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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0)화 (10/123)

10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턱을 괸 채 고심했다.

강아지 상태일 때의 왕자는 의사가 아니라 수의사가 필요하지 않나? 하지만 본성으로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공주의 애완 카나리아나 왕실의 말들을 돌보는 수의사는 이미 한참도 전에 퇴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본성에 들리는 게 좋겠어. 나는 결정했다. 그러곤 잠옷으로 갈아입고 왕자의 곁에 누웠다.

그런데 설마 이대로 잠들었는데 일어났을 땐 사람으로 변해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세상에.”

물론 그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니 각오해라, 어젯밤의 나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모공 하나 보이지 않는 왕자의 뽀얀 살결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자다가 자세를 바꾸었는지 강아지였을 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던 그가 지금은 완전히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이불 아래는 당연히 아무것도 안 입고 있겠지. 나는 왕자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다음 아침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는 그를 홀린 듯 감상했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어깨는 또 왜 저렇게 넓어, 하고.

“…으음.”

그러다 왕자가 인상을 쓰며 뒤척이기에 화들짝 놀라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 사태를 알게 됐다간 왕자가 또 어찌나 난리를 칠까 싶어서.

하지만 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자면서 땀이라도 흘렸는지 은빛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기도 했고.

설마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걸까. 나는 왕자의 이마에 손을 대어 보았다. 그러나 어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왕자의 체온은 뜨겁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뭐, 뭐야.”

아니다. 다행이 아닌가.

왜 하필이면 내가 제 이마에 손을 얹고 있을 때 눈을 뜨는 건지.

나는 당혹스러운 눈빛을 한 왕자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거, 거짓말.”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폐왕자라 한들 그는 왕족이니 당연히 아무 일도 없어야 하는 게 맞고.

물론 나는 잠옷 차림이고, 왕자는 나신이지만 어쨌든. 그리고 왕자는 사실상 하루에 반나절 이상은 나신이니 별로 상관없지 않나?

“아, 아무 일도 없었다니. 나랑 가, 같이 잤잖아.”

“그렇긴 하지만 제가 잠들었을 때 왕자님은 강아지셨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죠. 강아지일 땐 귀여워서 좋고, 사람일 땐 말이 통해서 좋네요.”

“하아….”

왕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의 기준에선 용납 못 할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어련하시겠어, 왕자의 지식수준이라면 손만 잡고 자도 나는 임신한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전 왕자님이 아프신 줄 알고.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열이 나는데 어떻게 혼자 두겠어요?”

“그, 그만해.”

“그렇지만 지금은 괜찮으신 것 같아요. 체온도 저랑 비슷하고요.”

“…너, 너는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너가 아니라 다프네요.”

“…다프네.”

왕자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발음했다. 더듬지도 않고,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그 사실이 기뻐서 나는 활짝 웃음 지었다. 왠지 하루 사이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네, 왕자님. 참고로 남녀가 손만 잡고 자도 임신한다는 말은 되도 않는 소리니까 걱정 마세요.”

“나, 나도 알아. 어, 어차피 우린 손도 안 잡, 잡, 잡았고.”

왕자가 말을 심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빨개진 얼굴이 왕자가 그 언젠가 유모에게 또 되지도 않는 성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도대체가 이 무지하고도 무해한 왕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글도 읽을 줄 모르지, 참.

“우선은… 예니체 경의 옷이라도 빌릴까요? 따로 입을 옷이 없잖아요. 왕자님의 옷들은 어차피 지저분하고.”

“그, 지저분하다는 말 좀 그, 그만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난 그렇게 잘만, 살았는데….”

“앗, 죄송해요.”

하지만 이렇게 강조해야 왕자가 다시 꼭대기 층에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나는 시커먼 속을 숨기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와서 예의를 갖추는 것도 못내 불편한 듯, 왕자가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쳐 그것도 금세 그만두었지만.

“본성에 부탁해 왕자님의 옷을 새로 구해야겠어요. 앞으론 저희랑 같이 지내실 거죠?”

“저희라니…. 설마 다프네랑, 예, 예니체 경?”

“네. 왕자님이 어깨를 뜯어 놓았던 예니체 경.”

“나, 난 그 사람 싫어. 왜, 왠지 무서워.”

“이상하네요. 예니체 경은 무서운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인상은 좀 무섭긴 해. 그는 날카롭게 생겼고 몸은 근육으로 울퉁불퉁하니까.

평생 마주한 사람이라곤 나나 유모 정도밖에 없었을 왕자의 기준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에게 말했다.

“잠시 돌아 계실 수 없을까요? 저,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나, 나갈게. 내가 나갈게.”

“알몸으로요?”

“으….”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건 좀 아니었는지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데, 그게 또 왠지 모르게 귀여워서.

강아지일 적에나 그런 줄 알았는데 사람일 때도 깜찍한 분이셨네.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본 뒤 옷장에서 새로운 검은 드레스를 꺼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나 신경 쓰일 만큼 미동이 없었다.

저러다 또 부끄럽다고 강아지로 변하면 곤란한데. 본성에서 오는 음식들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강아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그런데… 다프네.”

“네, 왕자님.”

