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잘하고 계세요. 그런데 잠시만요.”
“나, 자, 잘해?”
“네. 비질 한 번에 그렇게 힘을 주다간 금세 녹초가 될 것 같지만요.”
“노, 녹초.”
녹초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왕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대편 구석에 쳐진 거미줄을 털던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왕자는 말을 잘 들었다. 그는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상태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보라색 눈만 도로록 굴러가 나를 쫓았다. 나는 왕자의 머리 끝자락을 손으로 빗어 준 뒤 하나로 그러모았다. 그러고는 난감해져 중얼거렸다.
“움직임이 격하셔서 머리가 자꾸 바닥에 닿는데… 그런데 묶을 만한 게 없네요. 머리는 일부러 기르시는 거예요?”
“아, 아니. 딱히 일부러는 아, 아니야…. 나도 씻을 때마다 성가시긴 해.”
“그럼 잘라 드릴까요? 이렇게 예쁜데 아깝긴 하지만요.”
“예, 예쁘다니. 나는 남잔데….”
하지만 그는 예뻤다. 이 찰랑찰랑한 은빛 생머리를 보면 어느 아가씨라도 부러워할 것이다. 꾸미는 재미가 있을 머리다 싶었다. 나는 차라리 이 긴 머리를 땋아 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자 울상이 되어 있던 왕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다프네가 자, 잘라 줘. 나도 예, 예니체 경처럼 남자다워지고 싶으니까.”
“머리를 자른다고 다 남자다워지는 건 아닌데요. 왕자님은 울보잖아요.”
“난 우, 우, 운 적 없는데?”
“제가 아침에 본 건 뭔데요?”
“아, 아무튼!”
왕자는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는 씩씩대며 머리를 마구 털었다.
“자, 자를 거야. 지, 지금 당장.”
“하지만 지금은 청소 중인데요?”
“처, 청소는 나중에 하면 돼.”
“오….”
왕자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처음이었다. 감탄한 내가 박수를 치자, 그는 빗자루를 벽에 세워 두고 쿵쿵거리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놀림을 받아 토라진 그는 팔다리를 크게 크게 휘적거리며 복도를 걷다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그, 그런데.”
그러고는 킥킥대며 제 뒤를 따라오는 나를 보며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저를 비웃기라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머, 머리는 어디서 잘라…?”
“가위는 주방에 있어요.”
“아, 주방.”
남의 말을 한 번 더 따라 하는 건 그의 말버릇인 걸까? 내게서 해답을 얻어 낸 그는 다시금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주방 한쪽 바닥에 커다란 천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왕자님. 이제 와서 말해서 죄송한데, 저 머리 잘라 본 적 한 번도 없어요.”
“아….”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왕자님은 미인이셔서 어떻게 잘라도 예쁘실 거예요.”
“예, 예쁜 거 시, 싫어. 멋있게 잘라 줘.”
“멋있게 자르는 건 뭘까요?”
“모, 몰라. 마, 망하면 다프네 탓이야.”
“오….”
이번에도 나는 감탄했다. 왕자의 말솜씨가 일취월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해서 그렇지 멍청한 건 아니었나 보다. 하긴, 명색이 여주인공의 오빠인데.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를 속으로 생각하던 나는 주방용 가위를 들어 머리카락 길이를 가늠했다.
“어느 정도로 잘라 드려요? 이 정도? 아니면 이 정도?”
“더 짧게….”
“네? 단발보다 더요? 아깝지 않으세요?”
“아, 아깝지 않아. 짜, 짧게 자르고 싶어.”
왕자는 가위를 든 내 손이 목덜미 윗부분에 닿을 즈음이 돼서야 만족했다. 그러고 보니 예니체 경의 머리가 이 정도로 짧았던가. 예니체 경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을 만큼 그를 경계하면서, 정작 속으로는 그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 머릿결을 잠시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히 자르자고 했을까. 약간의 후회가 일었으나,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자를게요.”
“응.”
“진짜 자를게요.”
“진짜 잘라.”
이것 봐. 망설임조차 없다. 이윽고 나는 긴 머리를 한데 모아 싹둑 잘라 버렸다. 주방 가위가 이렇게까지 날이 잘 들 줄은 몰랐는데.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내려다보았다.
“자, 잘랐어요. 우와, 꼭 실타래 같아요.”
“목 뒤가 시원해…. 지, 진작에 자를 걸 그랬다.”
“잠시만요. 아직 손대지 마세요. 튀어나온 머리도 좀 정리하고, 앞으로 가서 어떤지도 봐야겠어요.”
“으응.”
왕자가 얌전히 손을 모았다. 나는 비죽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잘라 준 뒤 무릎걸음으로 왕자의 앞에 섰다. 다리가 길쭉한 왕자는 앉은키가 작았음에도 원체 체격이 커서 그런지 내가 무릎을 굽힌 채로 상체를 바짝 세워야만 눈높이가 맞았다.
뒷머리는 어떻게든 됐지만 이제는 앞쪽이 문제로군. 나는 멋대로 기른 왕자의 앞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나를 열심히 쳐다보다 눈가를 찡그렸다.
