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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73)화 (72/123)

73화

결심했다고 해서 바로 떠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간 우리가 함께해 온 정이라는 것이, 왕자를 향한 나의 사랑이, 나를 자꾸만 망설이게 만들었다.

오늘도 나는 벽에 걸린 그림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아셰라드렌의 일상을 지켜보았다. 이따금씩 나를 쳐다보면서도 마담 지르젤과의 수업에 열중하는 그. 이제는 시녀들과도 자연스럽게 한두 마디씩을 주고받는 그….

‘응,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네.’

그런 왕자를 볼 때마다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어미 새의 둥지를 떠나 자립하게 된 아기 새였다. 속이 허하고, 도저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제 그만 사라질 때였다.

“오늘 오후에는 우스테 후작가를 방문하신다지요?! 처음으로 왕성 밖을 나가시는 것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만.”

아침 수업이 끝날 무렵, 마담 지르젤은 나를 완벽히 무시하며 아셰라드렌에게 말했다. 사실 그녀쯤 되는 신분이 일개 메이드를 의식한다는 게 우스웠다.

“아… 어떻게, 알았어.”

“저는 프리지어 님의 어릴 적 예절 교육 담당이기도 했답니다. 친한 사이인 만큼 소식도 빠르지요.”

“가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프리지어가 멋대로.”

아셰라드렌은 내 눈치를 보며 답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더 이상 귀엽거나 사랑스럽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역시 나는 불순분자인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젯밤에 우스테 남매를 두고 목청을 높여 가며 싸운 탓이었다.

아셰라드렌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창밖에는 해가 맑았고, 여태껏 한 번도 넘어가 본 적 없는 푸른 산이 웅장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번 생에도 지난 생에도 왕도에서만 지냈었지.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휴가를 받아도 여행을 떠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뭐 어떻습니까?! 그렇게 차차 발을 넓혀 가시는 것이지요. 언젠가는 귀족들이 한데 모이는 행사에도 참여하셔야 할 테고.”

“발을 왜, 넓혀?!”

“…어쨌거나, 꼭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요.”

마담 지르젤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먼 산을 바라보더니 급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직 아셰라드렌은 일반인 수준의 지식을 가지기까지 갈 길이 멀었다.

그보다 프리지어의 자택을 방문한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아셰라드렌은 내게 그녀와 관련된 얘기는 조금도 해 주지 않았다.

어째서 숨겼을까. 마지막까지도 씁쓸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나는 그에게 내년이면 이 나라가 없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아 두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다. 남은 건 떠나는 것뿐. 둘밖에 없는 응접실에서, 나는 애써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떠나면, 그는 이 왕국과 함께 죽게 될 테지.

“…다프네. 화, 났어?! 아직도?”

아셰라드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슬프고 분했다. 어째서 왕성에 오기 전에 서둘러 그를 데리고 떠나지 않았을까? 그때라면 좀 더 쉬웠을지 모르는데.

그러나 그때야말로 왕성의 온 시선이 다 아셰라드렌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무슨 배짱으로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그와 함께 사라질 수 있었겠는가.

지나치게 신중했던 결과, 나는 기회를 놓쳤다. 내 말이 법이자 진리였던 왕자는 이제 없다.

“오후 언제쯤, 우스테 저택으로 가세요? 저는 듣지 못한 얘기라.”

내가 그를 버려두고 떠난다면 그것 또한 죄였다. 나는 왕자의 결말을 알고 있고, 충분히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아셰라드렌은 내가 말머리를 돌린 것이 달갑지 않다는 듯 짜증스레 한숨을 쉬었다.

“얘기를 할, 틈이 없었잖아. 어제는… 그러니까.”

그러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니 새삼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내가 미안해. 요즘 다프네를 보면, 왠지 참을 수 없어져서.”

“그건 저도 그래요. 저는 원래 감정적으로 구는 사람이 아닌데, 왕자님만 보면….”

아셰, 라는 애칭을 차마 입에 담기가 힘겨웠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지적하려나 싶어 그를 힐끗 바라봤다.

왕자는 내 말을 듣자마자 기쁜 듯이 예쁜 보랏빛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왕성을 나갈 때, 다프네도 같이 가. 난 다프네와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으니까.”

“…앞으로는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셔야 할 거예요. 왕이 되시면 원하는 대로만 하실 수는 없거든요.”

