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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78)화 (77/123)

78화

그리고 유모는 정말로 당분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넓은 방 안에 홀로 앉아 벽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미안해,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처음에는 문장조차 제대로 이어지질 않았으나,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읊조린 결과 그는 말을 더듬거리지 않고 사과를 할 수 있었다. 그래 봤자 그의 사과를 받아 줄 상대는 그곳에 없었지만.

“배, 배, 배고파….”

어제는 드디어 아껴 두었던 곰팡이 핀 쿠키마저 다 먹어 버렸다. 소년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는 이제 욕조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버티고 있었다.

컴컴한 방 안에서 그의 피부는 유달리 하얗게 빛났다. 뒤늦게 유모의 충고를 들은 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끊임없이 청결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던 그는 이따금씩 앙상한 제 손목이며 뼈가 다 드러나 보이는 발목을 긴 시간 동안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다 정신이 아찔해져 눈을 감았다 뜨면, 시야는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미숙한 정신을 가진 소년은 그에 걸맞게 미숙한 짐승으로 변해 제 옷가지에 몸을 말고 누웠다. 작고 새하얀 꼬리가 낡고 오래된 성벽이 선사하는 추위에 벌벌 떨리고 있었다.

“시, 식사입니다. …와, 왕자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름 없는 성의 꼭대기 층은 단절된 세계였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려던 어느 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셰라드렌은 고개를 들고 꼬리를 바짝 치켜세웠다. 낯선 냄새,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며칠 내내 굶주렸다는 것도 잊고, 그는 그저 타인이 반가워 헐레벌떡 문가로 달려갔다.

“…끼잉.”

그러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만 남아 있었다. 그는 자그마한 앞발로 문을 벅벅 긁어 댔다. 침이 줄줄 흘러나올 만큼 배가 고팠다.

“으으….”

나무와 철문으로 만들어진 문을 애처롭게 긁고 있자니 앞발이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이었다가, 짐승이 되길 반복했다.

몸의 크기가 변해도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그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생겨나자 아셰라드렌은 정신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거, 거기, 누구, 어, 어, 어, 없….”

그러고는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먼지가 잔뜩 쌓인 바닥과 어두컴컴한 계단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는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숙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건더기가 많은 수프와 고소한 향이 나는 버터빵이었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쟁반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끌어왔다. 문을 닫은 후에는 언젠가 유모가 알려 주었던 것처럼 고개를 처박고 정신없이 음식을 해치웠다.

“…흑, 마, 마, 말레나.”

소년은 유모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제 앞에서는 절대로 이름을 부르지 말라, 예의상으로 알려 주는 것이니 그 저주받은 입에 담지 말라, 매섭게 눈을 치켜뜨고는 했던 그녀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어차피 있어 봤자 주먹으로 얻어맞거나 벽에 머리를 처박거나 하겠지만…. 그럼에도 유모의 손길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가 아는 유일한 따뜻함이었다.

아셰라드렌은 유모가 무섭고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찾아와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는 걸.

“시, 식사입니다.”

하루 종일 다 해진 옷을 입고 벌렁 침대에 드러누워 있으면, 이따금씩 누군가가 문 앞에 다가와 음식을 놓고 가기 시작했다.

아셰라드렌은 그 소리가 반가워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는 누구야? 누군데 유모 대신 나를 찾아 줘? 네 얼굴이 궁금해. 너는 어떤 사람일까? 이름은 뭐지?

그는 순식간에 문가로 뛰어가 꿀꺽 침을 삼켰다. 궁금한 건 참 많았지만, 도저히 문을 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밖에 있는 누군가가 그가 먹고 내놓은 식기를 챙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 너, 누, 누구….”

“꺄아악!”

하지만 그는 사람이 그리웠고, 망설임 끝에 문을 살며시 열고 말았다. 그러자 문 앞에 있던 누군가, 그러니까 처음 보는 새까만 옷을 입은 여자가 그대로 접시를 놓쳐 버리며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다.

놀란 아셰라드렌은 몸을 움찔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자는 산산조각이 난 접시가 흩어진 것도 모르고 바닥을 짚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악! 피, 피가…!”

여자가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제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힉, 히끅, 하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아셰라드렌을 힐끔거렸다.

앞으로는 유모 대신 네가 오는 거냐고,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 방에는 들어오지 않는 거냐고.

