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차피 그 옷은 다음에 입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냥 잘라 내도 돼요?”
아셰라드렌이 사라지자마자 레티스가 물었다. 역시 이럴 때는 고향 사람이 낫다.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공주가 아닌 그녀는 시원하게 내게 제안한 뒤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됐대요? 문 앞에서 기사님이 자꾸 날 막아 대길래 난 둘이 거사라도 치르는 줄 알았어요.”
“왕자님은 저나 예니체 경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왕자님과 공주님을 마주치지 못하게 하려고.”
“뭐야, 그게. 무슨 라푼젤도 아니고.”
같은 여자라 그런지 옷을 벗긴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레티스는 나를 엎드리게 한 뒤 소독약을 천에 잔뜩 묻혀 발랐다. 비명이 절로 나오는 고통이었다. 내가 몸을 덜덜 떨자 그녀가 서둘러 연고를 덜었다.
“그나저나 언니, 나 많이 기다렸어요? 보고 싶었다며.”
“으… 당연하죠. 언제 올까 궁금했어요.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공주의 일과가 이렇게 복잡한 줄 몰랐어요. 혼자 내버려 두는 일이 없다니까요? 배워야 하는 외국어는 왜 또 그렇게 많은지.”
우리가 읽었던 소설에서는 레티스의 일상이 따로 나오지 않았다. 왕국이 침공당한 뒤, 국왕의 머리가 잘리는 것을 지켜본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레티스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세스나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국에서의 삶은 더 이상 일상이랄 것이 아니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그녀는 갇혀 지내듯 살다 이따금씩 남자 주인공과 마주쳐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기만 했다. 우리는 레르베 라예트 왕국에서의 레티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매일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요. 침대에서 일어날 때부터 시중을 받고요. 시녀들이랑 수다를 떠는 건 그나마 좀 낫지만, 그 후엔 부모님이랑 식사를 해야 하고, 피아노 연주에 하프 연주에, 사교댄스까지 온갖 교사들이 옆에 달라붙어서는….”
“말만 들어도 피곤하네요. 그동안 많이 답답했겠어요.”
“맞아요. 공주랍시고 구혼자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잘생겼어요?”
“…잘생겼으면 그나마 기분이라도 낫죠.”
나는 웃었다. 역시 소설 속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미남미녀는 아니었다. 투덜대던 레티스는 붕대를 감아야겠다며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러고는 붕대를 펼쳐 뒤에서 나를 껴안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제가 또 예전에 운동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예요. 그런데 여기는 또 테이프가 없어. 다 감고 나면 묶어야 하나?”
“그럴 거예요. 따로 고정시킬 만한 게 없어서.”
“언니는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어요? 전 체대 입시생.”
“어…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나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그보다 운동을 했으면 승마도 곧잘 하겠네요?”
“다들 말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말려요. 말을 타다 떨어졌으니 앞으로는 마차만 타고 다니라나 뭐라나.”
“아, 맞다. 그랬었죠. 그래서 세나 양이 공주님이 된 거고.”
레티스와의 대화가 자연스러워 잠시 잊고 있었다. 문득 나는 낯설 이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설로 읽었을 때는 어느 날 갑자기 누구누구가 되었다거나, 죽은 몸에 새로운 영혼이 들어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곤 했었는데.
새삼 그런 일을 실제로 겪은 이를 곁에 두고 있자니 느낌이 묘한 것이다. 깊이 파고들어 생각해 보면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낙마를 당해 죽어 버린 진짜 레티스에게도, 눈을 떠 보니 레티스가 되어 버린 문세나에게도.
“하기야 그럴 틈이 있으면 어떻게든 소설의 전개나 피하는 편이 낫긴 하지만요. 근데 언니,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북부 대공이랑 결혼하기 같은 것밖에 떠오르질 않아요.”
레티스의 손길이 내 옆구리에 잠시 머물렀다. 심혈을 기울여 매듭을 묶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내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 직접 왕위에 올라 전쟁 준비를 하는 건… 네, 아무래도 어렵겠네요. 학생이었던 공주님이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큰일을 한다고. 게다가 상상해 보니 전쟁이라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사람이 다 죽어 나가는 거잖아요.”
“어휴, 그런 건 싫어요. 차라리 전쟁광 남편을 맞아 나 대신 전쟁터에 보낸다면 모를까. 왜, 계약 결혼 같은 거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상대도 점찍어 둔 것 같네요?”
나는 새삼 레티스에게 미안해졌다. 전생으로 보나 현생으로 보나 내가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정작 이 나라를 위해 고민하는 건 그녀 쪽이 한 수 위였다.
우리 모두 살아남고자 하는 소망은 같았으나 내가 레티스를 만난 뒤로 한 짓이라곤 아셰라드렌과 청소하기, 아셰라드렌과 빨래하기, 아셰라드렌에게 글공부 가르치기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젠장. 물론 내가 이름 없는 성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못하는 입장이라고는 해도, 레티스를 위해 머리를 싸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우리가 일을 그르쳤을 때 왕자와 예니체 경을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네. 북부 대공은 아니고, 레르베 라예트의 남쪽에 모르기니아라는 대공국이 있대요. 그리고 그쪽 대공이 엄청나게 미남이라나 봐요. 무슨 열 살 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데 말도 안 되죠.”
