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실례합니다.”
“푸웁!”
쉴 새 없이 머그잔을 꼴깍꼴깍 들이켜던 왕자가 마지막 한 모금을 뿜어냈다. 화들짝 놀란 그가 정신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그곳에는 막 주방에 나타난 예니체 경이 있었다. 그는 왕자보다 더 당황한 듯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너무 빨리 왔습니까? 다시 돌아갈까요?”
“아, 아뇨. 딱 적당한 때에 오셨어요. 차도 다 우린 참인걸요.”
하지만 예니체 경을 반기는 나와는 달리, 왕자는 그를 못내 불편해하고 있었다. 키가 큰 두 남자 사이에서 어색한 적막감이 흘렀다. 예니체 경은 왕자에게 인사라도 건네야 할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보였다.
“두 분 다 먼저 식탁에 가 계세요. 저는 차를 가지고 뒤따라갈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실까요, 왕자님.”
“…아, 아니.”
예니체 경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으나 왕자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낯선 기사를 경계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왕자님? 제 뒤에 숨어 봤자 가려지지도 않잖아요.”
몸만 큰 어린애가 슬금슬금 뒷걸음을 쳐 기어코 차를 따르고 있는 내게로 도망쳤다. 이래서야 언제쯤 모두 다 같이 손을 잡고 이름 없는 성을 탈출할는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겨우 내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왕자를 닦달하고 싶진 않았다.
“알겠어요. 왕자님은 저랑 같이 가요.”
“…왕자님보다 먼저 식탁에 앉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어쩔 수 없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니체 경은 시무룩해졌다. 알고 보면 그도 나처럼 새끼 강아지로 변한 왕자에게 푹 빠진 무해한 사람인 것을.
안타까웠지만, 예니체 경은 우락부락한 제 외모를 탓할 수밖에 없다. 나처럼 맹하게 생겼으면 왕자랑 금방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주방 구석에 마련된 트레이에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를 옮겨 담았다. 그 와중에도 왕자는 내 뒤를 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따른다기보다는 달라붙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주방을 나가기 전, 내가 혹시 잊은 것은 없나 뒤를 돌아보자 왕자는 무의식적으로 내 행동을 따라 했다. 그러자 하나로 높게 묶은 내 머리카락이 왕자의 얼굴을 쳤고, 왕자는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서 나를 되돌아봤다.
“아야.”
“죄송해요. 너무 가까이 계시는 바람에.”
“아….”
그는 눈을 끔뻑거리며 제 뺨을 만졌다. 낯선 곳에 온 아이가 주위를 겁내는 것처럼, 왕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왕자에게 의지되는 기분, 나쁘지 않아…!
지금 그가 새끼 강아지 상태였더라면 꼭 끌어안고 뺨을 마구 부벼대고 싶은데. 나는 내심 아쉬워하며 왕자를 등에 붙인 채 주방을 벗어났다.
예니체 경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모서리에 구겨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저쪽도 잘 훈련된 사냥개 같은 느낌이다.
나는 식탁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메이드인 제가 귀족과 왕족이신 두 분과 겸상한다는 건 원래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희 상황은 예외적이니까… 부디 왕자님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나, 난 상관없는데.”
“물론 그러실 줄 알았답니다. 그나저나 왕자님은 어디에 앉으시겠어요?”
“다프네는… 어, 어디에 앉아?”
“저는 예니체 경의 맞은편 자리요.”
“그, 그럼 나도 거기 앉을래.”
쭈뼛쭈뼛 내밀어진 왕자의 손이 살며시 내 옷깃을 그러쥐었다. 아까 내가 방에서 그렇게 했던 것을 따라 하는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왕자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렸다. 또 한 번 놀란 그가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의 왕자는 다 큰 성인이라기보다는 처음 산책을 나온 새끼 강아지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에게 해 줘야 할 것은 안정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여기 앉으세요.”
나는 내가 앉는 자리의 옆 의자를 빼 주었다. 왕자는 내가 제 옆에 앉은 뒤에도 옷깃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대체 뭘 저렇게 불편해하나 싶다가도 그가 살아온 환경을 생각해 보면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식탁에 가려진 왕자의 손을 세게 잡았다 놓았다. 그런 다음 미리 나눠 둔 아침 식사를 예니체 경과 왕자의 앞에 밀어 주었다.
“브로콜리 수프가 맛있어 보이는군요.”
“그러게요. 어서 드세요.”
“왕자님이 먼저 수저를 드셔야….”
예니체 경은 누가 봐도 어색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짙은 눈썹에 인상이 강한 그가 딱딱한 미소를 짓자 왕자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진짜 큰일이네. 갈 길이 너무 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왕자의 앞에 놓인 수저를 들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고, 고파. 하지만.”
“예니체 경은 왕자님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사예요. 제가 왕자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존재하는 메이드인 것처럼요.”
“아, 알고 있어. 전에 이, 인사를 받았으니까.”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쁩니다.”
