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왕자 길들이기 (70)화 (69/123)

70화

정곡을 찔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시르시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주방에서 메이드 하나가 죽은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일과 저는 관련이 없어요.”

그는 해명을 이어 나갔다.

“그 메이드는 스스로 목을 매단 것이 아닙니까. 저도 의무실에서 들었습니다.”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실비아는 어떻게든 레티스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그녀는 내 도움을 필요로 했고, 나 역시도 실비아를 위해 움직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레티스가 그러했듯 실비아도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는 그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비아는 곧 스스로를 해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 좋습니다. 그녀가 자살을 한 게 아니라고 칩시다. 그런데 다프네 양은 왜 하필이면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그야 당신이 레티스의 사고 현장에 있었고, 실비아는 콕 집어 우스테 가문을 멀리하라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속에 있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내뱉지는 않았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다음 희생자는 내가 될 게 뻔했다. 어쩌면 나는 눈앞에 두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딱히 시르시안 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나는 다프네 양과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속으로는 나를 그런 식으로 여겼다니.”

시르시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불만스러웠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당하게 새벽에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나 싶어서.

이렇게 시르시안과도 거리를 두게 되는 건가. 씁쓸해진 나는 다시 왕자의 침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문고리를 잡은 나를 막아 세웠다. 한쪽 팔로 벽을 짚은 그가 내 뒤에 밀착해 옅은 숨을 토해 냈다. 나는 이제야 아차 싶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실비아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나 봐요. 아까 제가 드린 말씀은 잊어 주세요.”

“믿어 주세요. 나는… 다프네 양이 상상하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시르시안은 꽤 간절한 표정으로 내게 호소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나요? 그래 봤자 저는 아무런 힘도 없는 메이드일 뿐이에요.”

시르시안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지칭할 때 나, 혹은 저를 바꿔 가며 사용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확실히 내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사실 이 남자를 의심한다고 해서 내가 달리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내가 그를 죽이기라도 할까?

그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물론 레티스와 실비아를 죽인 범인을 찾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그렇다고 복수를 위해 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유약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신분이 다르다 해도 우리는 나름대로 친한 친구가 아닙니까. 난 당신과 멀어지고 싶지 않아요.”

시르시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왕성에서 그나마 속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이 중 하나라고 여겼는데…. 나는 자꾸만 내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실비아가 자살한 게 아닐 수도 있단 얘기를 꺼낸 건 조금 섣불렀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시르시안이 끝까지 제 행적을 알려 주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울적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다 결국 침실로 들어갔다.

“어머, 귀여운 강아지.”

아셰라드렌은 어느새 변신해 옷 속에 푹 파묻혀 자고 있었다. 또 크기가 자랐는지 짧았던 다리는 온데간데없고, 새하얀 네 발을 곧게 뻗은 상태였다.

나의 작고 소중한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물론 지금도 굳이 따지자면 자그마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이름 없는 성에 살던 그대로의 왕자를 좋아했는데.

어째서 아셰라드렌은 자꾸만 성장을 하는 걸까? 당연한 거지만 변해 가는 그가 나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살며시 주저앉았다. 깊은 밤, 벌레 우는 소리만이 나를 위로해 주는 듯했다.

⋆★⋆

그리고 다음 날, 결국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셰라드렌의 시중을 들었다. 사람으로 돌아온 그에게 옷을 입히고, 마담 지르젤의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봤다.

“잘하셨습니다. 이제야 왕자님다운 태가 나시는 것 같군요.”

다행히도 아셰라드렌은 오늘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수업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마담 지르젤이 나간 뒤에는 처음 보는 남자 귀족이 나타나 그에게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제왕학을 가르쳤다.

아셰라드렌은 이제 새로운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수업을 들었고, 이따금씩 나를 쳐다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 애매한 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대체 뭘 어쩌고 싶은지도 모른 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왕자는 저 멀리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밤에는 저녁을 먹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는….

“국왕 폐하 드십니다.”

해가 중천으로 향할 무렵이 된 어느 날의 오후였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왕자의 응접실에 들이닥쳤다.

“가만히들 앉아 있게. 굳이 일어날 필요 없어.”

국왕의 등장은 아셰라드렌의 어색한 외국어 억양으로 인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왕자의 외국어 교사인 마담 미르넬은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그러나 아셰라드렌이나 레티스와는 다르게 수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국왕을 향해 인사했다.

“폐하의 방문을 미리 알지 못해 준비하지 못한 점을 용서하여 주세요.”

“되었다. 잠깐 들렀다 갈 터이니.”

국왕의 보라색 눈동자는 아셰라드렌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제 자식을 보는 혐오스러운 시선. 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몸이 떨렸다.

아셰라드렌은 처음 국왕이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울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잔뜩 긴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아셰라드렌이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힘겹게 떼었다.

“그, 그, 그렇습니다… 아바마, 마.”

“그 말을 더듬는 버릇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군! 내 누누이 거슬린다 경고했건만.”

국왕이 혀를 차는 모습은 마담 지르젤이 나를 볼 때마다 하는 행동과 겹쳐 보였다. 사랑받지 못하는 건 알았지만, 아셰라드렌은 국왕에게 유달리 미움을 받고 있었다.

“죄, 죄송, 합, 니….”

“그 입 다물거라. 한낱 짐승 주제에 인간의 껍데기를 두르고 있으니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국왕은 한심하다는 듯 제 아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나를 보더니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계집 같은 얼굴을 갖고서 남자 구실은 할 줄 아는 모양이지. 그래, 우스테가의 여식과 붙어먹을 생각일랑 말고, 네 수준에 어울리는 여자로 만족해라.”

“…무, 무, 무슨 뜻인지,”

“말대꾸하지 말고!”

대체 국왕은 왜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를 저런 식으로 대할까? 가만히 있다가 덩달아 모욕을 당한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셰라드렌과 나의 관계에 대해 국왕마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왕자의 위치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우스테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쯧!”

국왕이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등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적막감만 맴돌았다. 아셰라드렌은 불쌍할 정도로 몸을 벌벌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마담 지르젤과는 달리 내게 심한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는 마담 미르넬이 급히 나를 향해 손짓했다.

“오늘 수업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할까요. 그러고 보니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하네요.”

말과는 달리 혈색이 좋아 보이는 마담 미르넬이 빠르게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나중에 나는 그녀에게 실은 국왕 부부가 이제 와서 후사를 보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것을, 그것도 제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들이 곧 성인이 될 아들을 적대시하며 견제하다니.

일단 둘이서만 응접실에 남게 되자,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아셰라드렌의 상태를 살폈다.

평생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부모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란 어려운 걸까? 고아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도 길었던 나는 좀처럼 왕자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셰. 나 좀 봐 볼래요?”

“…응?”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 순간,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소파의 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아셰라드렌은 당황한 듯 잠깐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내 등에 손을 올리고 말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물기에 젖은 축축한 은빛 속눈썹과 열이 올라 빨갛게 부은 입술.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기다란 한숨을 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