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다프네 양이 저희 어머니와 닮은 것도 아닌데….”
한참을 웃은 뒤에 그는 눈썹을 모으며 사과했다. 하지만 그가 딱히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어떤 마음으로 내게 친절을 베풀려고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벌써 도착한 걸까요?”
어머니를 일찍 잃은 남자들이 모성에 집착한다는 건 흔하디흔한 로맨스 소설의 클리셰였다. 나는 시르시안도 개중 하나겠거니 여기기로 하고 물었다.
마차 밖은 금융 지구였다. 빠릿빠릿해 보이는 은행원들이며 잘 차려입은 신사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래서 내 복장을 지적한 거였구나. 나는 창밖을 내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내린 시르시안이 화사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들어가시죠. 드레스를 사느라 시간을 지체했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저, 은행에는 처음 와 봐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네요.”
시르시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회색 돌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갔다. 내부를 지키고 있던 병사 중 하나가 금세 그를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오늘 이곳에서 일정이 있으십니까?”
“따로 방문할 예정이라는 걸 알리지 않고 왔다. 귀빈실의 긱스바 영감을 불러와라.”
나와 같은 평민 생활이 길었다는 것 치고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시르시안은 좀 가까워졌다 싶으면 또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하긴, 부모의 신분조차 모르는 나와 부모 중 한쪽이 고위 귀족인 그는 출발선부터 다를 테니까.
나는 병사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대하다 헐레벌떡 사라지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그러고는 제아무리 사생아여도 대우는 제대로 받나 보네, 하고 감탄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저를 저렇게까지 극진히 모시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네?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했던가요?”
“음… 아니요?”
때마침 시르시안이 말을 걸어 오길래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입 밖으로 꺼냈다간 평민 주제에 건방지다며 뺨을 맞아도 할 말 없는 소리를 속으로 중얼댔는데.
시르시안의 머리와 내 머릿속이 동기화가 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그는 뜬금없이 격하게 반응하는 나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다프네 양의 표정이 영 어색해 보여서요. 물어보지 않은 건 알지만 설명해 봤습니다. 아무리 귀족가라 해도 사생아란 가문의 수치거든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지금 저쪽에서 다들 시르시안 님을 알아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요?”
나는 업무를 보고 있던 은행원들이 이쪽을 힐끔대는 걸 가리켰다. 시르시안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내 쪽에서는 괜히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본 적은 오늘 아침을 빼고 처음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바닥을 내려다보며 시르시안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뭐 하십니까?”
“네?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제 뒤에 있지 않습니까. 옆으로 나오세요.”
“저희 계속 이렇게 은행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하나요?”
이쯤 됐으면 슬슬 누가 시르시안을 모시러 와야 하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든 순간 외알 안경을 낀 건장한 노신사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정정해 보이시는데 지팡이는 왜 들고 계신 거지. 패션용인가?
그보다 노신사의 번쩍거리는 차림을 보니 부티크에서 나오기 전에 머리 손질이며 화장을 받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시는 줄도 모르고 다른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시르시안보다 최소 40년은 더 살았음 직한 노신사가 깍듯하게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우리를 응접실 같은 공간으로 데려갔다.
“이쪽이 도련님께서 말씀하셨던 다프네 아가씨입니까? 귀여운 미인이셔서 놀랐습니다. 과연 도련님께서….”
노신사는 의도적으로 말끝을 늘이며 나와 시르시안을 고풍스러운 2인용 소파에 앉혔다. 그런 다음 본인도 맞은편에 앉아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에게 차를 세 잔 부탁했다.
“다프네는 부끄러움이 많으니 그렇게 자세히 쳐다보지 말게. 그보다 서둘러야 해, 영감. 저녁을 먹고 출근하러 가야 하거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얼른 가서 계약서를 가져오겠습니다.”
노신사가 지팡이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메이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틈을 타 시르시안을 쳐다보았다.
“저녁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은행만 들렀다 돌아가야 하잖아요.”
“긱스바 영감은 수다쟁이입니다. 그렇게 말해 두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여기 붙잡혀 있을 것 같아서.”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분이 저희 사이를 잘못 알고 계시는 듯한데 그건 제 착각일까요?”
시르시안이 입을 열기 전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메이드가 차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가 민트향이 나는 차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쟁반에는 귀여운 모양의 쿠키며 초콜릿이 놓여 있었으나 손을 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시르시안은 나를 슬쩍 바라보며 웃음을 참았다.