그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여자는 그가 짐승일 때 으레 그러하듯 등을 납작 엎드리고 네발로 기어갔다.

“자, 잘못했어요…. 사, 살려 주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여자는 되레 겁에 질려 주문을 외우듯 그에게 사과했다. 혹시 그가 저를 따라올까, 계단을 짚은 여자가 아셰라드렌을 힐끔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질겁을 하고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쿵! 그러다 어딘가에 부딪혀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굉음을 내기도 했다.

괜찮은 걸까. 아셰라드렌은 불안하게 어두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차마 문밖으로는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뭐, 뭘 자, 자, 자, 잘못, 했, 는데…?”

그래서 그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다 식어 빠진 고기가 올려진 쟁반을 챙겨 문을 닫았다.

고개를 숙이자 엉망으로 엉킨 긴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다. 그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인사를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

유모는 앞으로 영원히 그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확신한 것은 다음 날부터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식, 식사입니다. …왕자님.”

어제까지 그의 식사를 챙겨 주던 여자가 아니었다. 목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너도 나를 보면 부리나케 도망가 버릴까. 아셰라드렌은 문 앞에 주저앉아 여자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러다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때쯤 문을 열고 손을 뻗었다. 턱. 누군가 제 손을 잡아챘다.

“뭐야? 괴물이라더니, 사람이잖아. 그것도 어린애.”

당황한 아셰라드렌은 정신없이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더니, 이내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불쌍해라…. 혹시 말은 할 줄 아니?”

“…으으.”

유모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아셰라드렌은 멍하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씩 웃으며 그의 뺨을 툭 건드렸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혹시 내가 안에 들어가도 될까?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한데.”

“…하, 지만 유, 유, 유, 유모가, 아, 아무도 들, 들이지, 마, 마, 말라고, 했….”

“마담 말레나 말이지? 그분은 이제 여기 오지 않아. 그래서 내가 오게 된 거야.”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아셰라드렌은 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억지로 문을 열고 꼭대기 층 내부를 살폈다. 그러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코를 틀어막았다.

“여길 청소한 적은 없지?”

“처, 청소.”

“딱 봐도 그런 것 같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을 따라 하는 그를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셰라드렌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이 여자는 나를 해치지 않을 건가 봐. 심지어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아셰라드렌은 보랏빛 눈동자를 끔뻑이며 여자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너.”

“…으?”

“밤마다 괴물로 변한다면서? 사실이야?”

“…사, 사, 사, 사실, 이야.”

그는 소심하게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면 이 여자도 도망가 버릴까. 그렇다면 변신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제어할 줄 몰랐다.

“이렇게 말도 잘하고, 얼굴도 멀끔하니 잘생겼는데…. 불쌍하게도.”

여자는 안타까운 듯 저를 쳐다보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잘생겼다고? 내가? 아셰라드렌은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여자가 샐쭉 웃었다.

“내일 또 올게.”

그녀가 꼭대기 층에서 내려간 후, 아셰라드렌은 온종일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생각했다. 유모처럼 나를 때리지도 않고, 전에 왔던 여자처럼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아.

그의 마음속에 한 줄기 빛이 파고드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약속대로 그를 다시 보러 온 여자는 어제와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가만히 있어. 난 널…. 아, 미안. 왕자님이지? 왕자님을 자세히 보고 싶으니까.”

그녀는 다짜고짜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고는 옷을 벗으라며 닦달했다. 영문을 모르는 아셰라드렌은 여자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자 여자는 품에서 말린 종이들을 꺼내더니 얇고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쥐었다. 여자의 입가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아셰라드렌은 이유 모를 공포를 느꼈다.

“그, 그게, 뭐… 나, 나, 나를, 어, 어쩌, 려고….”

“나는 왕자님이 대체 어떤 몸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듣자 하니 괴물이 되면 엄청나게 거대해진다며? 무슨 원리로 그렇게 되는 걸까?”

“나, 나를, 해, 해, 해치겠다는….”

“그런 거 아니야. 피를 조금 볼 뿐이라고. 어차피 지금은 낮이잖아? 낮에는 변신하지 않을 테니, 조금만.”

여자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칼날이 비쩍 마르고 납작한 그의 윗배를 향했다. 아셰라드렌은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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