“눈 감고 계셔야죠. 짧은 머리카락이 들어간다구요.”
“이, 이미 들어갔는걸.”
“어디 봐요.”
왕자는 눈물점이 있는 왼쪽 눈을 마구 비볐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작디작은 머리카락을 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왕자의 손을 잡아 내리며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그가 주춤주춤 뒤로 상체를 물리기에 턱을 붙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왕자가 당황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톰하게 부푼 입술이 떨려 왔다. 그가 재빨리 은빛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저 좀 보세요. 속눈썹 자랑 그만하시고.”
“자, 자랑한 거 아니야…!”
그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왕자의 눈가에 숨결을 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왕자는 한층 더 당황해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커다랗게 뜨인 보랏빛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아니면 한 번 더….”
“괘, 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까지 격하게 말씀하실 일인지…?”
“진짜 괜찮아졌는데….”
왕자가 보란 듯이 눈을 깜빡여 그제야 나는 남은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다시 가위를 들자 방금 같은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그가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이다.
한동안 왕자는 진짜 조각상이라도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옆머리를 정리할 때도, 앞머리의 길이를 맞추기 위해 손가락으로 빗질을 할 때도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짧아진 머리칼을 살짝 털어 준 다음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다 끝났어요. 원래도 잘생기셨지만 이제는 말도 안 나올 만큼 잘생기셨어요.”
“말 나오잖아…. 자, 잘 나오는 것 같은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 그만 일어나 주시겠어요?”
주방 바닥이 은색 머리카락 천지로 변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왕자는 시원하게 드러난 뒷덜미를 매만지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마침 그의 옆에는 식기류를 보관해 둔 유리 찬장이 있어, 그는 유리에 비친 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넋을 놓고 본인의 얼굴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바닥에 깔아 두었던 천을 조심스럽게 접었다.
“다시 청소를 하러 가기엔 시간이 애매하네요. 오늘은 그만 씻고 쉴까요?”
“…다프네 마음대로 해.”
왕자는 좀처럼 유리창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했다. 남은 정리를 모두 끝낸 내가 제 뒤로 다가갔을 때, 그는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프네랑 있으면…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
“그런 말씀을 하기엔 아직 일러요.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생길 테니까요.”
“고, 고마워.”
“고마우면 오늘 밤엔 강아지로 변해 주실래요?”
“…….”
그는 잠시 침묵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나 보다. 하지만 강아지 버전이 아니라면 그와 함께 잘 수 없는데.
“아니면 예니체 경이랑 주무셔도 되고요. 예니체 경은 두 손 들고 환영할걸요?”
“으… 난 어, 어떻게 변신하는지 모르는데.”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 예니체 경의 침대는 넓답니다.”
“벼,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나는 투덜대는 왕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놀란 그가 움찔했으나, 더 이상 거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글공부나 할까요?”
“좋, 좋아.”
“뭐든 다 좋다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배우는 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혹여나 내가 억지로 시키는 건 아닐까 싶어 나는 왕자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기꺼워하고 있었다. 발그레 물이 든 뺨과 동그랗게 뜬 눈이 그것을 증명했다.
앞으로 심심할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왕자가 아, 하고 작게 입술을 벌렸다.
“까, 깜빡 잊고 있었어. 이, 이거.”
“네? 뭔가요?”
“그, 그믄보화…?”
바지 주머니를 뒤적인 그가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금은보화요, 하고 왕자의 발음을 고쳐 주다 말고 그의 손목을 놓쳐 버렸다. 왕자의 손바닥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그려진 금화가 놓여 있었다.
“세상에.”
“아, 아까 성을 돌아다니다 찾은 거야. 다프네가 조, 좋아한다고 그래서.”
“엄청 오래된 건가 봐요. 지금 쓰이는 금화랑은 다른 것 같은데…. 아, 아니. 그전에 손님. 머리를 자른 값이 너무 후한 거 아닌가요?”
“소, 손님이라니. 왜 갑자기 나를 그, 그렇게 불러?”
왕자에게는 농담도 못 하겠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금화를 열심히 구경했다. 그러자 그는 얼른 가져가라는 듯 내 쪽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가, 가져. 다프네 거야.”
“정말 가져도 되나요? 왕자님이 찾으신 거잖아요.”
“난 필요 없는데…. 이런 건, 물어뜯지도 못하고.”
“왕자님…. 그런 강아지스러운 발언 삼가 주세요.”
머리를 잘라 준 대가치고는 인심이 과하게 후했다. 아무래도 왕자가 강아지일 때 물어뜯고 놀 만한 봉제 인형이라도 만들어 줘야 할 듯싶다. 나는 좀처럼 호들갑을 떠는 법이 없었으나, 지금만큼은 차분하게 버틸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게요!”
“주, 죽는다는 말은…. 으, 다프네?”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데 이러면 좀 어때. 나는 왕자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키 차이가 나는 탓에 까치발을 들어야 하긴 했지만, 고작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와 포옹을 한 것은 겨우 몇 초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는 찰나, 왕자는 펑! 하고 작은 강아지로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