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그 남자 (1/95)


1. 그 남자
2022.04.01.


소유는 눈앞의 태오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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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시간 끌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

어찌나 낮은 목소리였던지 잔잔하던 커피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덩달아 소유의 눈동자도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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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시죠?”

무례한 건가.

직설적인 건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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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혼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

소유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커피만큼이나 새까만 한 눈동자와 충돌했다.

너무나 강렬한 충돌이었던 탓에 작은 스파크가 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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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튕길 시간이 필요한가?”

태오는 이 지루한 자리에서 얼른 떠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소유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거만한 태도의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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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한 시간 낭비 싫어합니다.”

만약 자신의 처지가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망설임 없이 그를 두고 일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분하게도 소유는 그의 말대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늘 소유는 떠밀리듯 이 남자와의 맞선 자리에 나왔다.

아마 이 남자를 잡지 못한다면 집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테다.

소유가 올라오는 감정을 참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태오는 파르르 떨리는 소유의 속눈썹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한참 후, 소유에게서 예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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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죠, 결혼.”

태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혀로 입술 표면을 핥았다.

더할 나위 없이, 조금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대답이었다.

원하던 말을 끌어낸 태오의 내부에서 작은 희열이 용솟음했다.

하지만 소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평소의 건조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기에 그 흉포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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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

태오가 가볍게 일어나 재킷을 팔에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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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일정은 내 비서가 정리해 보내드릴 겁니다.”

그에겐 인생에서 가장 ‘사적인’ 결혼도 하나의 사업일 뿐인 듯했다.

나는 그의 사업파트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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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유 씨. 또 봅시다.”

군더더기 없는 인사 후 그는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기가 빨린 소유가 털썩 의자에 등을 기댔다.

소유가 느낀 ‘강태오’란 남자의 첫인상은 무척 위압감이 넘쳤다.

불필요한 과정은 몹시 싫어하는 듯했고, 어떻게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일을 끌고 가는 추진력이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철없는 고집도, 하찮은 자존심도 전부 소용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언제나 타인보다 한 계단 높은 곳에서 서 있었을 테다. 언제나 낮은 곳에만 서 있던 소유에겐 감당하기 힘든 존재였다.

간단한 몇 마디로 소유를 단숨에 긴장시켰고, 주위의 흐물거리는 모든 것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분명 엄청난 미남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새로운 경직을 몰고 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그가 가진 독보적인 카리스마로 연결될 뿐이었다.

잘한 결정일까.

이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지만, 앞날이 무척 걱정되었다.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저 남자 곁에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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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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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니?”

터덜터덜 돌아오니 집에서 공연옥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옥은 소유의 어머니였지만, 소유를 낳아준 사람은 아니었다.

소유가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와 결혼한 계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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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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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잘됐네.”

연옥의 붉은 입술이 찢어질 듯 위로 올라갔다.

소유는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은 맞선 자리를 떠올리며 멈칫했다.

연옥이 그런 소유를 힐끔 바라보았다.

입술만큼이나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연옥의 손이 격려하듯 소유를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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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다.”

마치 마음속의 모든 잡념 따위는 다 잊어버리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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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셨을 때, 회사가 위태로우면 얼마나 상심하시겠니?”

소유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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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단다.”

분명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할 때까지만 해도 안정적인 매출에, 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거래처와 관계까지, 아주 건실한 중소기업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연옥은 줄곧 회사가 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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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그룹과의 동맹이라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단다.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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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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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한 결정이야.”

지난해,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예고도 없이 닥친 덕에 소유는 충격에 빠져 몇 차례 혼절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식물인간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원인은 차량 브레이크 고장이었다.

멈춰야 할 신호에 멈추지 못하고 그만 옆쪽에서 달려오는 덤프트럭과 충돌하고 말았다.

덤프트럭 운전자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소유의 아버지 쪽은 상황이 달랐다.

