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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이즐과 노아 (3/95)


3. 헤이즐과 노아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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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호텔에서의 두 번째 밤.

낯선 곳이었는데도 오히려 몸과 정신은 집보다 편안했다.

번갈아 걸려 오는 연옥과 다해의 전화를 빼면 말이다.

노이로제가 걸려 소유는 그대로 휴대폰 전화를 꺼 버렸다.

겨우 그뿐이었는데, 난생처음 겪어 보는 해방감에 기분이 개운했다.

뒤늦게 사춘기라도 찾아온 걸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소유는 상쾌한 마음으로 샤워까지 마치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이다음엔 느긋하게 영화나 볼까.

혼자만의 계획을 짜고 있는데,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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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서비스 시킨 적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유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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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남자인 줄 알았더라면 자는 척을 하고 있을걸.

후회해 보지만 이미 문은 활짝 열렸고, 태오는 멀쩡히 깨어 있는 자신을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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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꺼져 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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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금 귀찮은 전화가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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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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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말투가 어쩐지 저를 걱정했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결혼을 비즈니스로 여기는 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착각이 들어 소유는 혼란스러웠다.

바보처럼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데, 태오가 들고 온 와인 병을 흔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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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도 될까? 마침 상의할 것도 있고.”

결혼 문제에 대한 이야기인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그를 밀어낼 명분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 호텔은 그의 소유이고, 소유는 그저 신세를 지는 입장일 뿐이니.

소유가 슬며시 비켜서자 태오가 성큼성큼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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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좀 마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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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못 마셔요.”

태오가 고급스러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소유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하게 와인 코르크 마개를 땄다.

거침없는 그의 손길에, 소유는 넋 놓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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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소유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태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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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지난 밤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가?”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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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라면 옷을 좀 제대로 챙겨입는 게 어때?”

그제야 소유는 자신이 걸친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샤워를 하고 나온 탓에 아슬아슬한 가운 차림이었다.

헉. 소유가 다급하게 가운을 여미며 침실로 사라졌다.

소유가 사라진 사이 태오는 잠시 눈을 감고 끓어오르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가라앉혔다.

가지고 있는 옷으로 그나마 꽁꽁 싸매고 나왔을 때, 태오는 평소의 무심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문제는 소유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혼자서 이상한 기류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긴장한 나머지 몸이 고장 난 로봇처럼 움직였다.

태오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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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토록 야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남자라니.

미숙한 소유에겐 무척이나 위험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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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숨 막히는 적막을 참지 못한 소유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태오는 대답 없이 소유와 눈을 마주쳤다.

질문을 허락한다는 의미인 듯했다.

소유가 목을 가다듬었다.

나름대로 중요한 질문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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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와의 결혼을 결심한 거죠?”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목소리는 긴장감을 고스란히 담고서 잘게 떨렸다.

부끄러워진 소유가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

의자에 등을 기댄 태오는 그런 그녀의 붉어진 목덜미를 관찰했다.

얼굴이 하얀 편이라 차이는 극명했다.

목이 아닌 다른 부위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와인으로 목을 축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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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그룹에 비하면 우리 집은 그리 대단하지 않잖아요.”

연옥은 태오와의 결혼이 자신의 공인 듯 포장했지만, 사실 아니었다.

먼저 연옥을 찾아간 것도, 소유와의 결혼을 제안한 것도 모두 태오였다.

연옥은 단지 그 우연히 다가온 행운을 냉큼 잡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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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수준의 재벌가 여자들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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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해 보여서.”

태오가 소유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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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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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네가 보여서.”

어두운 밤엔 도시의 불빛이 유독 더 도드라진다.

시린 야경에 눈을 깜박이던 소유가 태오의 말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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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을 여러 번 보는 게 귀찮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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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 네가 보였다고. 그게 이유야.”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왜 하필 당신의 눈에 내가 보였고, 어째서 그게 이유가 되었을까.

이젠 제가 오해를 쉽게 하는 편인지, 아니면 태오가 오해를 살 만한 말을 쉽게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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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는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거지?”

이번엔 태오가 되물었다.

소유는 앞에 놓은 와인잔에 손을 뻗어 들이켰다. 제가 술이 약한 편이란 사실도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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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여사가 등을 떠밀어서?”

소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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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공 여사가 다른 남자를 지목했으면, 그 남자와 결혼하려 했겠지?”

태오의 말엔 이유를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느껴졌다.

소유가 느려진 눈동자로 태오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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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내게 선택할 힘은 없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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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신에게 고맙게 생각해요. 이 말은 꼭 해 두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몸이 다 타버릴 듯 달아올랐다.

고단한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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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태오의 말소리도 점점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소유의 상태에 태오가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애써 견디고 있던 소유의 몸이 태오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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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술 못 하시네.”

아직 반도 비워내지 못한 소유의 와인잔을 보고서 태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감길 뻔했던 눈을 겨우 뜬 소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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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이 있어요.”

