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우리 아이가 생긴다면… 디트리히 님이 좋은 형이 되어 줄지도 모르고요.”
“…다프네, 너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물론 아셰라드렌도 내 의도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 크게 반대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셰라드렌이 다른 말을 할 틈도 주지 않을 예정이었다.
남자의 입술을 쓸어내리고, 몇 번이고 쪽쪽 적나라한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아셰라드렌은 포기했다는 듯 더운 숨을 뱉어 내며 내 입맞춤에 열렬히 응했다.
“오늘은 같이 잘까요?”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당연히 알고 하는 거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아기를 만들자는 뜻은 아니지만.”
“아, 다프네. 제발.”
이제 애원을 하는 것은 내 쪽이 아니었다. 아셰라드렌이 내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체온이 올라가 뜨거워진 몸이 움찔움찔 나를 자극했다. 미끄러지듯 침대에 누운 그가 이따금씩 제 위에 올라탄 나를 힘이 들어간 허리로 쳐올렸다.
“고마워요, 아셰. 난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좋은 사람 다 죽었나….”
아셰라드렌이 괴로운 듯 신음했다. 어쨌거나 디트리히를 다시 유폐시킬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부디 그 가여운 황자가 언젠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에 크게 슬퍼하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으아아앙! 아아앙!”
아셰라드렌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숙이고 있을 때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홀린 듯 다가가고 있는데, 문밖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젠장. 벌써부터 동생이 싫어지려고 하는데.”
그러자 아셰라드렌이 비속어를 내뱉으며 인상을 썼다. 놀란 내가 얼른 그에게서 내려와 침대를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셰라드렌은 곧바로 침실을 뛰쳐나가려는 내 팔목을 잡아당겼다.
“꼭 다프네가 가야 해? 내가 네 친구 하나를 시녀로 만들어 줬잖아.”
“미안해요. 아기님은… 아니다, 이제는 황자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아무튼, 그분은 제가 아니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질 않아서요.”
“그것참… 짜증 나는 녀석이네.”
“아니면 같이 갈래요? 아셰도 황자님을 제대로 본 적은 없을 거 아니에요.”
“…글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아직 그는 제 동생을 마주할 결심이 서지 않은 듯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디트리히를 보러 나갔다.
도중에 혹시나 아셰라드렌이 오늘 밤의 일을 기억하고, 심술을 부릴까 싶어 그에게 돌아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겹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녀석과 나의 다프네를 두고 경쟁하는 일은 없길 바라.”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짧게나마 경고인지 위협인지 모를 발언을 들었다. 나는 아직도 열이 펄펄 끓는 듯한 그 단단한 품을 아쉬워하며 내 침실로 향했다.
“으아앙!”
“어휴, 세상에. 아기님, 왕자님. 새벽 2시라구요. 내일 아침에 다시 우시면 안 될까요?”
아셰라드렌의 침실과 마찬가지로 촛불 하나를 겨우 켜 놓은 너른 방 안에서, 젤라는 디트리히와 함께 우는 소리를 내며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산발이 되어 아기 침대 앞에 서 있는 젤라에게서 디트리히를 건네받았다. 아기의 하얀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우세요, 황자님? 혹시 배가 고프신가요?”
“히끅, 끅!”
디트리히를 가볍게 어르고 달래며 묻자, 젤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는 아기를 안고 침대로 가서 기대앉았다. 그러곤 종을 울려 우유를 부탁한 뒤 고개를 들었다.
“황자님? 유폐된 왕자님이 아니고 황자님??”
“응. 다행히도 그렇게 됐어. 잘됐지?”
“넌 진짜… 폐하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겠다.”
근처의 의자를 끌어온 젤라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실 고작 하룻밤 만에 디트리히의 처우에 대한 답을 받아 낼 줄은 몰랐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뿌듯하긴 하다.”
“그 금발 머리 영애가 너를 볼 때마다 까칠하게 구는 게 이해가 되긴 하네.”
잠시 후 잔느가 졸린 눈을 비비며 우유를 가져와, 나는 디트리히에게 젖병을 물린 후 보들보들한 뺨을 슬쩍 문질러 보았다.
팔자에도 없는 육아는 좀 뜬금없었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맞은편에서는 젤라가 어느새 의자 뒤로 머리를 젖힌 채 잠들어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밤이었다. 낮에 있던 화재로 인해 다섯 명이 넘어가는 고용인들과 전 왕비가 죽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
나는 아기가 이렇게나 자주 식사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디트리히에게 또 한 번의 우유를 먹이고 있을 때였다.
“황자님이 아직 여기 계신 걸 보니, 얘기가 잘 끝났나 보네요.”
