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왕자는 비누 향을 풍겨 대는 예니체 경과 내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등장했다. 미리 열어 둔 식당 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그를 먼저 알은체한 것은 나였다.
“어서 오세요. 배고파서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아, 안 돼. 쓰러지는 건….”
“그럼 얼른 들어오세요. 제가 쓰러지기 전에요.”
왕자는 커다란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식탁을 빙 둘러 후다닥 달려와 내 옆에 앉았다. 그 와중에도 예니체 경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그를 외면하려는 듯 벽을 쳐다보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새로 입은 짙은 초록 빛깔 셔츠는 예니체 경에게 빌린 것과는 달리 단추를 잠그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사이즈가 맞는 옷은 처음 입어서인지, 왕자는 이따금씩 어색하게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진한 색이 잘 어울리시네요. 방금 전에 새로 끓인 차예요.”
왕자는 로봇처럼 삐그덕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축한 장발이 그의 허리께에 닿아 있었다. 물기가 번져 나가는데도 왕자는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닭고기 요리를 데워 두었거든요.”
“가, 같이 갈래.”
“그러세요.”
껌딱지도 이런 껌딱지가 없다. 나는 그를 데리고 주방에 들렀다 나왔다. 예니체 경은 이미 우리의 이런 모습이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샐러드만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나는 가장 먼저 왕자의 접시에 닭고기를 덜고, 예니체 경에게도 나눠 준 다음 남은 고기를 내 접시에 담았다. 내가 음식을 나누는 동안 왕자는 뒤에 서서 에이프런 끈을 소중하게 잡고 있었다.
“저 좀 앉을게요.”
“아, 응.”
무턱대고 끈을 잡아당길 수도 없으니 나는 왕자를 돌아보았다. 얼떨떨하게 대답한 그가 곧바로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또 멀뚱멀뚱, 양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나만 쳐다보고 있어 나는 아, 하고 식탁에 올려진 포크와 나이프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부턴 이 정도는 알아서 들고 식사하시는 거예요. 알겠죠?”
“하지만… 아직 잘 사용할 줄 모르는데.”
“왕자님은 똑똑하셔서 금방 배우실 거예요.”
“내, 내가 똑똑한가?”
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자는 칭찬을 들은 것만으로도 기쁜 듯 어색하게 잡은 수저로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가 깨끗하게 잘리기보다는 너덜너덜해진 닭고기 한 점을 입에 넣자, 나와 예니체 경도 본격적으로 수저를 들었다.
왕자가 아래층으로 내려온 지는 아직 만 하루조차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벌써부터 그와 함께하는 일상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다녀오세요.”
식사를 마친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예니체 경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빈 접시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트레이에 접시와 수저들, 빈 찻잔이며 물컵을 담아 들려고 하는데,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왕자가 입을 여는 것이다.
“…무, 무겁지 않아?”
“어… 별로, 아니, 무거워요.”
사실 이 정도 무게도 들지 못해서야 메이드를 하겠냐만은, 별로라는 단어를 내뱉기가 무섭게 왕자가 슬픈 듯 눈을 내리깔아 나는 서둘러 말을 정정해야 했다. 내가 힘겹게 트레이를 드는 체하자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내가 도와줄 수 있, 있는데.”
“정말요? 감사해요. 우리 왕자님은 힘도 세시지.”
“…이, 이 정도는 아, 아무것도 아닌데. 난 오, 옷장도 번쩍번쩍 들 수 있어.”
옷장은 들어서 뭐 하게요,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어린애가 하는 자랑이려니 생각했더니 금방 납득할 수 있었다. 왕자는 트레이를 들고 성큼성큼 주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듯한 걸음걸이였다.
“저기다 놔 주세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서, 설거지를… 매일매일 다프네가 하는 거야?”
“네. 그 뒤에는 예니체 경의 침실을 정리하고요. 아, 그런데 오늘은 침실 하나가 더 추가될 예정이에요.”
왕자는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를 지나쳐 싱크대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왕자님이 쓰실 방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어느 쪽이 좋을까요? 예니체 경의 옆 침실?”
“그건 싫은데….”
얼마나 싫었는지 말도 더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한 칸을 띄운 방이 좋으려나. 곰곰이 생각하는데, 왕자가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물었다.
“다프네의 옆방을… 쓰, 쓰면 안 될까?”
“그건 안 돼요. 그쪽 침실들은 다 좁거든요. 게다가 욕실도 딸려 있지 않아요.”
“그, 그런 건 상관없는데.”
“제가 상관있어요. 왕자님은 왕족이신데, 당연히 좋은 방을 쓰셔야죠. 하물며 예니체 경도 욕실이 딸린 침실을 쓰는데.”
제 뜻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왕자는 대번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불만스럽게 찌푸린 미간을 꿈틀댄 그가 우물거렸다.
“예, 예니체 경은… 덩치도 크, 크고 무서워.”
“왕자님도 덩치 크세요.”
“그,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정도예요. 예니체 경이 근육이 심하게 빵빵하셔서 그렇지, 두 분 눈높이도 비슷하잖아요?”
이 왕자는 거울도 보지 않고 사는가. 나는 왕자와 입씨름을 하다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내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내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 왕자에게는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손을 움찔움찔하며 내가 찻잔을 닦는 것을 따라 해 보기도 했다.