예니체 경의 눈이 커졌다. 그러자 왕자의 눈도 커졌다. 왕자는 예니체 경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 좀 도와 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예니체 경. 왕자님은 아직 경과 대화를 나눌 마음의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조용히 식사해 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다프네 양이 준비해 준 차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이름 없는 성에 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다. 한낱 평민 계급의 메이드가 귀족한테 조용히 하란 말을 다 하게 되다니.
그렇지만 예니체 경이나 나나 우선인 것은 왕자였으므로, 그는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고 왕자가 식사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우리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왕자는 부담스러움의 극치에 다다랐는지 서서히 얼굴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저러다 또 변신하는 건 아닌가 몰라. 나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얼른 수저를 흔들어 재촉했다.
“왕자님, 저도 엄청 배가 고파요. 이러다 배가 등가죽에 붙어 없어질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 그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어서 드세요. 왕자님이 식사를 하셔야 저희도 먹을 수 있어요.”
“왜, 왜… 내, 내가 뭐라고.”
“왕자님은 왕자님이시죠. 이 나라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분들 중 하나잖아요.”
“아….”
사실 내가 하는 말을 왕자가 알아들었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대충 분위기를 눈치챈 듯 이제껏 내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접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수저를 들지 않으시고… 하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왕자가 고개를 숙여 수프를 마셨다.
“…와, 왕자님?”
“…으응?”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급하게 수프를 마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뺨에 잔뜩 묻은 수프 자국을 개의치 않고, 그가 이번에는 삶은 당근과 소시지가 놓인 접시를 향해 고개를 파묻으려 했다.
“자, 잠시만요. 세상에. 설마 유모가 수저를 쓰는 방법도 알려 주지 않은 건가요?”
“수, 수저라면 다프네가 들고 있는 거?”
“네. 포크와 나이프요. 수프는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하고… 아니, 저도 포크와 나이프가 여러 개인 경우의 세세한 매너까지는 모르지만요. 그래도 최소한은.”
“나, 난 짐승이니까, 개처럼 머리를 처박고 먹어야 해.”
‘개처럼 머리를 처박는다’라는 말을 할 때만큼은 왕자가 조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틀림없이 유모가 몇 번이고 왕자에게 되뇐 것이다. 아, 나 진짜 돌아 버리겠네. 대체 이 왕자는 어디까지 내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이러지?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엄청나게 열이 받긴 하지만 우선은 참아야 했다.
“…다프네?”
“네, 왕자님. 잠시만요.”
“우, 울어?”
“아뇨, 그건 아니고.”
옆에 앉은 왕자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듯 손을 내리고 맞은편에 앉은 예니체 경과 마주 보았다. 그 역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듯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전에 조용히 하라고 해서 그런지 입만 뻐끔대며 나와 왕자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지금에 와서 내 부탁을 지키지 않아도 될 텐데. 그보다 우리는 왕자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 왕자님, 우선 얼굴을 좀 닦아야겠어요. 그리고 오늘부터는 수저로 식사를 하기로 해요.”
“하, 하지만.”
“네?”
“할 줄… 몰라.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
왕자가 제 얼굴을 가리려 든 손을 나는 얼른 맞잡아 내렸다.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진 그는 나와 예니체 경의 반응으로 인해 끔찍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을 닦아 주고 싶은데. 그러나 그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어졌다. 나는 뼈마디가 툭 튀어나온 왕자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괜찮아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왕자님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윽, 그, 그렇지만 너, 너희, 나를 하, 한심하다는 것처럼 쳐다보고.”
왕자의 손등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그를 바라보는 내 시야가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 왕자가 강아지로 변할 때면 매번 이런 식으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지. 아차 싶었던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다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예니체 경이 나를 쳐다봤을 때, 나는 접시에 놓인 버터 빵을 오물오물 씹어 먹고 있었다.
“앙자니믄… 하시마시 앙아요.”
“다 먹고 말하십시오, 다프네 양.”
“왕자님은 한심하지 않다고요.”
나는 빵을 삼킨 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입가에는 빵 부스러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다시 왕자를 돌아보자, 그는 변신을 하는 것도 잊은 듯 동그랗게 뜬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체온은 언제 열이 올랐냐는 듯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다행이었다. 사람이 먹는 음식 앞에서 강아지로 변하지 않아서.
물론 왕자는 보통 강아지와는 다르겠지만, 난 강아지에게 사료가 아닌 음식을 먹이는 게 좀 그랬다.
“오늘은 저도 왕자님이랑 같이 개처럼 머리를 처박고 먹을래요.”
“왜, 왜 그렇게까지….”
“왕자님이 짐승이라면 저도 짐승이에요. 왕자님이 사람이라면 저도 사람이고요.”
의자에 놓인 왕자의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어깨를 잘게 떨며 주위에 널브러진 수저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예니체 경이 수프 그릇을 싹싹 비우고 소시지를 버터 빵에 끼운 별미를 세 번이나 먹고 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