운전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아버지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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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마만 믿으렴.”

소유가 슬픔에서 헤어 나지 못하고 있을 때 연옥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의 회사를 차지했다.

그녀는 여왕처럼 직원들 위에 군림했고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을 시도했다.

그녀에게선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삭막해졌고, 피폐해졌고, 황량해졌다.

사람 냄새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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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분명 네 선택에 기뻐하셨을 거야. 네가 어디 가서 그런 남잘 만나겠니? 분에 넘치는 남자지.”

강화 그룹 장남에게서 온 맞선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연옥이었다. 어떠한 위험이 도사릴지도 모르면서 연옥은 덜컥 수락해 버렸다. 물론, 당사자인 소유에게는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친딸인 다해가 아닌 제게 들어온 자리라 그랬을까.

어찌 되었든 대기업과의 동맹으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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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도 다시 일으키고, 넌 강화 그룹 안주인이 되는 거야. 그야말로 일석이조지.”

연옥의 말투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이렇게 친절한 말투에도, 그녀의 붉은 것들에 할퀴어지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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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자랑스럽다.”

연옥의 태도가 묘하게 변하기 시작한 건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후부터였다.

무어라 말로 콕 집어내기엔 교묘하고 모호한 상황에 소유는 날카롭게 피어난 의심 한 떨기를 감춰야만 했다.

게다가 그녀는 소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의 목숨줄을 쥐고 있지 않은가.

고분고분 굴 수밖에 없었다.

자세를 낮게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집 안, 소유는 지독하게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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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지켜주실 거죠?”

내내 연옥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소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겁이 나도 단 하나, 반드시 확인받아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이 결혼의 본질적인 목적이기도 하고.

연옥이 반지의 커다란 다이아를 만지작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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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끝까지 책임져 주겠다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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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방금 그 말, 무슨 뜻이니?”

순식간에 연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따금 연옥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익숙하게 목을 죄어오는 공포에 소유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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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남편을 버리기라도 한다는 소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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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요. 어머니. 제가 말실수를…….”

뒤늦게 변명을 해 보았지만, 연옥은 마치 무언가에 찔린 사람처럼 본능적으로 세게 소유의 볼을 내려쳤다.

반지의 날카로운 부분이 소유의 매끄러운 볼에 상처를 냈고, 이윽고 피가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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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에게 너무 버릇없는 말이구나.”

소유가 따끔한 볼을 어루만졌다.

손끝에서 뜨끈하고 점도 있는 액체가 느껴졌다.

소유가 눈물을 필사적으로 목 아래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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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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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죄송합니다.”

형편없는 목소리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계단에 서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새언니 다해가 킥킥 웃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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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안 그럴게요.”

잠시 그런 소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옥이 언제 뺨을 내려쳤냐는 듯 소유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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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

차가운 체온이 소름이 끼쳤지만 차마 싫은 티를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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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좀 예민했어.”

연옥이 실크처럼 보드라운 소유의 볼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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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엄마를 이해해 줘야지. 누가 이해해 주겠니. 안 그래? 엄마도 힘들어.”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연옥은 소유의 손을 꼭 잡고 말했었다. 갓난아기 때 돌아가신 친모의 자리를 대신해 주겠노라고. 친딸인 다해와 차별 없이 키우겠노라고.

소유는 아직도 그때의 감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연옥이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냥 가끔 자신의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것일 뿐이라고.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버릴 만큼 악인은 아닐 거라고.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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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버지가 깨어나기 전까지 반드시 회사를 다시 세울 거란다.”

소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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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딸들 행복하게 사는 것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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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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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 남편 될 사람, 결혼 시장에선 꽤 인기야. 그 정도 재력에, 외모에, 학력이 어디 흔하니?”

소유가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있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대단한 남자가 왜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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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얼굴에 흉질라. 약 꼭 바르고 자렴.”

우두커니 서 있는 소유를 두고서 연옥은 고고한 걸음걸이로 침실로 향했다.

