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세나야, 오늘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애옹!”
“안 돼. 닭고기가 아직 다 안 삶아졌단 말이야.”
샛노란 지붕이 인상적인 집으로 돌아온 나는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맨 채 세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양이 세나는 나와 수다를 떨기보다는 냄비 속에 있는 닭고기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안 궁금하다고?! 알았어.”
내가 항구에서 죽어 가던 너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키워 주기까지 했는데 너무하네. 반들반들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어 준 나는 씻은 오이와 양상추를 그릇에 옮겨 담았다.
왕성이며 우스테 후작가에 있을 땐 몰랐는데, 혼자 살면 야채의 섭취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더라. 그간 만들어진 음식만 먹었던 내게 생애 첫 자취란 어렵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이제 먹어. 너무 급하게 먹으면 안 된다?!”
내 몫의 촉촉한 햄과 야채를 넣은 샌드위치를 완성시킨 뒤, 세나에게도 식힌 닭고기를 쭉쭉 찢어 덜어 주었다.
고양이가 식사를 시작하자 나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만들어 식탁에 앉았다. 샌드위치는, 독서를 하며 먹기 딱 좋은 메뉴였다.
“결말이 왜 이따위지? 확 그냥 작가 찾아갈까.”
“냥.”
샌드위치를 다 먹은 것과 동시에 나는 책을 덮었다. 데하힐 왕국에서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들은 죄다 내용이 막장이었다.
아무래도 왕국 자체가 너무 평화롭고 조용해서, 이렇게라도 자극을 찾으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여주인공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살아 있었고, 그래서 다시 독살을 당했지만 남주인공의 눈물을 받아 마시고 눈을 뜨다니.
“하긴, 현실에는 빙의자도 있고 환생자도 있는데.”
나는 세나의 턱을 긁어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여유로운 삶이었다. 아무런 사건도 없는.
“세나야, 침대에 가서 쉬자.”
앞치마를 의자에 걸어 두고, 새로 꺼낸 소설 하나를 옆구리에 끼우고 층계를 올랐다. 문득 아까 밖에서 봤던 커다란 발자국이 머릿속을 스쳤다.
찜찜한데. 마빈 아저씨 말대로 칼라하 마을 주변에는 위험한 짐승이 살지 않는다. 귀족의 사냥터와도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정작 그 사냥터에도 여우며 사슴 정도밖에 풀어놓지 않는다.
취미가 고약한 귀족이라면 곰이나 늑대를 잡아다 둘 수도 있겠으나…. 만약 그곳에서 동물들이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로만이 누군가에게 언질을 주었겠지.
나는 시무룩하게 가게를 나서던 로만을 떠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그렇다면 설마, 정말로 왕자님이신가.”
확률적으로 어려운 소리란 걸 알면서도 나는 은근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로맨스 소설을 읽은 탓인가? 근사한 모습을 하고 나타난 아셰라드렌이 나를 왕성으로 데려가는 그림이 멋대로 상상되었다.
‘진짜 미쳤나 봐. 내가 먼저 그를 버렸으면서.’
다시 만난다 해도 절대로 마냥 아름답기만 한 재회는 아니겠지. 어쩌면 그의 곁에는 이미 부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갑자기 심장이 난도질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괴로워졌다. 이제 그만 생각하자. 나를 위해서도 묻어 두는 게 좋겠어.
나는 세나와 함께 침실로 들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깊게 깔린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무서운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으으, 세나야. 엄마를 좀 지켜 줘.”
“…냥?”
고양이는 어쩌라고,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커튼을 쳤다. 덩치 좋은 마빈 아저씨와 다른 아저씨들이 마을을 지켜 주겠지, 뭐.
부디 그 발자국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기를. 그리고 그 발자국이 아셰라드렌의 것이 아니기를.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린 후 옷을 갈아입었다. 본격적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취미 생활을 즐길 시간이었다.
⋆★⋆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는 것을 본 뒤에야 잠이 든 나는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오늘은 빨래라도 할까 싶었는데.”
시간을 보니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나는 빠르고 능숙하게 팬케이크를 구워 꿀과 딸기를 곁들여 먹었다.
오늘은 뭘 해야 할까. 세나는 일찌감치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 페터네 할머니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고, 마빈 아저씨의 계획도 듣고 싶었다.
“…안 되겠어.”
아셰라드렌에 대한 생각을 끊으려 했지만, 역시 그런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새로운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아직은 날이 밝으니, 예쁜 보닛도 쓰고 입술에 립스틱도 약간 발랐다. 기분 전환에는 쇼핑만 한 것도 없지.
나는 세나가 먹을 저녁을 미리 준비한 뒤 집을 나섰다. 상점 거리에 가면 마차를 얻어탈 수 있을 것이었다.
