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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13)화 (122/123)

113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예전에 메이드였을 적에 친했던 친구를 만나고 왔을 뿐.”

“그래?! 그게 누군데?!”

“말하면 아시려나 모르겠어요. 젤라라고, 까만 곱슬머리에 예쁘게 생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드들이 트레이를 끌고 나타났다. 개중에는 젤라도 있어서, 나는 장난스레 수프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예쁜 건 모르겠다만 젤라가 누군지는 알겠군.”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본 뒤 아셰라드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많이 친해?! 시녀로 삼게 해 줄까.”

“하지만 시녀는 귀족들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작위를 하나 내려 주면 되지. 영지까지 하사하지는 못하겠지만.”

황제라는 게 이렇게 충동적이어도 되는 걸까. 물론 나야 젤라와 붙어 다닐 수 있다면 환영이었다. 평소에 아셰라드렌의 끄나풀이나 다름없는 예니체 경이나 시르시안과 둘만 붙어 있는 것도 사실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고.

“아, 설마. 남자랑만 있지 말라고….”

“이왕이면 여자 기사를 붙여 주고 싶은데. 실력이 좋은 이들은 아직 세스나 제국에 남아 폭동을 진압하고 있어서.”

아셰라드렌은 아쉬워하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음식이 든 접시를 모두 내려놓은 젤라는 어쩔 줄을 모르고 정원 주위를 서성였다.

다른 메이드들은 이미 물러갔으나, 그녀는 지금 우리 대화의 주제인 당사자인 터라 쉽게 나가지 못한 듯했다. 아셰라드렌은 젤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턱을 괴었다.

“우선은 그만 나가 봐도 좋아. 나중에 사람을 보내지.”

“…아, 네.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감사드려요.”

“뭐가?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것도 아닌데.”

다른 걸 떠나 왜 묘하게 말투가 까칠한 것 같지. 그러고 보면 때때로 프리지어나, 다른 귀족들을 대할 때도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던 것 같다.

이름 없는 성에서부터 시작된 심각한 수준의 사회성 부족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내가 아닌 타인들과는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으려 했던 시절보다는 많이 발전했다.

“나중에 봐, 젤라.”

“다프네, 나한테 집중해야지.”

나는 젤라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셰라드렌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닦달했다. 프리지어의 심기가 더러울 수밖에 없겠구나.

나 같아도 심혈을 기울여 황제로 만들어 낸 사내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보고 있으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만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고기 썰어 줄까.”

“아뇨, 제가 할 수 있는데.”

“젤라 말고도 다른 친한 친구는 없어?”

아셰라드렌이 칼질을 하며 물었다. 움직임이 너무나도 우아해서 새삼 그가 또 멀게 느껴졌다. 저 남자가 저렇게 변화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나보다 프리지어의 공이 컸을 텐데.

나는 역시 불순분자였다. 황후의 자리를 넘보는 짓만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있었는데, 죽었어요. 하나는 도망갔고요.”

“응? 다들 결말이 왜 그래.”

“잔느는…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이름 없는 성에 왔다 아셰를 보고 뛰쳐나간 뒤로 본 적이 없거든요.”

“아, 그럼. 기억하지. 그때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지.”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낸 그가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러고는 잠시 과거 회상을 하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딱히 울적해 보이지는 않았다. 더 이상 아셰라드렌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소년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작년에 목을 매달고 죽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아직까지도 자살은 아닌 것 같아서.”

“성안에 살인자가 있다는 뜻인가?”

“모르겠어요. 그냥, 제 직감일 뿐이에요. 실비아는 그럴 애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찍어 입에 넣었다. 역시나 아셰라드렌은 작년에 하인들 사이에서 있던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는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나 내 뒤로 다가왔다. 탄탄한 두 팔이 어깨 위로 둘러졌다.

“다프네가 나를 떠난 데에는, 그 영향도 있었겠군. 미안해. 모르고 있었어.”

“…….”

“내가 네게 무심했어. 다프네는 내 세상의 전부인데.”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이고…. 아셰는 아셰대로 모든 것이 벅찼을 테니까.”

상체를 숙인 그가 내 뺨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와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쓸었다.

