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속은 괜찮습니까? 물이라도 갖다줄까요?”
언제부터 몸을 떨고 있었을까. 예니체 경은 경련하듯 벌벌대는 내 팔을 붙잡고 물었다.
“물을… 마시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잖아요. 저기 리카가 있는데.”
“리카 양이 죽은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혼자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엄한 죄책감 갖지 마십시오. 그래 봤자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검은 머리의 기사가 곁을 지켜 주는 것이 퍽 든든했다. 나는 조그맣게 알겠어요, 하고 속삭이며 가까이에 있던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지금은 다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셰라드렌은 내가 지켜 줘야 하는 존재지만, 예니체 경은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물론 기사는 내가 아니라 왕자를 위해 일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왕자님은 왜 이렇게 커져 계십니까?”
예니체 경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물었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왕족의 안위에 비하면 사실 한낱 메이드에 불과한 리카의 죽음 따위는 크게 대두될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그게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씀드리면 될까요?”
“네, 가능하다면.”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늦은 밤이었어요. 배가 고파서 왕자님과 식당에 다녀왔더니, 리카가 제 방에서 나오더라고요. 그것도 왕자님이 제게 주신 금화들을 모두 훔쳐서.”
“…결국 자업자득이었군요. 옆에 놓여 있던 금화들은 뭔가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왕자님이 이렇게… 변신하시는 바람에, 리카가 도망을 가려다 저를 공격했어요. 왕자님은 리카를 붙잡으려고 하셨고, 아. 잔느!”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후로 잔느는 어떻게 됐더라? 방에 들어가라고 한 뒤에는 잔느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다.
“혹시 잔느 양도 부상을 입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까 저기 있었는데….”
나는 잔느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리카가 저렇게 된 뒤로 잔느를 보지 못했으니 아마 그녀는 방에 있을 것이다.
예니체 경은 잔느를 걱정하는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왕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일어섰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왕자님, 다프네 양을 지켜 주십시오.”
“…….”
당연하겠지만 아셰라드렌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예니체 경의 허리를 주둥이로 쭉 밀어냈다. 이쪽은 제게 맡기고 얼른 가 버리라는 것처럼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 왕자가 늑대로 변신했던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땐 예니체 경에게도 이를 드러내며 경계했었는데.
“아셰.”
“…….”
“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
“안타깝게도 리카는 저렇게 됐지만, 그건 저희 탓은 아닐 거예요.”
그래도 마음은 무거웠다. 나는 커다란 보랏빛 동공을 마주한 채 울상을 지었다.
아셰라드렌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귀를 쫑긋거리기만 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물어 봤자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곧 왕성에서 사람들이 온다는 것 들었지요?”
늑대의 모습을 한 아셰라드렌을 보고 또 다른 소란이 일지는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성은 그가 사는 곳이었다. 그가 타인들을 위해 자리를 피할 이유는 없었다.
“아셰?”
그럼에도 그는 몸을 일으켰다. 서 있는 방향은 계단 쪽이 아닌, 방들이 들어서 있는 복도였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앞서가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라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왕자를 혼자 두고 싶지도 않았고, 나 역시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 덩치로 제 방은 좀 좁지 않겠어요?”
“…….”
“아셰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죠.”
늘씬하게 뻗은 네 다리로 그가 향한 곳은 내 방앞이었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온 이후로 이곳은 아예 그의 방이나 다름없었다.
턱 밑을 긁어 주며 물었지만 늑대는 내 방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떻게든 들어가겠다는 건가. 그가 들어간다면 내가 발 디딜 틈 같은 건 거의 없을 텐데.
“어휴, 알았어요. 고집은.”
차라리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그의 방에 가는 것은 어떻겠냐 물어도 요지부동이라, 나는 한숨을 쉬며 하얀 갈기를 슬쩍 꼬집어 당겼다.
작은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프지도 않은지 그는 나를 보며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쪽으로.”
결국 왕자가 원하는 대로 문을 열어 줄 때였다. 마침 잔느의 상태를 보러 갔던 예니체 경이 옆방에서 나와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깜짝이야.”
“별로 안 놀라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심장이 덜컹했습니다.”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제복 재킷을 걸친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잔느가 있었다.
나는 늑대의 등허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왕자님. 저는 잔느랑 얘기 좀 하다 갈게요.”
