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나는 평생을 갇혀 살았고, 그에 비하면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왕자로서 대접받았을 그가 요리를 능숙하게 한다는 것에 놀랐다.
아셰라드렌은 야채를 잘라 굽고, 내가 사다 놓은 고기에도 양념을 쳤다. 말 그대로 뚝딱뚝딱. 잠깐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그는 금세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내놓았다.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접시 두 개를 내려놓은 그가 먼저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이래서야 정말로 누가 이 집 주인인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배가 고프지 않다고 고집을 부릴까 망설였다. 그래 봤자 시간 낭비겠지. 결국에는 아셰라드렌이 원하는 대로 되리라는 걸, 그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잘 먹을게요.”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까 좋다. 그렇지?”
아셰라드렌은 자연스럽게 내가 마실 물도 따라 주었다. 컵을 잡으려다 손끝이 스쳐 서로 움찔했지만, 나는 일부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물을 입에 머금었다.
속으론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남자가 눈을 접어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안 하네.”
“물을 마시고 있었잖아요.”
“그래그래. 어서 고기도 입에 넣어 봐. 아니면, 내가 썰어 줄까?”
상상만 해도 부담스러웠다. 나는 재빨리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그제야 아셰라드렌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 사이를 흐르고 있는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 그러나 그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인지, 한없이 평온해 보이는 남자는 고기를 작게 잘라 입에 넣는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쿡쿡 찌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셰라드렌은 언제쯤 킬라하 마을을 떠날 예정인지?
“맛이 별로인가 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배가 별로 고프지 않나?”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아셰라드렌은 접시를 비운 뒤였다. 그는 양손에 깍지를 낀 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에 이름 없는 성에서도 이렇게 곧잘 함께 식사를 하고는 했지만, 그때 아셰라드렌의 눈빛과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눈빛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내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내 착각일까? 아니야, 그럴 리 없었다.
아셰라드렌은 더 이상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은 하셨어요?”
“갑자기?”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만한 나이가 되셨다 싶어서요.”
“글쎄, 어떨 것 같아?”
이렇게 애매하게 답하는 걸 보면, 역시 우스테 가문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 갑자기 입 안이 깔깔해졌다. 이제 아셰라드렌은 남의 남자가 되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귀여워. 다프네는 내가 유부남이면서도 너를 데리러 이런 시골까지 찾아왔을 것 같나 본데.”
“아닌가요? 전에 프리지어 님께서 분명… 폐하를 노리고 있다고.”
“아, 그렇지. 계속 노려지고 있기는 해. 딱 잘라 거절해도 말이 통하질 않으니 원.”
남자가 난감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살짝 들어 올린 눈썹이 앞머리에 가려졌다. 그렇다면 혼자라는 걸까.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메이드였던 내가 그의 옆에 설 가능성은 아예 없다시피 한데.
“너도 알잖아. 난… 저주를 받았다.”
“반려 이야기인가요?”
“그래. 원래라면 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었어야 해. 그런데 이번에도 살아남았지.”
“이번에도, 라니요?”
설마 아셰라드렌도 회귀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나?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 바람에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건국왕 기르시는 아마 르비오네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 않았을까 싶어.”
“네? 지금 무슨 말씀을….”
“각인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운명이랄 게 따로 있나. 사랑하게 되면, 평생 함께하고 싶어지는 거야. 그렇게 수명이 늘어나게 되는 거지.”
르비오네 공주는 건국왕 기르시의 반려였다. 그녀는 원하지 않았음에도 왕비가 되어 살아갔다. 나는 지금 아셰라드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는 내가 운명의 반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돼요. 제가 떠나고도 폐하는 멀쩡히 살아 계셨잖아요.”
“‘폐하’라.”
“…그럼 달리 뭐라고 부르나요?”
“예전처럼 아셰, 라고 다정하게 불러 줘야지.”
“…….”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가 저를 외면하자, 아셰라드렌은 보란 듯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입을 맞추었지.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고.”
“겨우 그것만으로 제가 반려라는 건….”
“겨우 그것?”
남자는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켜 나는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남자는 이제,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주는 덩치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보다 좀 더 많은 것들을 나누었다면 이렇게까지 급하게 다프네를 찾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급히 인상을 썼다. 달싹이는 입술 위로 무언가가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피가….”
