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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96)화 (95/123)

96화

[저는, 어…. 그게, 그러니까.]

할머니의 부탁을 듣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동시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전쟁에서 패배했다고는 하나, 세스나는 거대한 나라였다. 한 나라의 공작씩이나 되는 가문의 일원 중 하나가 된다면 더 이상은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겠지.

그러나 할머니와 나는 고작 사흘간을 함께했던 사이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가족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만큼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다.

[싫으니?]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절대로요. 하지만 할머니,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모르시잖아요….]

내가 망설이듯 말끝을 흐리자, 할머니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이를 먹다 보면 없던 눈썰미도 생기는 법이란다. 다프네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낌으로도 알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나 보구나. 그래도 찬찬히 잘 생각해 보렴. 어차피 우리는 같은 호텔에 묵을 테니, 고민할 시간은 충분하겠지.]

주름지고 앙상한 손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는 새삼 내가 나이를 쉰 살 정도 더 먹게 된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내가 할머니처럼 궂은일을 하지 않고 곱게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나는 언제나 손녀가 갖고 싶었어. 낮에는 사이좋게 같이 산책을 하고, 밤에는 도란도란 와인을 기울일 수 있는 귀여운 손녀가.]

[저도 물론 그렇게 해 드릴 수는 있어요. 할머니랑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정말로 즐거우니까요. 그렇지만, 진짜 가족이 된다는 것까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해해. 늙은이가 주책맞았지.]

[아니에요! 할머니가 얼마나 정이 많으신 분인지 이미 알고 있는걸요.]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다시는 없을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 결정을 신중하게 내리고 싶었다.

이제껏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과연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할머니는?

막상 나를 입양한 뒤에 내게 실망하는 일이 생긴다면?

[어차피 나는 살아갈 날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아. 여생을 사랑스러운 손녀딸과 같이 보내고 싶구나.]

마음이 약해졌다. 할머니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외로운 분인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나 역시도 신기할 정도로 나와 외모가 닮은 할머니에게 끌림을 느끼고 있기는 했다.

[좋아요. 가족이 되어 드릴게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나는 입양 서류를 넘겨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절차는 내게 득이면 득이었지, 해가 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고, 할머니도 나를 좋아하고. 우리는 머리색이나 눈색, 심지어는 얼굴형까지도 꽤나 닮은 데다 의지할 가족이 아예 없다는 공통점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운명일 테지. 나는 깃펜을 들어 종이에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여행 중에 손녀가 생기다니! 꿈만 같은 일이로구나.]

잉크가 마른 서류를 다시 할머니에게 전해 주었을 때, 그녀는 내가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 뒤 곧바로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할머니에게서는 포근한 향수 냄새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의 마른 등을 마주 안아 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꿈만 같아요. 평생을 혼자 살아왔는데….]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앞으로 행복하게만 살자꾸나.]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는 잠시 그녀가 살아왔던 인생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흔치 않은 연애결혼을 해 지금은 죽고 없는 공작에 대해서부터, 힘들게 낳은 딸이 하인과 눈이 맞아 도망쳐 버린 것.

그리고 다시 딸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청결치 못한 환경에서 출산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것. 손녀도 역시 같은 날에 태어났으나 금세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것까지.

[하지만 나는 손녀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단다. 뒤늦게 그 하인을 붙잡았지만 아기는 내 딸과 함께 묻어 주었다고 했거든.]

[얼마나 슬프셨을지 상상도 하지 못하겠어요. 실은 저도, 부모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거든요. 제 첫 번째 기억은 고아원에서부터예요.]

[그래서 네가 더 내 손녀딸같이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그 남자가 아기를 빼돌린 건 아닐까 멋대로 상상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러나 한참 뒤에, 할머니는 딸의 유골을 공작령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손녀의 유골도 함께 발견했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할머니와 실제로 피가 섞였을 확률은 아예 없었다.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다프네, 배에서 내릴 준비는 다 끝냈니?]

