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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91)화 (90/123)

91화

마빈 아저씨가 돌아가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누군가를 속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외간 남자가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저씨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셰라드렌은 멀뚱멀뚱 바닥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코피는 이미 멎어 있는 상태였다. 나 때문에 아파하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물론 정확히는 나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새하얀 털로 뒤덮인 목덜미를 부드럽게 긁어 주었다.

“몸은 좀 어때요. 지금은 괜찮아요?”

“…….”

그러나 그는 말없이 내 손길을 느끼기만 할 뿐이었다.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아셰라드렌은 살짝 입을 벌린 채 혀를 내밀어 헥헥거렸다.

정말로 개가 되어 버린 것처럼.

“그냥 말하지 마세요. 차라리 이편이 낫네요.”

거구의 사내가 집 안을 활보하며 날 정신없이 뒤흔드는 것보다야 새끼 늑대 한 마리가 낫다. 나는 보랏빛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바닥에 있던 그를 번쩍 안아 소파에 올려놓았다.

몸도 안 좋다면서 차가운 바닥에 있기는. 아셰라드렌은 뾰족한 귀를 움찔거리며 소파에 엎드려 누웠다. 푹신한 소파가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쉬어요.”

난데없이 코피를 콸콸 흘려 대질 않나,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지를 않나. 나는 사실 아셰라드렌에게 궁금한 게 많았지만, 동시에 굳이 그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남자의 운명이니 수명 같은 건 내 손을 떠난 지 벌써 한참이나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아셰라드렌의 눈을 감겨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혼자 있고 싶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심스레 위층으로 올라가려니 세나가 나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나는 고양이와 함께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쓰러지듯 누웠다.

“야앙.”

새까만 고양이는 이미 침대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매끄러운 털을 잠시 쓰다듬어 주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곤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거의 반나절이 날아간 것이다.

“으으, 세나야. 너 너무 무겁다.”

어느덧 세나는 내 가슴 위에서 골골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를 슬쩍 밀어낸 뒤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목도 마르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침실 밖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손! 그렇지, 훌륭해. 레이몬드.]

멍하니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페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는 아셰라드렌이 있을 텐데….

나는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갔다. 페터가 뭉툭한 아셰라드렌의 앞발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놀랐잖아. 언제 온 거야?]

[아까 30분쯤 전에. 그런데 누나, 레이몬드가 다친 부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나 보더라고.]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딱 봐도 심각한 상처였는데. 어쨌든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구만.]

페터가 단순해서 안심이었다. 나는 물을 한 컵 따르며 곁눈질로 페터와 아셰라드렌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아직까지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런데 레이몬드라니?]

[이 녀석의 이름을 몰라서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어. 누나가 보는 로맨스 소설을 참고했지.]

[…너는 어쩐 일로 우리 집에 왔고?]

페터는 제 손 대신 아셰라드렌의 앞발을 들어 식탁을 가리켰다. 그제야 천에 싸인 무언가가 눈에 잡혔다.

[어머나, 생크림 케이크잖아. 위에 딸기까지 얹었네. 나 이거 엄청 좋아하는데.]

[할머니가 누나랑 사라 아줌마네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직접 만드신 거야? 대단하다.]

나는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올렸다. 그러고는 포크를 두 개 챙겨 소파로 다가갔다.

[같이 먹자. 그런데 잠시만, 나 화장실 좀.]

[근데 누나 또 잠옷 차림이네. 부끄럽지도 않나.]

뺨을 붉힌 페터가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사춘기 남자애들이란. 아직 어린 소년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나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멈칫거렸다.

범인은 어울리지도 않게 페터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아셰라드렌이었다. 나는 페터를 따라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굴었다.

[금방 다녀올게. 기다려.]

[올 때는 옷도 좀 갈아입고 와라.]

페터의 잔소리를 듣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볼일을 본 뒤 손을 씻은 나는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나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거실로 돌아가자마자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눈처럼 하얀 늑대 새끼와, 그를 말리느라 생크림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페터를 발견해 속도를 점점 늦추었다.

[으아, 다프네 누나. 좀 도와주라. 레이몬드가 갑자기 케이크에 달려들잖아.]

[…내버려 둬. 먹고 싶었나 보지.]