“어쩔 수 없었어. 이제 나는 다프네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어 버린 걸.”
“어, 잠시만요. 피가 나는데.”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셰라드렌이 코피를 흘리고 있던 탓이었다.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누가 일부러 스스로 코피를 흘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셰라드렌은 그런 나를 막으며 제 손으로 코 아래를 가렸다.
“네가 떠난 뒤로부터 종종 이런 일이 생기더군.”
아셰라드렌의 건강이 나빠진 게 과연 내 탓일까? 그냥 핑계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그가 걱정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원래도 길게 살지 못할 운명이란 소리를 듣던 이였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도 아셰라드렌은 나를 구하고 바로 죽어 버렸었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회귀 전의 아셰라드렌은 초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어, 어떡하면 좋아요. 일단 좀 닦아야 할 것 같은데…. 이걸로 닦아요. 어서요.”
다급해진 나는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셰라드렌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그가 죽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내 앞에 있었고, 그를 향한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며, 나는 저렇게나 혈색이 창백해진 이를 두고 차갑게 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만두면 멎는데.”
“안 멎잖아요! 벌써 몇 분이나 지난 것 같단 말이에요.”
“걱정해 주는 거야? 여태까지 까칠하게 굴어 놓고?”
“그래요. 나는 이번에 당신이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르겠고….”
“당신이라. 차라리 폐하보다는 이게 낫네. 응.”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요! 대체 이런 몸으로 어떻게 전쟁을 치렀죠?”
“어떻게 했냐면….”
그는 말을 잇다 말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그러더니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희미한 연기가 그의 몸을 에워쌌다.
아셰라드렌의 골격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내 그는 펑! 하고 다시 세나만 한 크기의 늑대로 돌아갔다.
“왕!”
“뭐예요. 말할 수 있잖아요.”
새까만 코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아셰라드렌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순진무구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다프네! 집에 있나?]
문밖에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라가 맛있는 스튜를 좀 했는데, 일주일은 먹을 양은 만들어서 말이지. 나눠 줄까 싶어 왔는데.]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오늘 아침에 봤던 마빈 아저씨였다. 이래서 아셰라드렌이 입을 다물었던 거구나. 먼저 기척을 알아차리고.
[잠시만요! 나갈게요.]
나는 한숨을 쉬며 문가로 다가갔다. 새끼 늑대의 시선이 나를 좇았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좋은 냄새가 나네요.]
[우리 사라가 요리 솜씨 하나는 끝내주지. 어서 받아라.]
[감사합니다.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한데….]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안에 누가 있는 거야?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던데.]
마빈 아저씨가 문틈 사이로 집 안을 살폈다.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이 불안해 보이는지 아저씨는 나를 조카라도 되는 듯 신경 써 주고는 했다.
가족이란 울타리를 가져 본 지 너무 오래된 나는 그런 부분이 영 어색했으나, 그렇다고 싫은 기색을 내비치고 싶지는 않아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아니에요, 아무도 없어요. 세나한테 말하는 걸 잘못 들으신 거 아닐까요?]
[아닌데. 분명히 들었는데. 잠시만, 그러고 보니.]
스튜가 든 냄비가 묵직했다. 마빈 아저씨는 내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한 틈을 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저기 있었구나. 아침에 봤던 귀여운 녀석이.]
그러고는 단번에 아셰라드렌을 발견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아저씨가 새끼 늑대를 향해 손짓했다.
[특이하게 생겨서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 털도 새하얗고, 눈도 희한한 것이.]
[낯을 가리는 아이예요. 가까이 가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왜? 그런데 너 저 녀석을 숲에서 주웠다고 했지?]
[네? 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아니다, 문제는 무슨.]
아셰라드렌은 마빈 아저씨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서 입으로 우쭈쭈, 하는 소리를 내며 아셰라드렌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마빈 아저씨도 집에서 개를 키우지 않던가? 저렇게까지 관심 가지며 좋아할 일인지 모르겠다. 들고 있던 냄비도 무겁고, 아셰라드렌과 직전까지 나누었던 대화도 있고 해서, 나는 아저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에 한번 데리고 찾아갈게요. 스튜는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응? 응, 그래야지. 꼭 데리고 오거라.]
아저씨는 아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셰라드렌에게 박힌 그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