“다프네의 친구가 정말로 누군가에 의해 죽었다면, 범인이 누군지 알아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실은 저, 레티스 공주님의 사고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아요.”

나는 곧장 실비아가 내게 알려 주었던 정보들을 아셰라드렌에게 전달해 주었다. 레티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을 때, 누군가 그녀를 미는 것을 실비아가 봤다는 것도.

그러자 아셰라드렌은 멈칫하며 인상을 썼다.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밖에 없겠네.”

“아뇨 아뇨, 실비아는 저한테만 말하는 거라고… 했었는데.”

그제야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혹시 실비아가 밤에 만났다던 남자에게 레티스에 대해 알려 준 게 아닐까? 아니면 실은 그 남자가 범인이었고, 실비아가 협박이라도 한 걸 수도 있지 않나.

내 직감은 남자가 실비아의 연인이었다기보다는, 약점을 잡힌 범인이라는 쪽으로 향했다.

“나는 레티스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 다만 그 여자애가 다프네를 잘 따랐다는 건 기억하고 있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아셰랑도 분명 친해졌을 거예요.”

“그랬다면 난 아직까지 이름 없는 성에 갇혀 지냈을 거고.”

“아, 그건.”

아셰라드렌은 세상을 등지고 우리 둘이서 살아갔던 그 시절이 그립지 않은 걸까.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간 그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아. 행복했잖아, 우리.”

“정말로 그래요. 그때 아셰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그 또한 과거의 나날들을 좋았던 기억으로 남겨 두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고작 두 손바닥을 모은 크기만큼 작았던 강아지… 아니, 새끼 늑대를 생각하니 우리가 전생과는 확연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새삼 와닿았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렇게 변할 수가 없어…. 다프네에게 예쁨 받고 싶은데.”

“변신 자체도 잘 하지 않잖아요. 이제 능력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건가요?”

“아마도. 어쩌면 어른이 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다프네를 만나기 전의 난 영원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

그래도 아쉽다.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책을 읽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나는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평온했던 나날들의 추억에 잠겨 들었다.

그동안 아셰라드렌은 식사를 하던 것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질 때쯤, 그가 뺨을 긁적이며 일어났다.

“왜요? 더 드시지 않고.”

“다프네가 나를 예뻐해 줬으면 좋겠어.”

“네? 갑자기 무슨.”

아셰라드렌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한 손을 내 허벅지 위로 올렸다.

왜 갑자기 강아지인 척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펑! 하는 깜찍한 소음과 함께 그가 새하얀 연기를 잔뜩 뿜어냈다.

“멍!”

“멍이라뇨, 원래는 왕, 하고 짖었잖아요.”

“아, 맞다. 왕!”

테이블 아래에 털이 하얗고 덩치가 좋은 늑대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아셰라드렌이 주둥이를 벌려 히죽 웃었다.

축축한 분홍색 혀가 튀어나와 내 손등을 핥았다.

“다프네가 우울한 건 싫어. 이제 난 귀엽지 않지만… 여전히 난 너만의 개니까.”

“저기, 개가 아니라 늑대라면서요.”

“다프네한테는 개야. 너만 보면 꼬리가 멋대로 흔들려.”

아, 귀엽다. 뭐가 귀엽지 않다는 거지. 나는 앞가슴에 난 푹신한 털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웠다. 절로 몸이 숙여졌다. 아셰라드렌이 두 앞발로 내 허벅지를 짚고 일어섰다.

“아셰, 나 살인범을 찾고 싶어요.”

나는 햇볕 냄새가 나는 그를 품에 끌어안았다. 간지러운 털에 코를 묻고 속삭이자, 그가 내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그래, 도와줄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

“고마워요. …든든해.”

다만 한껏 부풀어 오른 꼬리가 살랑거리다 못해 붕붕거리며 테이블을 마구 쳐 대는 게 신경 쓰였다. 그러다 과일 바구니 안에 있던 오렌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셰라드렌은 아무래도 좋은지 목을 쭉 내밀어 내 얼굴을 핥느라 바빴다. 나는 그를 다시 만난 뒤 처음으로 온전한 기쁨을 누렸다.

나를 사랑하는 이 남자는 황제니까, 그를 등에 업고서 밝혀내지 못할 진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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