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린아이는 어둠을 무서워하니까 뒤늦게라도 아셰라드렌이 제 결정을 물렸으면 했으나, 그는 내가 일부러 뜸을 들여 옷장에서 새까만 크라바트를 꺼내는 동안 멀뚱멀뚱 가만히 뒤에 서 있기만 했다.
“…아셰, 지금이라도 취소해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난, 상관없어.”
아니, 내가 상관이 있다. 나는 크라바트를 들고 아셰라드렌의 주위를 어물쩍거렸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지금 나는 아주 수상한 짓거리를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왕자의 눈을 가려 두고 그 앞에서 몸을 씻는다니. 듣기만 해도 해괴망측한 행위가 아닌가?
“알았어요. 몸을 조금만 굽혀 주세요.”
“응, 이렇게?”
아셰라드렌은 순순히 내 요청에 응했다. 그는 제 등 뒤로 다가서는 나를 힐끗 돌아보며 기다란 눈매를 접어 웃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나만 심각한 거지? 난 민망해 죽겠는데 아셰라드렌은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가만히 계세요. 매듭을 묶어야 하니까요.”
나는 무릎을 굽힌 왕자의 눈가를 크라바트로 가린 뒤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하고.
그가 역시 이건 이상하다며 고개를 젓기를 바랐건만 그런 일은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고, 결국 나는 그의 시야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아셰라드렌은 더듬더듬 팔을 휘저어 나를 찾았다.
“어, 어디에, 있어? 냄새는 이쪽에서, 나는데.”
내 쪽으로 돌아본 그의 손이 턱에 살짝 부딪히고 떨어져 나갔다. 나는 움찔 놀라는 그를 잡아 이끌었다.
“어디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세요.”
“응…. 그런데 욕실은, 저쪽이지?”
후각이 좋은 그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닌 듯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진짜 이상한 짓 하고 앉아 있네. 지금이라도 당장 집어치우자는 소리가 목구멍에 턱 걸려 입 밖으로 빠져나오질 못했다.
끝끝내 아셰라드렌을 욕실에 데려간 나는 한숨을 쉬며 두툼한 수건 여러 개를 바닥에 깔았다.
“여기 앉아 계세요. 물이 튀지 않을 거예요.”
“응. 얼른, 씻어. 눈이 안 보이니까, 냄새가 더 지, 지독해.”
“…네, 죄송해요.”
눈을 가린 미소년을 욕실 바닥에 앉힌다는 이상한 그림을 만들어 낸 뒤, 그 이상 망설일 것도 없어 나는 에이프런의 리본을 풀고 드레스를 벗어 내렸다.
사르륵, 옷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그도 들었을까. 분명 들었을 것이다. 스타킹을 벗은 뒤 고개를 들자 우뚝하게 솟은 콧대와 반듯한 입술만 보이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일었으니까.
“이제… 진짜 씻을 거예요.”
“아… 응.”
생각해 보면, 내 쪽에선 아셰라드렌의 알몸을 곧잘 봐 왔지만 내 몸을 그에게 보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이따금씩 그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긴 했다만 그는 심하게 부끄러워하며 알아서 제 시야를 차단했었다.
그런데 왠지 오늘만큼은 절대로 눈을 돌릴 것 같지 않단 말이야.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가려진 그의 시선이 분명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듣기만 해도 대충 알 수 있잖아요.”
“어차피, 아, 안 보여.”
하지만 듣고 있잖아. 나는 입 모양으로 구시렁거리며 뜨거운 물로 몸을 적셨다. 그러고는 급히 비누를 온몸에 펴 발랐다.
향수를 뿌렸던 머리카락에서 프리지어의 냄새가 난다고 했으니, 머리를 박박 감아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늦잠을 잤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서둘러 몸을 씻은 적이 없었는데.
나는 온몸 구석구석에 비누칠을 마구 해 댄 다음 허겁지겁 물로 헹구고 나와 수건을 찾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아셰라드렌이 수건걸이 아래에 앉아 있어서.
“…실례할게요.”
나는 대답도 없이 얌전히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외면하고 수건을 잡아당겼다. 쭉 뻗은 손에서 뚝뚝 떨어진 물이 그의 콧잔등에 한 방울 떨어졌다.
아셰라드렌은 이번에도 움찔 놀라며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앞에 두고 거칠게 몸을 문질러 닦았다. 그러면서 나를 이렇게나 부끄럽게 만든 아셰라드렌을 말없이 노려보는데, 전에는 본 적 없던 그의 변화가 내 이목을 잡아끌었다.
“…어, 언제부터 이랬어요?”
“뭐, 뭐가.”
“거기 밑에.”
“욕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솔직했고, 나는 민망했다. 성교육은 마담 지르젤이 아니라 내가 몸으로 직접 가르쳐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몸이 반응한 것을 보는 내 얼굴은 시뻘겋게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 전엔 이런 적이 없었단 말이야. 정말로.
