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40)화 (40/123)

40화

“왜냐하면….”

“내, 내가 다프네를 계속 쳐, 쳐다봐서?”

“네?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왕자는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였다. 그의 인생을 곁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입 밖으로 꺼내기는 힘들었다. 나는 자꾸만 말끝을 뭉개며 망설였다.

“음, 그러니까… 아셰는 남자예요. 저는 여자고요.”

“그 얘긴 아, 아까 했잖아.”

“원래 남자와 여자는 같이 자면 안 되는 거예요.”

“이때까지 같이 잔 건 뭐, 뭔데?”

극도로 흥분한 왕자가 따지듯 물었다. 울먹이는 보랏빛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젠장, 못 하겠어.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알고 있었잖아. 다만 그날이 조금 빨리 오게 되었을 뿐이지.

“이제까지는… 아셰를 남자로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이해가 아, 안 돼. 나는 처음부터 남자였어.”

“맞아요. 그치만 전 여태껏 아셰를 그냥 귀여운 강아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 아, 울지 말고 들어 봐요.”

바닥에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내년이면 성인인 남자가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이제 말없이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어르고 달래 주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왕성에 가서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제가 아셰를 남자로 느낀다는 건, 언젠가 아셰와 키스를 하고 싶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요.”

“…….”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 돼요. 어제도 말씀드렸죠? 그랬다간 제가 범죄자가 된다고요.”

“…응.”

“지금 아셰랑 키스하면 저는 어디 무서운 곳에 끌려가게 될 거예요. 사실은 같이 자는 것도 그래요. 다른 사람들에게 들켰다간….”

“다프네가 부, 붙잡혀 가는 거야?”

“네.”

순진한 왕자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거칠게 뺨을 문질러 눈물을 닦은 그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왕자는 청초한 눈매를 내리깐 채 불안한 듯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미, 미안해. 내가 바보라서, 그런 줄도 모르고.”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희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해요.”

“응…. 들키지 않게 할게.”

진짜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확신이 들지는 않았으나, 입술이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도록 스스로를 학대하는 그를 말리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불그스름해진 아랫입술에 급히 엄지손가락을 대었다. 날카로운 치아가 내 살을 파고들었다.

“아! 미, 미안해.”

“이렇게 입술을 뜯으시면 어떡해요. 저랑 키스하고 싶으시다면서.”

“…그, 그러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아셰라드렌을 설득하기란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내 안전을 들먹인 덕분일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새로 온 사람들이 있는 동안은 전에 치워 뒀던 아셰의 방을 써 주세요. 그러실 수 있죠?”

“…응.”

대답이 조금 느렸다만,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었다. 오늘 아침부터 그가 메이드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바라는 것 또한 분에 넘치는 희망 사항이겠지.

그래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배가 고프네요.”

“나, 나도. 실은 한참 전부터 그랬어.”

“식당에 가면 잔느와 리카가 있을 텐데, 그래도 같이 가실래요?”

싫으면 내 방으로 식사를 가져오겠다고 말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다프네가 같이 있어 준다면.”

“네? 뭐라고요?”

“다프네가 원하는 게 그, 그거잖아. 소, 솔직히 엄청 싫지만.”

“와, 저 방금 진심으로 감동했어요. 아셰가 먼저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이야.”

어제부터 갑자기 뭐지? 혹시 아셰라드렌도 안에 다른 영혼이 빙의했나?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내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그는 난생처음 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 하지만 가서 변신하게 될지도 몰라. 다프네가 아닌 메이드들은 무서우니까.”

“변신해도 상관없어요. 어제 보니까 둘 다 강아지를 엄청 좋아하던걸요.”

“그럼 강아지로 가는 게 좋을까?”

저렇게까지 세세하게 물어보다니,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부스스한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어차피 아셰는 세상에 둘도 없을 미남이라, 지금 그대로 내려가도 좋아할 거예요.”

“으…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초조해진 왕자가 문가를 서성였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왕자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붙잡고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동안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놓기를 수십 번도 넘게 반복했다.

“정 내키지 않으시면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식사를 가져오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밤에 잠도 가, 같이 못 잘 텐데, 낮에도 떨어져 있긴 싫어.”

“그러시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다프네는 내가 강아지일 때만 나랑 꼭 붙어 있고 싶어 하잖아….”