소유가 착잡한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분명 아버지와 단둘이 살 때만 해도 이 집은 최고의 궁전이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했고, 따뜻했으며, 놀거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저 가시덩굴로 가득한 폐허로 변해 버렸다.

기쁨도,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후두둑,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릴 적부터 신데렐라라는 동화가 정말 싫었다.

새엄마와 새언니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왕자에게 수동적으로 선택되는 삶이라니.

그러나 이젠 제가 신데렐라 신세가 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데렐라보다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적어도 동화 속 왕자는 신데렐라를 사랑해 주었으니.

하지만 현실의 강태오는 정소유를 사랑하지 않는다.

물건처럼 강화 그룹에 팔려 가는 것뿐이다.

[강태오-정소유 결혼 일정 관련의 건]

그 순간, 소유의 휴대폰으로 업무 메일 같은 딱딱한 결혼 계획이 날아들었다.

소유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장 노트북을 열었다.

마냥 실의에 빠져 있을 순 없었다.

아무리 운다고 한들, 고난과 시련은 비껴가지 않으니.

결국엔 해치워야 할 과정이니.

결혼식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 * *

이틀 후 소유는 태오와 다시 만났다.

태오는 옷과 시계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무표정이었고, 딱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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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급하지 않나요?”

잠시 망설이던 소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정표를 받고서 줄곧 든 생각이었다.

태오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 짙어서 주위의 여린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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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말이에요. 보통 커플들은 넉넉하게 6개월 이상 준비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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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커플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호한 음성에 말문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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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것들은 우리 쪽에서 고용한 웨딩 플래너가 모두 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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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건 저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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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쪽 어머니가 원하셔서. 이왕이면 빠른 결혼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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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나요?”

그렇다면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태오는 소유의 집안이 원하는 대로 맞춰 주고 있으니.

불평을 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결혼식임에도 모든 것이 타인의 뜻에 의해 흘러가는 이 답답한 상황에, 소유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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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몰랐네요. 그럼 기사는 내일쯤 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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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계획대로.”

태오의 비서가 쓴 시나리오는 탄탄했다.

고등학교 때 떠난 유학길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때부터 남몰래 사랑을 키워왔다는 러브스토리였다.

99퍼센트의 거짓에 1퍼센트의 진실이 섞여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것은 맞으니.

사람들이 깜박 속을 만큼 신빙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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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제가 쓸 물건들은 제가 직접…….”

소유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태오가 대뜸 일어나 소유에게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큰 키에 소유는 움츠러들었다.

딴지를 걸어서 화라도 났나.

그의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왠지 모를 분노가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가 입이라도 맞출 듯 불쑥 소유에게 바짝 다가섰다.

놀란 소유가 숨까지 멈추고 말았다.

그러나 태오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곳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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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디서 다친 겁니까?”

지난밤, 연옥에게 맞고 난 뒤에 생긴 상처였다.

화장으로 꼼꼼하게 감춘다고 감췄는데 태오는 눈썰미가 아주 좋은 편인 듯했다.

소유가 다급하게 상처를 손으로 가렸다.

왠지 솔직하게 말하기 싫었다.

감추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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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냥 긁힌 거예요.”

태오가 소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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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조금만 떨어져 주시겠어요? 사람들이 우릴 이상하게 쳐다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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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긁혔는데?”

묘한 반말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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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사람한테 흠집 나는 거 못 참는데.”

소유는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기에 완벽하게 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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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한테 긁힌 건지, 동물한테 긁힌 건지 모르겠는데 똑똑히 전해요.”

이 맥락에서 ‘내 사람’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법적으로 묶인 형식적인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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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더 흠집 내면 그 목을 확 비틀어 버릴 거라고.”

아버지의 사고가 발생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소속감이었다.

그런데 저 잔인한 말에 소속감을 느끼는 나는, 과연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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