이름 없는 성에 머물 때만 해도 순진하기 그지없던 나만의 왕자님이, 왕성에 살게 되면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그를 내려다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속옷을 주워 들었다.
언젠가 아셰라드렌의 운명의 반려니 뭐니 하면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이 더러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의 저런 모습까지는 그려 내지 못했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그도 성인에 가까운 남자인데. 그러나 매일같이 한 침대에서 부대끼고 잠을 청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였기에 나는.
“저, 전에도, 이런 적 있으세요?”
위아래의 속옷을 챙겨입은 뒤, 한 벌로 된 속치마를 머리 위로 끼워 넣으며 물었다. 일단은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다. 아셰라드렌의 저런 모습을, 기대하고 그의 앞에서 나체쇼를 벌인 것은 아니었다.
“모, 르겠어. 처, 처음인 것 같은데.”
내가 검은 드레스의 단추를 잠글 즈음 아셰라드렌은 입을 떼었다. 입고 있는 바지가 불편하기라도 한 듯 그가 허리 아래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자, 잠시만요. 지금 뭐 하시려고….”
“이거, 갑자기 꽉 끼어서. 뜨겁고,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할 정도로 뚜렷한 욕망이 느껴지는데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정말로 저 나이가 되도록 저런 신체 반응을… 겪지 않았을까?
의심스러웠지만,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바지춤을 쭉 잡아당기는 걸 보면 또 아예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셰라드렌은 끙, 하고 코로 숨을 들이마시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 이상해. 자꾸 다리에, 힘이 들어가.”
그는 신경이 쓰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기겁하는 걸 눈치채고는 망설이며 허벅지 바깥 부분을 손끝으로 죽죽 그어 댔다.
저걸 어떻게 하면 좋지? 난 그의 선생이 아니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신경 쓸 새도 없이 나는 에이프런을 두르고 그의 앞에 다가섰다.
아셰라드렌은 긴 다리를 벌린 채 엉거주춤 앉아 크라바트에 가려진 시야로 나를 올려다봤다. 헤벌어진 입술이 오늘따라 붉고 촉촉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욕실이 습해서 그런 거죠? 그래서 입술이.”
“…응? 다프네, 나 여기가 이상해.”
아악!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성에 무지한 왕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니.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 자꾸만 시선이 돌아갔다.
내가 가까이 있음을 깨달은 커다란 손이 한순간에 나를 끌어당겼다.
“봐 봐, 다프네. 나 여기… 으, 원래는 보여 주면, 안 되는 건데.”
“…그런 건 알고 계시네요. 그런데 저기, 우선 여기서 나가면 안 될까요?”
널따란 가슴팍에서 심장 소리가 요동쳤다. 쿵쿵, 쿵쿵. 나는 그 세찬 뜀박질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셰라드렌은 남자였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런 식으로 갑자기 확 다가오는 건, 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제야, 다프네 냄새가 나…. 좋다.”
아셰라드렌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더듬더듬 내 등을 매만지던 그가 축축한 머리카락 속에 코를 파묻고 웃었다. 히이, 하는 귀여운 소리까지 내고 있었지만 귀엽다기보다는 그 작태가 의심스럽기만 했다.
지금의 그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성적인 욕망에 눈을 떠서는, 내 몸의 냄새를 맡으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들썩이는 그가….
“아, 안 돼요. 이런 건, 아셰에게는 아직 이르다고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는 계세요?”
“몰라…. 나 이제 이거 풀래. 응?”
나는 아셰라드렌의 얼굴을 죽 밀어내며 물었다.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그가 떼를 썼다. 칭얼대며 크라바트를 손쉽게 목으로 끌어 내리는 데에는 몇 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술에 취한 듯 몽롱해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욕실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좋은 냄새가 나, 다프네.”
“씨, 씻었으니까요. 그보다 저,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니까요?”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이쪽 아래.”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셰라드렌이 내 치맛자락을 들추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성마른 그의 손길을 쳐 내는 데 급급했다. 이렇게나 말랐는데 어째서 조금도 밀어낼 수가 없는 걸까.
무력감에 빠진 나는 이내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셰라드렌이 싫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남자로서 다가오는 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 품에 안겨 곤히 잠들곤 하던 새끼 강아지였는데! 사람이자 짐승인 그 때문에 알 수 없는 배덕감이 들었다.
비단 우리의 신분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좋아, 나는 여태까지 그를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귀여운 강아지 취급하고 있었다.
“안 돼요. 싫어요. 전에 그러셨잖아요.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그런데 지금 이건, 키스보다도 더한 행위인데.”
“…우, 울어? 다프네. 우는 거야?”
“…몰라요.”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든 아셰라드렌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원망스러운 것은 그의 신체 변화에 반응하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참담해진 나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거렸다. 나의 왕자님은 늑대가 맞았고 짐승이 맞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은근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