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그의 첫사랑 (6/95)


6. 그의 첫사랑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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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내에 소문이 자자해. 곧 결혼할 부사장이 예비 신부랑 너무 사이가 좋은 나머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애정행각을 한다고.”

직설적인 태오의 말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한참 캑캑대던 소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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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은,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지난밤 바에서 있었던 사고를 목격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을 두고 얼마나 낯부끄러운 추측이 오가고 있을지 직접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소유가 손부채질을 하며 열이 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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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빨개지는 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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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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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말이야.”

포크로 고기를 쿡쿡 찌르고 있던 태오가 문득 말했다.

그랬던가.

저도 모르는 특징을 잡아낸 태오를 보다가 소유가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딴 길로 새기 전에,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괜한 오해와 실수를 하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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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은 바쁘면 생략해도 괜찮아요.”

신혼여행은 그들이 결혼식 전에 상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차피 형식적인 결혼이라 그는 식만 대충 끝내고 싶어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소유가 선뜻 먼저 말을 끝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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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는 시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는 신혼여행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혼식은 일 처리하듯 빠릿빠릿하게 진행하는 사람이.

정작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신혼여행엔 일주일이나 할애하겠다니.

소유로서는 살짝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소유가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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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자 태오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여상한 얼굴로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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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의아했지만 굳이 가겠다는 그를 만류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 같아 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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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나라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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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나라라기보다는, 좋아하는 나라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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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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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요.”

순간 태오의 목젖이 잠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자유로웠던 일상, 늘 즐거웠던 친구들과의 대화, 가면무도회 등 옛 항수를 떠올리던 소유는 그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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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좋은 추억이 많았나 봐.”

태오가 어두운 눈동자에 소유를 가득 담았다.

궁금해졌다.

네가 떠올리는 그 행복한 기억 속 그 소년이 존재하는 건지.

아주 찰나의 기억이라도 좋으니 남아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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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남학생이라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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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그땐 내가 아닌 것처럼 멋대로 살 수 있어서 좋았을 뿐이에요.”

태오의 목젖이 다시 고요해졌다.

역시나.

태오가 흥미 없는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 두었다. 가뜩이나 없던 식욕이 더욱 떨어졌다.

이만 일어날까, 제안하려는 순간 불현듯 소유가 탄성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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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학생 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 학교에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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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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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왜 잊고 살았지. 이름은 Noah였어요.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목소리가 아주 낮았던 건 기억이 나요.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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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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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뭐 하면서 살고 있을까. 그 애가 가면무도회 초대장을 캐비닛에 넣어 두고 간 적이 있어요. 그 파티에 갔을 때…….”

갑자기 신이 나 이런저런 말을 하던 소유가 슬쩍 태오의 눈치를 살피고서 말을 얼버무렸다.

더 듣고 싶었는데.

태오는 그 뒤의 말이 무척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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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미국을 가기엔 좀 촉박한 시간이죠?”

그녀는 태오의 침묵을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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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으로 가도 딱히 상관은 없어요. 국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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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자. 미국.”

이번에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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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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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고, 미국. 네가 가고 싶다면.”

묘한 느낌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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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한테 말해서 준비시킬게. 그리고 드레스는 다음 주 화요일에 보는 것으로 하지.”

태오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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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회의 하나가 펑크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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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도, 같이 보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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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원래 그런 거 예비 신랑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닌가?”

소유가 짧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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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진짜로 결혼하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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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짜로 결혼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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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아요. 그런데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이 같아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상하게도 이 남자 앞에선 잠시만 방심해도 실언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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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면 그것도 노력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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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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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거 말이야.”

커다란 운석이 날아와 쿵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이 소유를 힘껏 흔들어 놓았다.

그로 인한 파편들이 바닥으로 촘촘하게 떨어졌다.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소유가 애써 동요를 감추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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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노력으로 되나요. 그럼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없을걸요.”

답지 않게 단호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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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얼추 상의해야 할 건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갈까요?”

휘말리지 않고 먼저 깔끔하게 선을 그어 주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어쩐지 태오는 미동도 없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태오의 비서에게 오후의 바쁜 일정을 전해 들은 소유는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쯤은 출발해야 회의에 늦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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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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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한 한국인 남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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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h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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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그 시절 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가?”

뜬금없는 물음에 소유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 지난번, 재현으로 인해 일어났던 트러블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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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아니에요.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내가 그 애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리 없죠.”

그래서 일부러 더 냉정하게 말했다.

두 번 다시 태오와의 냉전을 겪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형식적인 듯 형식적이지 않은 이 관계가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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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스쳐 간 인연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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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태오의 손가락이 일순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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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인상적인 인연이었다고 한들,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난 이제 당신과 결혼하는데.”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한 번 기억해내자 흐릿했던 소년의 얼굴이 조금씩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전체적인 실루엣이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애도 이 남자만큼이나 잘생겼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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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죠.”