“착각 아닙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가 귀찮아서 그만. 혹시 기분 나쁩니까?”
“아뇨, 뭐… 시르시안 님의 배려 덕분에 금고를 쓰게 되었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물론 별로 달갑지는 않았지만.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가리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상쾌한 페퍼민트의 향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계약서를 읽어 보시고 아랫부분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뒷장에도 서명이 필요하니 천천히 확인해 주십시오.”
돌아온 노신사가 내게 붉은 깃털이 달린 펜을 내밀었다. 우스테 은행 귀빈 전용 금고 어쩌고.
나는 우아한 필체로 쓰여진 계약서를 살펴보다 문득 시르시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함께 있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빈손이었다.
“저기, 시르시안 님.”
“…이런, 둘만 있을 때처럼 시안이라도 불러도 좋다고 했잖아.”
“아… 네, 아무튼. 제 금화는 어디에 있을까요?”
시르시안이 저렇게 느끼한 소리도 할 줄 알았구나.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대답은 그가 아닌 긱스바 영감에게서 나왔다.
“제가 얼마 전에 저택에 들러 받아 두었습니다. 아가씨의 자산은 이미 금고에 있으니 염려 거두셔도 됩니다.”
“미안하네, 영감. 다피도 나와 같은… 사정이 있어서 이런 지식이 거의 없어. 이해해 줘.”
다피는 또 누구며, 저와 같은 사정이 있다는 건 또 뭔가. 벙찐 나와는 달리 시르시안은 아차 싶은 듯 뺨을 긁으며 짓는 미소로 상황을 모면했다.
노신사는 바로 이해했다는 듯 인자한 웃음을 띠며 침묵해 주었다. 왠지 마음이 급해진 나는 빠르게 계약서를 읽어 내려간 뒤 서명을 휘갈겼다.
“다 됐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다면 여기서 잠시 쉬면서 차를 즐기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계약서를 돌려받은 긱스바 영감이 말했다. 시르시안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어. 다음에 다피가 오면 영감이 직접 안내해 주도록 해.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아이라.”
“물론입니다, 도련님. 살펴 가십시오.”
은행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당했으나 정작 은행에서의 업무는 금방이었다. 우리는 거의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는 노신사의 배웅을 받으며 귀빈실을 나섰다.
은행을 나와 다시 마차에 올랐을 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르시안 님께서 설정하신 다프네란 인물은 귀족가의 사생아 출신에 시르시안 님의 애인인 건가요?”
“그게 많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가장 간단하게 당신의 신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나도 금고를 사용할 구색 정도는 만들어야 했거든요.”
왕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그는 이런저런 뒷얘기를 내게 알려 주었다. 그러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미리 설명할 생각이었는데, 부티크에서 나온 뒤로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대충 이해했어요, 시안. 그래도 다음부턴 다피에게 먼저 말해 줘야 해요.”
“…귀엽네요, 정말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무슨, 농담도 못 하겠다. 나를 멍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시르시안이 부담스러워서.
그나저나 금화들을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 보관할 수 있게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나는 언제든 몸만 가지고도 잠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셰라드렌만 어떻게 잘 설득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을 텐데. 나는 껴 본 적이 없어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레이스 장갑을 벗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야지. 이 장갑 한 짝만 해도 내 반년 치 연봉이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네요. 왕자님께서 제 부재를 모르고 계셔야 할 텐데.”
왕성의 새파란 첨탑이 가까워질 즈음, 나는 장갑을 메이드복이 든 종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셰라드렌을 보러 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다.
“부디 프리지어 누님이 왕자님을 잘 붙잡고 계셨기를 바랍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분이시니 아직까지 같이 계실지도 모르고요.”
시르시안은 조급해하는 나를 안심 시켜 주며 몸을 숙여 마차 바닥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내 검은 구두를 집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게 꼭…. 괜히 엄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시르시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숙여 내가 신고 있던 깜찍한 진주가 한 알씩 장식된 구두를 벗겼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나도 손이 있고 발이 있었다.
“아, 아뇨. 제가 할게요. 어차피 스타킹도 갈아 신어야 하고….”
그러니까 옷을 갈아입는 건 마차에서 내린 뒤에 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기겁하며 그의 손에 붙들린 발을 빼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그가 웃음기가 사라진 금갈색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