“왕자님.”
“어, 어?”
“재밌어 보여요? 제가 설거지하는 거요.”
“아… 내, 내가 해 봐도 돼?”
“아뇨. 아무리 그래도 왕자님께 설거지를 시키는 건 좀 그렇죠.”
“나, 난 상관없는데.”
왕자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다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제 소매 좀 접어 주실래요? 아까 제대로 안 걷었는지 자꾸 내려오네요.”
“으, 응!”
역시 뭐라도 시켰어야 했나 보다. 왕자의 보랏빛 눈이 의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긴 다리를 크게 뻗은 그가 단숨에 내 뒤로 바짝 다가섰다.
“…왕자님의 숨결이 정수리로 느껴지네요.”
“아, 미, 미, 미안.”
“사과하실 일은 아닌데….”
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왕자의 턱을 간질였는지, 그가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자, 잠깐만 닿을게.”
“네?”
짙은 녹색 천으로 감싸인 팔이 앞으로 쭉 뻗어져 나왔다. 왕자는 내 머리에 턱을 살짝 괸 채 온 신경을 집중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렇게까지 심각한 분위기로 할 일인가.
왕자의 진지함을 비웃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굉장히 엄숙한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따금씩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의 은빛 머리칼이 흘러내려 뺨을 간질였다. 한쪽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왕자는 ‘이, 이번에는 바, 반대쪽.’ 하고 더듬거리며 손을 옮겼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팔 안쪽에 닿았다 떨어졌다.
“고마워요. 잘하시네요.”
“그, 그런가….”
“네, 다음에도 또 부탁해야겠다. 괜찮을까요?”
“으, 응! 매, 맨날맨날 부, 부탁해도 상관없어.”
마침내 내 소매를 모두 걷은 왕자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때 나의 시선은 닦다 만 접시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환한 낯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금 옆으로 비켜선 왕자는 언제라도 내가 부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몸을 들썩들썩거렸다. 비록 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일은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도 더 이상 없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헹궈 낸 티스푼을 정리한 뒤, 축축하게 젖은 손을 에이프런에 닦았다. 그러고는 왕자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주인의 시선을 받아 기쁜 강아지처럼 보랏빛 눈을 반짝였다.
“이제 위층으로 올라갈까요?”
“내, 내 방 정리.”
“맞아요. 왕자님도 이제 저희랑 같이 지내시는 거예요. 꼭대기 층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실 일 없이.”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왕자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촉촉해진 눈시울이 그의 감정을 대변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다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 당장은 새로운 침실을 쓰실 수 없을 것 같아요. 침구를 세탁해야 하는데, 지금 빨래를 해 봤자 하루 만에 다 마르지는 않을 것 같고….”
“그, 그러면 나는 어떻게, 어, 어디서 자?”
“글쎄요? 오늘 밤에도 강아지로 변신해서 저랑 같이 주무실래요?”
자연스럽게 예니체 경의 침실 옆방으로 들어갔다. 왕자는 문밖에서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눈을 도로록 굴리는 그가 보였다. 당황한 듯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나는 침실 내부에 난 작은 창을 열었다. 햇살이 찔끔찔끔 비치는 그 방은 허공에 먼지들이 살랑대고 있었다.
“싫으시면 말고요. 저는 하룻밤 정도 식당에서 잠을 자도 괜찮거든요.”
“내, 내게 다프네의 방을 양보하겠다는 뜻이야?”
“그래요. 예니체 경이랑 주무시는 건 죽어도 싫다고 하실 거잖아요.”
“그, 그건 싫어! 하, 하지만 다프네가 불편하게 자는 것도 난….”
그럼 어쩌라는 걸까? 그냥 본인이 강아지로 변해 주면 누구 하나 불편한 일 없을 텐데.
나는 옷장이며 책상, 침대 등을 덮은 회색 천들을 걷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긴 시간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침실은 왕자가 쓰던 꼭대기 층처럼 거미줄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하루 만에 전부 다 해치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회색 천들을 질질 끌어다 복도에 던져둔 다음 빗자루를 가져왔다.
“오늘은 바닥을 쓸고 가구들을 닦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어요. 그 정도만 해도 해가 저물 것 같아요.”
“나, 나도 할래.”
“왕자님이요?”
“내가 쓸 방이라며…. 다프네 혼자 하기엔 히, 힘들어 보여.”
궂은일 한번 해 본 적 없을 왕자의 고운 손을 쳐다봤다. 내 시선에서 부정적인 기운이라도 감지했는지, 그가 허둥지둥 빗자루를 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나를 지나쳐 바닥을 꾹꾹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먼지떨이를 꺼냈다.
“구석부터 시작하셔야 해요. 덕분에 금방 끝낼 수 있겠어요.”
왕자는 어색한 비질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아무리 손이 부족하다지만 왕자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정작 본인이 싫은 기색이 없으니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이름 없는 성은 고립된 세계였다.
왕자가 집안일을 좀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하는 이는 없으리라. 그는 구석으로 걸어가 기운차게 빗자루를 쓸어 댔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것처럼 나를 쳐다보는데, 허리를 숙일 때마다 가슴 아래까지 기른 머리가 찰랑대며 빗자루와 함께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