그래. 그랬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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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존재는 완전히 잊은 채로.”

교내에서도 유명할 만큼 수려한 소년이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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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 나한텐 당신과의 결혼이 제일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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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태오는 소유를 따라 웃지 않았다.

* * *

아버지의 재혼 이후 소유의 모든 순간이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보냈던 10대의 끝자락.

그 시절은 소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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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Haz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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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with us!”

Hazel. 일명 헤이즐.

소유는 아버지가 오래된 외국 영화를 보다가 직접 지어 준 이름으로 3년을 살았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의 고단함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다.

어두운 과거를 잊어버릴 정도로 밝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원래도 인종차별이 별로 없는 동네이긴 했지만, 소유는 유독 인기가 많았다.

이국적인 외모, 상냥한 성격, 높은 성적, 적극적인 자세의 그녀를 모두가 좋아했다.

제 일거수일투족을 질투하는 다해와 그런 다해를 눈감아 주던 연옥 사이에서 기도 못 펴고 수동적으로 살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소유의 캐비닛에는 친구들이 보낸 파티 초대장이 넘쳐흘렀다.

파티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거의 주말마다 새로운 파티가 열렸다.

이번 주말엔 ‘Noah’라는 전학생이 여는 가면무도회에 가기로 친구들과 약속했었다.

소유는 딱 한 번, 그 소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석양의 옥상과 매우 잘 어울리던 소년이었지만 어쩐지 소년은 소유를 정면으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일부러 외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유는 하늘빛과 같은 색으로 물든 소년의 옆모습만 애타게 응시해야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대화의 기회를 노렸으나 매번 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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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wait!”

이번만큼은 소년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말.

소유는 친구들과 드레스 코드를 맞추고, 저와 닮은 토끼 가면을 쓰고 호화로운 저택에 도착했다.

규모가 단순한 홈 파티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대했다.

전학생이 엄청난 부자인가 봐.

감탄하며 수영장을 가로지르는데, 바로 위에서 찬란한 빛깔의 불꽃이 터졌다.

소유는 입을 벌리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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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소유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서 홀린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 순간, 수영장에서 놀던 친구들의 격한 움직임에 물이 튀고 바닥이 흥건해졌다.

놀란 소유가 그만 미끄러져 수영장에 빠지기 직전, 어느 다부진 팔이 나타나 소유의 허리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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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my gosh.”

덕분에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젖은 생쥐 꼴이 되는 것을 면했다.

여전히 하늘에선 불꽃이 팡팡 터지는 가운데, 소유는 가면 너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소유와 같은 동양인으로 보였다.

그가 파티의 주최자란 것쯤은 단숨에 알아차렸다.

이 파티에서는 주최자만이 블랙 가면을 쓸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상과 맞춘 블랙 가면을 쓰고 있었다.

둘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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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너는…….”

반가움에 한국어가 먼저 튀어 나갔다.

불꽃이 이번엔 하늘이 아닌 가슴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나머지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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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야지.”

소년의 목소리는 은근했고, 어딘가 모르게 미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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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소유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짓궂은 마음이 생겨났다.

파티의 룰을 깨고서 가면 너머 소년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싶어진 것이다.

희미해져 가는 소년의 생김새를 제대로 각인하고 싶어졌다.

소유가 소년의 가면으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 저 멀리서 소유의 친구들이 소유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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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l!”

친구들의 성화에 소유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소유를 가볍게 놓아주었다.

뜨거운 체온이 떨어지자 약간의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소유는 은밀한 곳에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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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보자, Noah!”

하지만 오늘은 이만 인사를 건네는 수밖에.

다음엔 꼭 얼굴을 맞대고 길게 대화해 봐야지.

소유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서 조심조심 친구들에게 걸어갔다.

불꽃이 이번엔 하늘이 아닌 가슴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불현듯 뒤로 돌았을 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생겨났다.

여전히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린 소유는 숨을 가다듬었다.

아까 그 저릿한 감각이 저만의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도 느껴진 것인지 궁금했다.

다음 주 월요일, 소유는 전학생을 찾아 헤맸다.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던지려고.

하지만 그를 찾는 것이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몇 달 뒤, 소유는 연옥에 의해 강제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소년, 노아와는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 * *

약속한 다음 주 화요일까지 태오를 보지 못했다.

비서의 말로는 신혼여행을 위해 낸 일주일의 휴가 때문에 그는 더욱 바빠질 것이라 했다.

재벌이 더 열심히 사는구나.

돈 펑펑 쓰면서 여유롭게 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반면 그런 그가 부럽기도 했다.

요즘 들어 소유는 방황 아닌 방황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태오와 동갑인데, 그녀에겐 무어라 딱 정의할 만한 직업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출근도 하며, 회사 일을 알음알음 배우고 있었는데, 그 기회마저도 완전히 박탈당했다.

