉.”

계속해서 부르니 왕자가 힘겹게 한쪽 눈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귀찮다는 듯 복슬복슬한 귀를 털어 낸 그가 나를 등지고 엎드렸다.

그러곤 조용히 등만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치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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