아직 잠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는데, 프리지어가 노크를 하고 나타나 스스럼없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 당혹스러웠던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문가를 쳐다보았다.
이른 시간인 터라 시르시안과 예니체 경의 근무 교대가 아직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밖에 있는 기사가 예니체 경이었다면 프리지어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입궁을 빠르게 하셨나 보네요.”
“그래요. 오자마자 다프네 양의 침실을 찾았답니다.”
내가 떠난 후로 프리지어가 거의 황성에 눌러앉다시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녀가 아셰라드렌에게 황성에 제 처소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은 젤라와 예니체 경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러나 끝끝내 아셰라드렌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방 하나를 휴식용으로 쓰라며 내어 주기는 했다고 한다.
그러자 프리지어는 침대도 없는 그 방에 남아 밤새 황실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아셰라드렌이 나를 데리고 돌아온 뒤로는 다시 저택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황성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일찍부터 준비할 필요는 없었겠지만요.”
프리지어가 물기가 조금 남아 있는 머리끝을 빙글빙글 꼬았다. 그 움직임이 신기했는지, 디트리히의 보라색 눈동자가 프리지어를 향했다.
그녀는 서늘한 미모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머리가 신기하신가요, 황자님? 앞으로는 자주 보시게 될 거예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렇게 바로 침실로 들어오지는 말아 주세요. 아직 세수도 못 했는데, 이미 드레스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프리지어 님을 보니 부끄럽네요.”
“어머, 그러지 말아요. 다프네 양은 지금 모습이나 단장을 한 모습이나 하나같이 어여쁘답니다.”
지금 이거 혹시 내가 꾸미나 안 꾸미나 똑같다고 돌려 까는 건가. 전에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이 이런 식으로 악역에게 맞받아치는 대목을 봤던 것 같은데.
하여간에 프리지어는 좋게 봐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니까. 나는 짜게 식은 눈을 하고 디트리히에게서 다 먹은 젖병을 떼어 냈다.
“잠깐 황자님을 안아 주시겠어요? 저는 젖병을 두고 올게요.”
“그런 건 시녀를 시키면 될 일 아닌가요?”
“…일어난 김에 옷도 좀 갈아입고 오려고요.”
순진하게 묻던 프리지어가 선뜻 두 팔을 벌렸다. 그녀에게 안기자마자 디트리히의 맑은 눈망울 가득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3초만 지나면 또 침실이 떠나가라 울어 대겠지. 어디 맛 좀 봐라. 나는 허둥지둥 어색하게 디트리히를 토닥여 주는 프리지어를 두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흐아? 꺄아!”
얼굴을 씻고 편안한 실내용 원피스 차림을 하고 돌아오자, 디트리히는 바닥에 깔린 카펫에 엎드려 프리지어를 향해 꺄르륵 웃어 대고 있었다.
젤라나 잔느에게 안길 때면 몸부림을 치며 펑펑 울어 대더니…. 나는 배신감을 느끼며 디트리히와 그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프리지어를 흘겨보았다.
“우스테 가문의 상단에서 판매하는 아기용 장난감을 가져오길 잘했네요. 짤랑짤랑 소리가 나서 그런가? 너무 좋아하세요.”
내 시선을 느낀 듯 프리지어가 금색 종이가 달린 막대기를 들어 보였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벌써부터 뇌물의 맛을 알게 되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들의 옆에 가 앉았다.
“먀아! 으먀아!”
“네, 황자님. 뭐라고 하셨나요?”
막대기를 흔들던 프리지어가 물었다. 그때였다. 디트리히가 끙끙거리며 찹쌀떡 같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어머나!”
그러더니 혼자 휘청휘청하며 내 쪽으로 기어 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디트리히를 향해 양손을 벌렸다.
그러자 아기가 보라색 눈을 방긋 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으먀아!”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지만 역시나 다프네 양을 많이 따르시네요. 폐하께서도 그렇고, 혹시 다프네 양에게 황족이 좋아하는 냄새라도 나는 걸까요?”
“글쎄요….”
귀여운 아기를 마주 보며 웃고 있자니 프리지어가 문득 중얼거렸다. 질투가 나서 그러나 싶어 쳐다보자, 그녀는 오히려 디트리히가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젤라가 말했듯 말투가 좀 까칠한 데가 있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프리지어도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한데.
그녀가 황후 자리를 놓고 나를 눈엣가시로 보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꽤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나는 황후가 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아셰라드렌을 사랑하고 있다. 그런 내가 프리지어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방법이 있기는 할까.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그저, 디트리히를 예뻐하는 마음만큼은 같은 프리지어를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