연옥이 ‘신부수업’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명분을 대며, 실무에서 물러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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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고 다들 바쁘게 사네.”

강화 그룹 장남의 약혼자.

그 이름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 거울 속의 저를 보며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방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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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얼른 드레스나 보러 가고 싶다.”

그렇게 또다시 무료한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요일이 찾아왔다.

태오와 드레스를 함께 보러 가기로 한 바로 그날이었다.

[로비에서 만나.]

혹시나 시간이 안 되면 혼자 가도 된다는 연락을 남겨 두었는데, 이런 답장이 날아왔다.

괜히 데이트라도 하는 것만 같은 설렘에 약속 시간보다 빨리 내려와 태오를 기다렸다.

호텔 로비는 오늘도 방문객들로 득실댔다.

여행 온 사람, 출장 온 사람, 그냥 쉬러 온 사람.

각자의 사정을 지닌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태오를 기다리는 시간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다.

로비에서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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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대는데 누군가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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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죠?”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던 소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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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물산 둘째 따님.”

지난번 태오와 냉전 아닌 냉전 상태였을 때 그와 함께 있던 그 여자.

태오의 넥타이를 다정하게 정리해 주던 그 여자.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터라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그 날의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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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세리라고 해요. 저번엔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던 거 같아서.”

세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소유가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세리는 다소 센 힘으로 소유의 손을 흔들었다.

소유의 마른 몸이 위태롭게 휘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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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그룹의 무남독녀.”

세리는 굳이 묻지도 않은 자기 신상정보를 읊었다.

클로버 그룹이라면 강화 그룹과 맞먹을 정도로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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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름과 함께 집안을 밝히는 게 예의잖아요?”

세리는 별 의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소유에겐 선을 긋는 것처럼 들렸다.

세리의 시선은 소유를 깔보고 있었고, 오만하게 든 턱엔 특권 의식이 잔뜩 풍겨 나왔다.

너와 우리는 사는 세상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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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그 꼬맹이가 언제 커서 결혼을 다 한담. 세월 참 빠르네.”

우리에겐 네가 모르는 긴 시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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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지난번에 보니까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너무 상심하진 말아요. 걘 원래 마음을 열지 않는 상대에겐 쌀쌀맞거든요.”

너와 달리 난 강태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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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뭐, 계약으로 맺어진 결혼 상대에게 다정하게 굴어서 뭐 하겠어요. 형식적인 관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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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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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씨도 그렇잖아요. 우리 태오를 좋아해서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때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로비에 멈췄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지만, 엘리베이터와 등을 지고 있던 데다 세리와의 대화에 너무 집중하고 있던 탓에 소유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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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오 씨랑, 무슨 사이예요?”

짧은 물음이었지만 사실 소유는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누군가의 시원한 걸음걸이를 보며 씩 웃던 세리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소유의 코앞에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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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오가 말 안 했어요? 내가 태오 첫사랑이란 거.”

지나치게 은밀한 속삭임이었던 나머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오로지 소유의 귀에만 들렸다.

소유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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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아픔이 컸던 모양이에요. 대뜸 중소기업의 딸과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한 거 보면. 좀 놀랐어요. 당신에게 미안하지만, 두 집안은 급이 다르잖아요.”

아버지가 밑바닥부터 시작해 일궈 낸 회사였다.

대기업만큼은 아니지만 건실한 회사로 평가받아 왔다.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을 무시하는 세리에게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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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딴 여자한테 주려니 아깝네.”

또, 태오를 물건 취급하는 태도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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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시 가져올까.”

무언가가 폭발하려는 찰나, 익숙한 손이 소유의 손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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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딱 붙어서 뭐 해? 언제부터 친했다고?”

특유의 무신경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오였다.

소유가 떨리는 눈으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세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맞잡은 두 사람의 손으로 향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지만 억지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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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점심이나 먹을까 해서 왔다가 만났지. 그런데 둘이서 어디 가기로 했나 봐?”

세리의 목소리는 귀를 타고 흘러가 버리고, 소유에게 태오의 모든 정신이 쏠렸다.

왜 이런 울 듯한 얼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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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드레스 고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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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고르는 것도 같이 가기로 했어?”

세리는 태오답지 않은 세심함에 더 이상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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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보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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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세리의 말을 끊은 태오는 소유의 손을 이끌며 세리를 지나쳐갔다.

세리는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돌았다.

하,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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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런 계집애한테 빠지기라도 한 거야?”

세리가 기억하기론 두 번째였다.

태오의 관심을 저토록 무자비하게 독식한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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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강태오가?”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어 소유를 찍어 내렸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강태오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대뜸 끼어든 얄미운 계집애로 인해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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