당장 잠들더라도 태오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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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태오가 소유의 입술 주위에 묻은 빨간 와인을 엄지로 닦으며 대답했다.

태오의 창백한 손가락이 붉게 물들었다.

그건 어떤 소년의 첫사랑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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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이 완전히 이해되진 않지만, 어쨌든 내가 당신 결혼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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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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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 할게요.”

소유는 그들의 결혼 생활을 걸고 거래를 시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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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그 두 글자에 얼마나 위험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고서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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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든.”

소유의 몸에 점점 힘이 빠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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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소유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태오는 소유가 조금 더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어깨의 위치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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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뭐든 할 수 있어?”

그가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잠든 소유의 얼굴을, 매우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소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태오에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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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것이라고 해도 들어주나?”

아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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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나? 넌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었겠지만, 나는 꼭 너여야만 했다는 거.”

잠든 자에게선 야속하게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태오에게서 아주 드문 표정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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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Hazel.”

그가 웃었다.

그것도 아주 예쁘게.

아마 그의 주위 사람들이 본다면 기겁하고도 남을 광경임이 분명했다.

* * *

Hazel.

태오를 제외한 유일한 한국인인 소녀의 이름은 분명 그랬다.

하트와 곰돌이 스티커가 마구 붙은 소녀의 캐비닛에서 확인했으니 틀림없었다.

태오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미국에서도 부자와 수재들이 다니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 당연한 코스인 명문고답게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학교였지만, 신기하게도 한국인은 단둘이었다.

소녀는 통통 튀었다.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소녀의 웃음은 화사했다.

온통 무채색이던 태오의 일상에 들어온 유일한 유채색이었다.

그래서인지 태오의 눈은 어느 순간부터 소녀를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클래스메이트들과 풋볼을 하고 교실로 돌아오던 길, 태오는 소녀의 은밀한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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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엄청 잘 지내. 걱정하지 마요.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사람 없어.”

익숙한 모국어여서 더 잘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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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다 나 좋아해.”

소녀는 평소처럼 반짝였다.

기다란 갈색 머리에는 윤기가 흘렀고, 착용하고 있던 체크무늬 머리띠가 발랄한 분위기를 증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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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랑 언니는 잘 지내지?”

그러나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태오만큼이나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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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아빠가 행복하면 됐어요.”

그때, 태오는 생각했다.

저 밝아 보이는 아이도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무거운 사정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타인에게 티를 내기 싫어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수면 아래 소녀의 발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악착같이 발버둥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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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도 사랑해. 보고 싶어요.”

여태껏 가지고 있던 소녀에 대한 환상은 와장창 깨졌지만, 이상하게도 소녀를 향한 열망은 더욱 커져 갔다.

태오에게 새로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몰랐다.

왜 저 가녀린 소녀를 지켜주고 싶어졌는지.

또, 왜 죽은 듯 잠잠하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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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너도 한국인이라며? 나도 한국인이야. 난 Hazel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이제 와 고백하건대, 첫사랑이었다.

첫눈에 반했다.

동질감인 줄 알았던 마음은 유치하게도 사랑이었다.

난생처음으로 특별하게 대해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절대 찾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찬란한 순간은 평범한 나날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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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h.”

소녀를 응시하는 동안은 그를 옭아매고 있는 부담감이나 책임감 등이 옅어졌다.

두근거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오롯이 열아홉의 소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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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그런데 너 정말 잘생겼다! 내 친구들이 다 너 멋있대.”

밝게 웃는 소녀는 소년에겐 하나뿐인 낙원이었다.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한 대화는 그것이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소녀를 멀찍이서 볼 때마다 소년의 세상은 조금씩 밝아졌다.

그래서 예정에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 소년의 삶은 그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 당시 소녀는 절대 몰랐겠지만.

그래서였을까.

한국에서 소유와 재회했을 때 태오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해맑게 웃던 소녀는 홀로 남아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꽉 깨문 여자가 되었다.

수동적이고, 소심하고, 순종적인 소유는 10년 전의 헤이즐과 전혀 다른 인격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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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너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는 와중에도 소유의 눈꼬리를 따라 투명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태오는 애달피 그것을 닦아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손을 뻗을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찾아낼걸.

태오는 그 밝은 미소를 되찾아 주고 싶었다.

그저 너무 늦지만은 않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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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내가 지켜줄게.”

태오가 중얼거리며 그녀를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있자니 태오의 머릿속으로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태오는 그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할 생각이었다.

과거를 회상할 때와 달리 상상도 할 수 없는 잔혹한 얼굴이 주위의 공기를 얼게 만들었다.

아마 소유는 평생 보지 못할 태오의 진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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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아무도 널 못 건들게 될 거야.”

그건 소유를 향한 약속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태오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옆에 더 머무르다간 몹쓸 짓을 할 것 같아서였다.

태오는 테이블 위에 쪽지를 남겨 두고, 재킷을 팔에 걸쳤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내게 천천히 마음을 열어도 괜찮다.

그래도 난 너에게로 걸어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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