하얀 에이프런의 리본까지 묶은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왕자는 익숙하게 나를 이름으로 불러 주고 있었다.

확실히 거리감이 좁혀 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그는 아직까지도 앉은 채로 이불을 뒤집어쓴 우스운 꼴을 하고 있었지만.

“저 옷 다 갈아입었어요. 이제 보셔도 돼요.”

“아, 안 봐.”

“싫으시면 말고요.”

“…….”

왕자가 조용히 이불을 내렸다. 어차피 그럴 거였으면서 왜 자꾸 틱틱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부르셨어요?”

“어, 어제.”

“네, 어제.”

“선물을… 준다고.”

역시 왕자는 애다, 애. 열이 펄펄 나는 와중에도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나는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 구두를 신었다. 침대에 얌전히 앉아 나를 쳐다보는 왕자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일단은 옷부터 입고요. 선물은 식당에 가서 드릴게요.”

“나,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돼?”

“잠깐이면 돼요.”

그렇지만 애를 키우는 듯한 기분이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한껏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유지한 채 밖으로 나갔다. 지금 시간이면 예니체 경은 이미 보초를 서고 있을 테니, 그의 방을 두드리는 대신 성문으로 향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예니체 경.”

“오늘은 늦잠을 잤나 봅니다. 평소보다 9분 늦었어요.”

“…매일매일 시간을 확인하셨던가요?”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이 남자도 진짜 할 짓이 없나 보다. 나는 예니체 경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문 앞에 놓인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그런 다음 그에게 윤기가 나는 사과 한 알을 건네주며 물었다.

“혹시 남는 옷 있으세요? 왕자님께 빌려드릴까 하는데.”

“왕자님은 옷이 아주 많지 않습니까? 어제 보니 산처럼 쌓여 있던데.”

“걔넨 먼지가 많이 묻어서 입을 수 없어요.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하고요.”

첫날에 왕자를 봤을 때도 그는 체격에 맞지 않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에나 입었을 법한 옷에 몸을 끼워 넣은 듯한.

왕자를 실제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가 얼마나 자랐는지 아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몸의 윤곽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차림이 솔직히 처음엔 조금 민망했다.

그것도 왕자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금방 잊어버렸다만,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손목과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오늘 제가 본성에 다녀오려고 해요. 하지만 그동안 왕자님이 벗고 계실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제 방에 가서 아무거나 골라 드리십시오.”

“감사해요. 예니체 경은 왕자님과 키가 비슷하니 분명 경의 옷이 잘 어울리실 거예요.”

나는 예니체 경에게 잠시 후에 식당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아침 식사를 옮겨 담고 차를 끓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그는 천천히 가겠다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예니체 경은 이다지도 친절한데 어째서 왕자는 그를 무서워하는 걸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예니체 경의 방에 들러 옷가지를 가져왔다.

내가 돌아왔을 때, 왕자는 여전히 이불 속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왔어요.”

“다프네…. 이건 뭐라고 읽는 거야?”

나는 왕자의 옆에 옷을 내려 두고 앉았다. 내 책상에서 가져왔는지 그의 손에는 로맨스 소설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왕자는 주위의 환경은 청결치 못하게 살고 있었으면서 제 몸 하나만큼은 깨끗함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자른 반듯한 손톱이며, 정리하진 못했어도 결이 좋은 은발이며.

나는 왕자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부분을 읽어 주었다.

“그 단어는 ‘레이몬드’라고 해요.”

“레, 레이몬드.”

“네. 정확히는 ‘레이몬드는 고귀한 신분으로’, 라고 적혀 있네요.”

“…레, 레이몬드가 누, 누군데.”

“레이몬드는… 이사카 왕국의 왕자님이죠. 올해로 스물세 살이 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자세히… 알고 있네.”

“아무래도 그렇죠.”

소설의 남주인공이니까. 하지만 왕자가 소설이라는 개념은 갖고 있을는지. 아니다, 어릴 적엔 유모가 자기 전에 동화 정도는 읽어 주었으려나? 그러나 왕자가 이따금씩 얘기하는 그 유모는 그다지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 주진 않은 것 같았다.

“레, 레이몬드는… 나처럼 괴물로 변하진 않겠지.”

“괴물이 아니라 귀여운 강아지요.”

“아, 아무튼.”

눈꼬리가 붉어진 왕자가 집요하게 캐물었다. 설마 이 남자, 레이몬드가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레이몬드는 변신 능력이 없어요.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면 저, 정상인인 거잖아.”

“글쎄요, 어떨까요?”

하지만 레이몬드는 여주인공을 만나기 전까지 무려 99명의 여자들과 원나잇을 하는데 그게 과연 정상일까? 이런 설명 따위는 왕자에게 하고 싶지 않다. 이 순간만큼은 왕자가 글을 읽지 못해 다행이었다.

표지에 붙은 빨간 딱지도 무슨 뜻인지 그는 모르겠지. 그것도 정말 다행이었다.

“그보다 어서 옷을 입으셔야죠. 그러다 감기 걸려요.”

“자, 잠시만. 하나만 더.”

“뭔가요?”

다음 순간, 왕자는 책을 덮으며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려 왔다.

“다프네는… 레이몬드랑 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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