잔느는 아직 나와 아셰라드렌을 발견하지 못한 듯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얇은 입술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때문이야. 다프네 때문이야. 다프네 때문이야. 다프네 때문이야. 다프네 때문에 내가 죽고….”
“다프네 양은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당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프네가, 다프네를 믿었는데…. 잘살고 있다고 해서…. 그런데 마담 셀라가 나를 보내서….”
그냥 듣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정신이 나간 듯 중얼대던 그녀는 예니체 경을 무시한 채 우리의 곁을 지나가려 하다 걸음을 멈추었다.
“꺄아아아아! 괴, 괴물이! 나, 나를 해칠 거야! 리카에게 한 것처럼 나를 덮칠 거라고!”
그녀는 아셰라드렌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창백해진 낯빛이 꼭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잔느 양은 왕성에 보내는 편이 좋을 듯하여.”
“아, 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느의 반응은 리카보다도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니체 경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굴고 있었다.
“다프네 양이 오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메이드들이 가끔 난리를 부리곤 했었습니다. 왕성에 가서 좀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보통은 해고를 당하지만.”
이름 없는 성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면 직장까지 잃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닌 듯했다. 나는 조용히 예니체 경에게 끌려 나가는 잔느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응? 아, 미안해요. 이제 들어갈까요?”
그러다 아셰라드렌이 자꾸만 주둥이로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걸 깨닫고 물었다. 하룻밤 사이에 동료 메이드를 둘 모두 잃게 되다니.
크게 내색하진 못했으나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익숙하게 방 안으로 쏙 사라져 버리는 아셰라드렌을 뒤따라갔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와는 달리 육중한 덩치. 그가 방 안에 몸을 누일 공간 같은 건 없었다.
“바닥에 냅다 누워 버리시네요.”
그러나 아셰라드렌은 한숨을 쉬듯 푸르르, 하고 주둥이를 털더니 침대 밑에 앉아 몸을 길게 뻗었다. 가로 길이가 최소 3미터는 되려나. 잘도 이 작은 방에 몸을 요리조리 구겨 넣고 있다 싶었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도 이만한 크기의 생물은 보지 못할 것이다. 잔느가 아셰라드렌을 보고 까무러쳤던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렇게 커져도 귀엽기만 한데.”
보라, 저 촉촉해 보이는 새카만 코와 흰 눈 사이에서도 구분이 안 될 법한 새하얀 몸체, 그리고 이불 대신 덮고 자도 좋음 직한 기다랗고 덥수룩한 꼬리털을.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작은 강아지일 때와 별반 다르지도 않았다. 그저 사이즈가 열 배 정도 불어난 것뿐.
그래서 이빨이 사람 따위는 종잇장처럼 가볍게 찢어발길 것 같이 날카로워지고, 발톱은 이름 없는 성과 같은 오래된 건축물 정도는 한 방에 무너뜨릴 것처럼 강인해지긴 했다만.
이 두 부위만 빼고 본다면 아셰라드렌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쉽게도 잔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잔느와 아셰가 친해질 시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잔느도, 제 눈에 보이는 아셰를 볼 수 있었을 텐데요.”
왕자를 바닥에 두고 나 혼자 침대에 올라가기도 그래서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 중얼거렸다. 아셰라드렌은 앞발을 다소곳하게 모아 그 위에 턱을 괸 채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보랏빛 눈동자에 울적해 보이는 내가 비쳤다. 유리처럼 투명한 눈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이라고 추정되는 부위)을 만지작거렸다.
“식당에서 하던 얘기나 마저 할까요? 아셰도 저랑 있는 게 좋다고 했던 얘기.”
“…….”
“저도 아셰랑 있는 게 좋아요. 아셰만 원한다면, 둘이서 왕성을 떠나 조용한 곳에 숨어 살고 싶을 정도예요.”
왕자가 앞발에 대고 있던 턱을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이냐는 듯, 그가 예쁜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 순간 나는 아차, 하고 입을 열었다.
“말을 잘못했네요. 둘이 아니라 셋인데. 이왕이면 예니체 경도 함께하는 게 좋잖아요.”
“…….”
이름 없는 성의 원래 식구는 나와 아셰라드렌 그리고 예니체 경까지 포함이니까. 그러나 왕자는 내가 예니체 경을 입에 담자마자 관심도 없다는 듯 푸우,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