[얘는 이런 거 먹으면 안 되지 않아? 고기를 먹여야지.]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왜 갑자기 심술이람.]

그것도 저렇게 유치한 심술을 부리다니. 하여튼 간에 나는 아셰라드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분홍색 혀를 내밀어 보란 듯이 낼름낼름 털에 묻은 생크림을 핥아 먹었다.

텅 비어 버린 접시며 빵 부스러기와 크림을 뒤집어쓴 페터까지. 아무리 봐도 저건 일부러였다. 나는 아셰라드렌에게 다가가 그의 두 앞발을 강제로 높이 들어 올렸다.

[레이몬드. 너 이거 먹으면 돼, 안 돼.]

“…끼잉.”

[불쌍한 척하지 말고 제대로 반성해. 페터는 또 왜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아셰라드렌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헤헤 웃어 댔다. 껍데기 안에 든 내용물의 정체를 다 아는데 가증스럽게 강아지인 척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괜찮아. 아직 새끼잖아. 그보다 나 머리부터 감아야 할 것 같은데. 옷도 다 버렸고.]

[미안해. 어떡하면 좋지?]

[일단 집에 가야지, 뭐. 남은 케이크는 누나 혼자 먹고 있어.]

머리카락에 묻은 끈적한 크림을 닦아 내던 페터가 결국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더욱 신이 난 듯 꼬리를 격하게 흔들어 댔다.

페터가 사라지자 아셰라드렌은 뒷다리에 힘을 주어 폴짝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강아지 새끼인 척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나는 재빨리 그를 내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슬슬 사람으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어요?”

“왕! 왕왕!”

“연기는 그만하시라고요. 이제 여기 아무도 없는데.”

“다프네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 아직도 몰라? 왕자님의 변신이 풀리려면 공주님의 키스가 필요한 법인데.”

아셰라드렌은 뻔뻔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설마 여태까지 저 소리를 하려고 변신을 풀지 않고 있었나?

순간 나는 그러고 보니 물을 마실 때 식탁이 깨끗했었단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작은 상태로 설거지를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아셰라드렌은 내가 없는 사이에 사람이 되었다 다시 늑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저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읍.”

불쌍한 척하는 것도 소용없다 싶었는지, 그가 또다시 내게 뛰어들어 입술을 핥았다. 달콤한 향이 나는 귀여운 새끼 늑대가 순간적으로 내 마음을 녹일 뻔했다.

“바람피우면 혼나. 응?”

매번 이런 식이지. 화가 난 나는 아셰라드렌을 덜렁 집어 들어 옆구리에 끼웠다. 그가 껭, 하는 소리를 냈으나 무시했다.

“적당히 해요. 조금도 재미없다고요. 이제 그만 폐하의 나라로 돌아가요.”

사실 반쯤은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은근히 아셰라드렌과의 재회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그에게 넘어가는 건, 역시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내가 뭐 때문에 아셰라드렌을 떠나 홀로 살아왔는데.

나는 문을 활짝 열어 그를 집 밖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하려고 허리를 숙이려는데, 저 멀리서 새빨간 횃불 여러 개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무슨….”

나는 본능적으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뜬금없이 찾아온 마빈 아저씨와, 그가 아셰라드렌을 유심히 바라보던 것.

그리고 마을의 숲에 남겨진 커다란 발자국에 그 누구보다 마빈 아저씨가 아셰라드렌에게 가장 열렬한 관심을 보였던 것까지.

“…위험해요.”

나는 아셰라드렌을 빠르게 안아 들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모습을 감추고 있으면 좋았잖아. 왜 아침에 날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마침 나와 있었구나, 다프네. 잘됐다.]

제 친구들을 데려온 마빈 아저씨가 얼른 계단을 올라왔다. 그러더니 아셰라드렌을 안고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키우려는 그 녀석. 아무리 봐도 얼마 전에 나타난 짐승의 새끼인 것 같거든.]

새끼가 아니라 본인인데. 괜히 일이 복잡해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아셰라드렌을 고쳐 안았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마빈 아저씨는 아셰라드렌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 녀석을 미끼로 하면 분명 어미도 잡을 수 있을 게야. 그러니 협조해 주지 않겠니?]

나는 아저씨의 투박한 손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뒤에 선 새빨간 횃불들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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