물론 그가 왕이 될 일은 없겠지만. 나는 뒷말을 삼키며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좋을까. 나와 함께 살아남지 않겠느냐고.

“저….”

“다프네는 내가, 왕이 되는 게 그렇게 싫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어마마마가 새로운 아기를 낳아서, 내가 다시,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살았으면 하는 건가?”

용기를 내어 꺼낸 한마디가 허공으로 바스러졌다. 인상을 쓴 아셰라드렌은 낯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최근에는 곧잘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세상에,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어요.”

나는 양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왕자는 그 나름대로 수많은 고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다시 유폐되고 싶지 않은 거구나.

왕성에서의 나날들을 반가워하고, 혹시나 이 생활을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속내를 몰라주고 있었다.

어떻게든 왕성을 나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아셰라드렌이 요즘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감옥이라니요. 이름 없는 성에서 저랑 지냈던 날들이 그렇게 느껴지셨나요?”

“다프네랑 지내는 건, 즐거웠어. 하지만 그전까지는….”

꼭대기 층에 갇혀 평생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고립되어 살아왔다. 어쩌면 아셰라드렌의 인생에서는 나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그 고독한 나날들이 더 크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의 인생을 단편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저는 왕자님을… 너무 제 마음대로 이해하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야?”

아셰라드렌이 여전히 얼굴을 구긴 채 되물었다. 나는 꼭 그를 책 속의 인물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그는 지금 이곳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인데. 19년간의 인생 중에서 나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몇 달이 전부인데.

내가 그의 뭐라도 되는 줄 착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이번 인생은 회귀 전의 삶과는 너무도 달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점심 드셔야죠?”

비참한 기분. 그러나 나는 감정을 숨기고 웃어 보였다. 아셰라드렌은 인상을 풀면서도 수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참기 힘들었다. 나는 밖에 대기하고 있을 키친 메이드들을 불러오겠다며 변명하듯 중얼거린 후 자리를 떴다.

문을 열자 응접실을 지키고 있던 예니체 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다프네 양?”

그 역시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만 혼자 이곳에서 사라지면, 예니체 경도 이 나라와 함께 죽고 말겠지.

숨이 막힐 정도의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나는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프네! 괘, 괜찮아? 다프네!”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졌다. 내가 왜 이러지? 나를 쫓아온 아셰라드렌이 내 몸을 흔들어 대는데도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곧이어 눈앞이 새카매졌다.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나만 홀로 살아남고. 나만 홀로 살아남고. 나만 홀로 살아남고….

머릿속에서 멋대로 같은 말이 쉴 새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왕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좀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여기서 나가 버려야지. 이제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내 나는 아득한 의식을 놓아 버렸다.

⋆★⋆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는 아셰라드렌을 위해서만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에게 지독하리만치 무심했던 나를 구해 주었던 은혜를 어떻게든 갚겠답시고.

다시 이름 없는 성에서의 일상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그저 행복했다. 끔찍한 괴물이라던 왕자는 비명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생명체였고, 그에게 세상을 하나하나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웠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요즘 왜 이렇게 기절을 자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몸이 많이 허해졌나 봅니다.”

나는 방에 누워 있었다. 왕성에 온 뒤로부터 묘하게 멀어진 예니체 경을 곁에 두고서.

그는 염려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해 버릴 왕국에 그를 두고 가는 것이 못내 신경이 쓰이도록 말이다.

“…예니체 경.”

“그냥 누워 있어요. 왕자님께서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요.”

하지만 그래 놓고 저는 우스테 후작저로 떠났을 테지. 안 봐도 뻔했다. 여기가 이름 없는 성이었더라면 내 곁에 있을 이는 아셰라드렌이었다. 예니체 경을 경계하며 어떻게든 나와 둘만 있으려고 하던 왕자였건만.

“왕자님은요?”

“성에 계시지 않습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네요. 아마 한두 시간 후에는 돌아오시지 않을까요.”

“대놓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왕자님께서는 프리지어 님과 같이 계신다고요.”

“…글쎄요. 제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서.”

예니체 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검은 머리와 날카롭게 찢어진 검은 눈동자. 짙은 피부에 커다란 어깨. 그야말로 듬직한 왕실 기사님.

나는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이름 없는 성에서 함께했던 예니체 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셰라드렌만큼은 아니라지만 그와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

“울지 마세요, 다프네 양.”

그런 그도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툭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예니체 경은 침착하던 태도도 잊고 허둥지둥 내 손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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