[거의 다 하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번 살펴보긴 해야 할 것 같아요. 할머니는요?]

[나도 메이드들이 제대로 일을 다 끝냈는지 보고 와야 될 것 같기는 한데.]

할머니는 호텔에 가면 이번에는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내 손을 꼭 잡아 준 뒤 객실을 떠났다.

나는 상기된 뺨을 문지르며 창가를 내다보았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마그나의 하얀 건물들과 푸른 지붕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곧 하선하실 시간입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새로운 삶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나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승무원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짐을 가지러 오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리면 곤란하니까요.”

“…또 당신이네요, 시르시안 님.”

어쩐지 억양이 외국인 같더라니. 그런데 설마 내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 말한 건가?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싫은 남자다.

나는 객실 안으로 들어선 시르시안을 흘겨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목걸이를 하지 않은 내 목을 내려다보며 싱글싱글 웃음 지었다.

“방금 전에 재밌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그러신가요?”

“세스나의 공작 가문에 입양되셨다고요? 다프네 양.”

혹시 할머니가 객실로 가는 길에 시르시안을 마주치기라도 한 걸까. 나는 움찔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아셰라드렌과 관련된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은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됐네요.”

무뚝뚝한 대답에 시르시안이 괜히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섭섭한 체했다.

“비슷한 처지에 그렇게 거리 두지 맙시다. 나나 다프네 양이나 똑같이 귀족이 된 평민이잖아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 그보다 대체 이 배에는 왜 타고 계신 건데요?”

“어제저녁을 함께했다면 진작에 말씀드렸을 텐데. 그런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죠?”

신분이 갑자기 껑충 뛰어 공녀가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는 아셰라드렌과 전혀 대등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그가 강제로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아마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이 너무 행복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나는 아셰라드렌을 벗어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다프네 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작은 선물과 함께.”

“…선물이라니.”

“그런데 어째,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 안부는 묻지도 않습니까? 서운하게.”

“별로 궁금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성의 사람들 모두가 내 적이었다. 한때나마 시르시안과 친하다고 착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급할 때 나를 대했던 그의 본성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프네 양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어쩌라고. 나는 속으로 답했다. 배가 항구에 다다랐는지 객실 밖이 아까보다 소란스러웠다.

“짐을 들어 드리죠.”

시르시안이 내가 미리 꺼내 놓은 짐 가방을 가볍게 들었다. 그러라고 한 적도 없었고, 그러지 말라고 하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객실을 나서는 그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할머니는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찾아요? 사려 깊은 공작 부인?”

“자꾸 말 걸지 말아요. 정신없어요.”

“못 보던 사이에 많이 까칠해졌네요. 바깥 생활이 쉽지 않았나 봅니다?”

“…….”

난 왕성 밖에서 너무나 잘 먹고 잘살았는데? 하지만 멋대로 생각하라지. 나는 시르시안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출구로 향했다.

마그나로 휴가를 와 잔뜩 들뜬 승객들이 벌써부터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방방 뛰는 아이들과 사람들을 열심히 안내하는 승무원들, 머리 위에서 끼룩대는 갈매기들.

[차례를 지켜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선하겠습니다!]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배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편이 좋을까?

그러나 너무 일찍 나온 탓인지 금세 쏟아지는 인파에 휩쓸리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시르시안도 어느샌가 놓쳐 버렸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나는 어떻게든 배에서 버텨 보려고 하다 이내 포기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따라 항구에 내렸다.

길에서 파는 음식 냄새들이며, 사람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 가운데 뱃고동까지 울려 대는 통에 정신이 사나웠다. 시르시안에게서 짐 가방을 받아야 하는데.

인파 속에 끼어 의도치 않게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덥석 내 손목을 잡아 왔다.

“왜 이제야 왔어. 계속 기다렸잖아.”

익숙한 목소리의 남자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 남자에겐 나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따위는 아예 없는 모양이야.

하아, 나는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때마침 할머니가 메이드들의 부축을 받아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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