[어디 가, 다프네?]
[누나.]
[…아, 누나.]
때마침 옆 마을로 가는 마부와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 마부에게 삯을 지불하고 있을 때였다.
동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던 페터가 다가왔다.
[그래서 어디 가냐고.]
[간식거리도 좀 살 겸 레모스에.]
[흠. 나도 거기 안 간 지 좀 됐지. 아저씨, 자리 하나 남아요?]
사실 옆 마을이라고는 해도 레모스까지는 마차로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킬라하 마을이 워낙 시골이라, 이곳에는 당일에 배달되는 신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페터는 비스듬하게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마부에게 구릿빛 동전 하나를 던졌다.
[나도 데려가. 왠지 누나랑 가면 재밌을 것 같거든.]
[그래, 좋아. 마침 짐꾼이 필요했는데, 잘됐다.]
[…간식 사러 가는 거라며?]
마차는 낡았고, 우리는 레모스 마을로 가는 딸기 상자들과 함께였다.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았다. 붉은 기가 도는 페터의 곱슬거리는 금발과 내 갈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도착하면 깨워. 눈 좀 붙여야겠다.]
[이렇게 흔들리는데 잠을 잔다고?]
페터는 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시골 소년 아니랄까 봐….
나는 푸른 하늘과 대조되는 초록빛 들판을 구경하며 시간을 죽였다.
성장기인 페터의 마르고 너른 어깨가 자꾸만 아셰라드렌을 연상시키는 바람에 조금 슬퍼지긴 했지만, 달콤한 딸기 냄새를 맡으니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일어나. 우리 내려야 해.]
그렇게 장장 두 시간을 마차로 달려, 나와 페터는 레모스 마을에 도착했다. 같은 마을인데도 분위기가 어쩜 이렇게나 다른지.
나는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페터는 하품을 쩌억 하며 나를 뒤따랐다.
[어디부터 갈 거야?]
[우선은… 저기.]
[뭐야, 책방이잖아.]
페터는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였다. 물론 나는 그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레모스 마을은 킬라하 마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구도 많고 번성한 곳이었다.
그래 봤자 킬라하에는 없는 책방이며 옷 가게들, 연인들이 갈 법한 음식점 여러 개가 추가된 게 전부였지만.
[누나, 너 집에 책 엄청 많잖아.]
[거의 다 읽었단 말이야. 얼른 따라와.]
나는 책방에 들러 로맨스 소설 여러 권을 고른 다음, 값을 치르려다 말고 옆에 놓인 오늘 자의 신문에 눈길을 주었다.
쇼핑이니 뭐니, 솔직히 다 변명이었고 사실 나는 아셰라드렌의 근황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데하힐 왕국인데. 과연 레르베 라예트 왕국의 소식을 접할 수 있을는지.
[참 잘생겼지? 옆 나라 왕자… 아니다, 이제는 황제라고 하더구먼.]
내가 내민 동전을 확인하고 있던 책방의 주인 할머니가 문득 입을 뗐다. 그녀는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보지도 않고 알아차렸다.
[…황제요?]
[그래그래. 이제는 세스나 제국, 아니지. 세스나 왕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니 그렇게 불러야 한다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
입가에 그리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아셰라드렌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주인 할머니는 동전을 모두 챙긴 뒤 말을 이었다.
[세스나 왕국은 물론이고, 원래 그 나라가 다스렸던 부족이며 소국들까지 전부 집어삼켰다던가… 레르베 라예트 제국의 발 앞에 넙죽 엎드렸다더라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나 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았나? 할머니의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 나는 신문을 사고야 말았다.
지루한 듯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페터는 내가 떠넘긴 묵직한 책들을 들고 나를 졸졸 따라왔다.
[뭐야. 왜 그러는데.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조용히 해 주라. 나 신문 좀 읽게.]
[쳇.]
[얌전히 기다리면 상으로 레레네 밀크 푸딩을 사 줄게.]
[정말이지? 아싸.]
마을의 광장에 있는 분수대에서, 나는 벤치에 앉자마자 급히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근처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인형극이며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내게 들리지 않는 소음에 불과했다. 다만 내가 왕성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후사를 만들겠다며, 아셰라드렌에게 심술을 부려 대던 국왕이 일주일 전에 승하했다는 것.
“그리고 현 황제, 아셰라드렌 1세와 사이가 좋지 않던 왕비는 과거, 황제가 지내 왔다던 이름 없는 성에 갇혀….”
신문으로 알게 된 정보들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건강했던 국왕의 갑작스러운 사망, 미쳐 버린 왕비의 감금.
아셰라드렌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륙의 절반 이상을 다스리는 레르베 라예트 제국의 황제가 되어 있었고, 데하힐 왕국의 신문사로부터 패륜아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