“완전 소설 같은 성장 배경이네요. 모르기니아 공국이라면 저도 알고 있어요. 예로부터 남부 사막의 이르스족과 전쟁이 잦아 튼튼한 요새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그 요새가 이번에 완성됐대요. 아마 일주일쯤? 있으면 대공이 왕도를 방문한다나 봐요. 요새를 쌓느라 레르베 라예트에 빌렸던 대금을 치르러.”
왕성에 사는 공주의 소식통은 나보다 훨씬 빨랐다. 그녀는 이미 어떻게든 모르기니아의 대공과 엮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레티스가 정말로 대공과 계약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세스나 제국의 침략에 대비할 군사력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건 역시 어림도 없겠지. 남자 주인공을 찾아가 그의 목이라도 따지 않는 이상은.
“그런데 괜찮겠어요? 따지고 보면 남부 대공도 세스나 제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놈일 건데요.”
“경우가 다르니까요. 모르기니아의 대공은 그래도 먼저 전쟁을 일으킨 적은 없대요.”
“그러다 그쪽 대공이랑 사랑에 빠지겠네요. 계약 결혼이라니, 딱 보니까 그림이 그려져요.”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는… 그래도 상관없고요. 미친 또라이 리카르도보다는 낫지. 그놈은 날 독방에 감금시켜 놓고 굶기기까지 할 예정이잖아요.”
리카르도는 세스나 황제의 이름이었다.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 보던 나는 이 이상 레티스에게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인데 식사는 최고로 대접해야지.
리카르도 황제는 저만 보면 적의를 드러내는 레티스에게 분노해 그녀를 가둬 두고 종종 찾아가 비웃음을 던지는 놈이었다.
후반부에 가서는 눈꼴사나운 사랑꾼이 된다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는 여정이 길어도 너무 길다. 그런 놈이랑 맺어질 바에야 차라리 남부의 전쟁광이 낫긴 하겠네. 나는 쓰라린 등을 자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휘청휘청 몸을 일으켰다.
“어어, 가만히 있어요. 왜 그래요, 언니. 뭐 필요한 거 있어요?”
“계속 벗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고요.”
“도와줄게요. 환자는 움직이는 거 아니에요.”
왕자와 일상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공주에게도 부축을 받고 있으려니 이게 과연 메이드의 인생이 맞나 싶었다. 이 정도면 호사를 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레티스는 내 설명을 듣고 옷장으로 다가가 검은색 일색인 옷들 사이에서 생크림색 블라우스와 새파란 치마를 꺼내 왔다. 어느새 로맨스판타지 세계관 속에 적응한 그녀는 부상을 입은 상태로는 한 벌로 된 꽉 끼는 드레스가 불편하리라는 것쯤을 알고 있었다.
“당분간은 이렇게 나눠진 거 입어요. 나 가면 언니 혼자 입고 벗어야 할 텐데, 이렇게 편한 옷이 낫지. 여기는 사람도 얼마 없는데 설마 복장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겠죠?”
“예니체 경이나 왕자님은 그럴 분들이 아니에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나는 레티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허리 뒤쪽의 리본을 묶고 있을 때 그녀는 피가 묻은 천들을 한쪽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안 돼요, 공주님. 이미 일은 충분히 많이 했잖아요. 설마 왕성에서도 이러는 건 아니죠? 공주는 원래 손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어야 할 텐데.”
“앗, 실은 가끔 깜빡하고 실수할 때가 있긴 해요. 언니 같은 메이드에게 존댓말을 한다던가, 치마가 너무 길어서 혼자 넘어질 때도 있고.”
“…조심해요. 의심이라도 받으면 곤란하잖아요. 뭐, 생각해 보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으니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 같아도 그러려니 하려나 싶기도 하네요.”
레티스는 턱을 긁으며 애매하게 웃었다. 공주라면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텐데, 그중 하나 정도는 그녀의 이상을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역시 현실과 소설은 달라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내 시녀 중 하나가… 나를 되게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큰일이잖아요. 어떡하면 좋아. 공주님 가까이 계신 분이라 뭔가 알아차렸나 봐요.”
“아, 괜찮아요. 괜찮아.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난 공주인데 뭐 어떡할 거야. 왕한테 가서 공주님이 수상하다고 이르기라도 하겠어요?”
“그러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국왕 폐하께서 공주님을 끔찍하게 아끼시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테니.”
되려 그 시녀가 호통과 함께 벌을 받으면 모를까. 경우에 따라서는 공주의 시녀라는 귀중한 자리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왕에게 사랑받는 하나뿐인 공주를 곁에서 모신다는 건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고작 약간의 의심으로 그 자리를 내던질 위인은 없을 것이다. 레티스는 분홍빛이 감도는 예쁜 입술을 활짝 벌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공주로서 차차 적응해 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