왕자는 말을 하다 말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변신 능력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었다. 꼬물꼬물 셔츠 사이로 빠져나온 하얀 털 뭉치가 내 발등 위로 올라왔다.

나는 그를 번쩍 들어 올린 뒤 문고리를 돌렸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뭐야, 다프네.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세탁실의 하루는 새벽 일찍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안다. 이름 없는 성으로 소속을 옮긴 뒤 간만에 숙면을 취했을 잔느는 나를 보자마자 활기차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리카와 마주 보고 앉아 있던 그녀는 왕성에서 보내 주었을 레몬 타르트를 야금야금 먹으며 나를 흘겨봤다.

“여태까지 이렇게 고급진 디저트만 혼자만 먹었다 이거지? 치사하게.”

“너 그거 몇 개째야?”

“응? 세 개째. 안심해. 네가 먹을 양은 남겨 뒀으니까.”

“왕자님도 우리랑 같은 식사를 드셔. 왕자님의 몫은 남겨 뒀니?”

“…그건 몰랐는데 어떡하지?”

눈을 휘둥그레 뜬 잔느가 먹고 있던 타르트를 내려놓았다. 리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다프네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했잖아….”

“고용인들끼리만 먹으라고 주기엔 왠지 메뉴가 너무 화려하다 싶지 않았어?”

나는 잔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그녀의 곁을 지나갔다. 주방에 들러 접시를 두 개 가져오자 그제야 내게 안겨 있던 강아지를 발견한 리카가 벌떡 일어났다.

“와, 왕자님이랑 같이 왔어?”

“뭐? 어디, 어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잔느가 물었다. 나는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은 뒤 어느새 또 벌벌 떨기 시작하는 아셰라드렌의 등을 쓸어 주었다.

“와, 왕자님을 뵙습니다!”

잔느는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고, 리카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어차피 아셰라드렌은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을 예정이었다.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왕자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

당연하겠지만 왕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의 접시에 꿀을 바른 닭 다리를 올려 주었다. 킁킁, 새까만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의자에서 드시는 편이 낫겠죠? 여기까지 오신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하셨어요.”

식탁보가 강아지의 작은 체구를 가려 줄 테지. 왕자는 좀처럼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버둥버둥 몸부림을 치는 그를 의자에 내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코앞에 놓인 닭 다리를 보고도 나만 멀뚱멀뚱 쳐다보기 바빴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선뜻 용기를 내서 와 봤지만 역시 안 되겠나 보다.

“저기, 미안한데 둘 다 잠깐 식당 밖에 있어 줄래? 어제도 말했지만 왕자님이 낯을 심하게 가리셔.”

“꼭 그래야 돼? 나도 귀여운 왕자님 보고 싶은데.”

“…여기선 다프네가 선배잖아. 우리는 다프네의 명령을 따라야 해.”

나와 왕성 입사 동기인 잔느는 투덜거렸지만, 리카는 순순히 잔느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다른 왕족의 앞이었다면 혀가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언동이었다.

나중에 따로 주의를 주는 편이 좋으려나. 혹시 세탁실에서도 저런 식으로 굴었던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마담 셀라가 잔느를 이름 없는 성에 보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식당에 저희 말고 아무도 없어요. 안심하고 드세요.”

아셰라드렌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그의 위치를 식탁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그러자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한층 밝아진 눈빛으로 나를 돌아본 그가 부드러운 꼬리털을 붕붕 흔들어 댔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을까? 다행이었다.

마침내 아셰라드렌은 닭 다리를 앙, 하고 한입 물기 시작했다. 귀여웠다.

“닭고기는 많이 남아 있어요. 천천히 드시고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왕!”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벌려 신나게 짖은 그가 다시금 식사에 집중했다. 나는 흐뭇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그러고 보니, 하고 오늘은 만나지 못한 예니체 경에 대해 생각했다.

그 또한 상관의 눈 밖에 나 좌천된 기사였지. 그렇다면 리카나 시르시안도 남모를 이유로 이름 없는 성에 오게 된 것일까?

리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해도 시르시안이 후작가의 사생아인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이 사생아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쪽도 배경이 좀 안타까운 사람이네.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면 태어날 때부터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란 내가 제일 안타깝다.

“별로 상관은 없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잘게 자른 닭 다리 살을 빵에 끼워 넣었다. 간만에 튀어나온 혼잣말을 들은 아셰라드렌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